왜 우리는 상대방에게 죄가 있을 때, 상대방의<모든 것을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건가요? - P515

<공작이 두려워하면서 그렇게 사랑하는 얼굴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작은 아글라야가 없다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 아글라야는 공작이 그 정도로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평생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하하! 어떻게 두 여자를 한꺼번에 사랑한단 말인가? 어떻게 두명의 다른 연인을?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구나..………. 불쌍한백치! 앞으로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까? > - P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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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키피아 (양장, 한정판)
아이작 뉴턴 지음, 박병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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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읽지 못했지만 받은 것 만으로도 뿌듯해지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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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키피아 (양장, 한정판)
아이작 뉴턴 지음, 박병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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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대표했고 새로운 수준으로 인간을 도약시킨 뉴턴의 저작을 비로소 접하게 되어 기대가 아주 크고 설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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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의 역사 - 천년의 제국, 동서양이 충돌하는 문명의 용광로에 세운 그리스도교 세계의 정점 더숲히스토리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지음, 최하늘 옮김 / 더숲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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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어떤 호칭이 정해지는 것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한다.
자신들을 항상 로마 제국이라 생각했지만, 비잔티움 제국 역시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
아마도 후세 사가들이 보기에 비잔티움 제국과 로마 제국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

서로마의 멸망 후 서유럽은 중세라는 시대로 접어든다.
하지만, 로마의 명맥은 끊기지 않고 그들이 말하는 동방에 살아남아 있었다.
엄연히 제국으로서 군림하고 있었으며, 또 다른 전성기를 누리기도 한다.
사실 천년을 넘게 지속된 제국의 역사에 비해 그 관심도는 너무 적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이런 무관심에 대해 저자는 에드워드 기번이라는 역사학자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있다.
기번이 가진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혹독한 평가가 이 무관심의 가장 커다란 이유였으며, 후세 사가들이 비잔티움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번에 대한 비평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비잔티움 제국은 유럽과 아랍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존재일 것이다.
서로마 멸망 후 게르만 계열 종족의 세력권이 되어버린 서유럽과 사산조 페르시아로부터 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아랍권의 사이에 존재하면서 어느 때는 중재자로서 어느 때는 방패로서 존재했기 때문에 그렇다.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이해 없이 서유럽과 아랍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더욱이 가톨릭과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존재이기도 하다.

책의 내용은 숨 가쁘게 진행된다.
시오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대부분의 내용이 서로마의 역사이지만, 15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에 버금갈 정도로 긴 천년이라는 시간을 한 권의 책에 담아내었으니 엄청나게 축약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뒤표지에 적힌 "천년 제국의 집약된 역사가 쇼츠 영상처럼 흘러간다"라는 말은 이 책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콘스탄티누스 1세를 그 시작으로 하여 (이 책의 저자는 동로마의 시작을 그렇게 잡고 있다) 콘스탄디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의 제위 시절까지를 8개의 시기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고 멸망 후의 이야기까지 담아내고 있다.
역사에 대한 서술은 지극히 감정을 배제한 채 진행되지만, 시대 구분을 통해 이 역사 학자가 비잔티움 제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조금은 알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약간의 각오가 필요하다.
몇 장의 페이지를 읽는 동안 비잔티움의 시간은 한 세대 이상 흘러가기 때문에 그 사이에 등장하는 명칭의 홍수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누군가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언어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록 번역판으로 역사를 접하더라도 익숙하지 않은 인명과 지명은 항상 커다란 난관으로 작용한다.
챕터마다 쏟아지는 인명과 지명 그리고 관직명 등등 수많은 명사들의 물결은 마치 축약된 영화 예고편과 같다고 할까?

그래서 역사 초보자인 나와 같은 수준의 독자는 이 책을 읽어내는 것이 그리 수월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은 비잔티움 제국을 처음 알아가기 위한 독자에게는 시작점이 되어 줄 것이고, 이미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진 이에게는 새로운 이해를 도와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내용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마지막 챕터였다.
저자는 이 마지막 챕터에 알토란 같은 내용으로 수많은 이민족을 지역별로 정리해놓았다.
서로마의 멸망이 훈족이라는 강력한 유목민의 이동에서 촉발된 것임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수많은 인종과 민족이 경쟁하고 협력해온 것이 역사이기에 민족에 대한 이해 또한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지식일 것이다.
아마도 이 마지막 챕터는 저자의 따뜻한 배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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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스윙 - 나 홀로 사회인가 우리 함께 사회인가
로버트 D. 퍼트넘.셰일린 롬니 가렛 지음, 이종인 옮김 / 페이퍼로드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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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의 부제는 이 책의 주제와 딱 맞는다고 할 수 있다.

저자인 로버트 D. 퍼트넘 교수는 인문학자이자 사회과학자로 미국뿐 아니라 다양한 국가에서 정책자문으로 활동한 이력을 갖고 있다.
책에서 그는 약 120년 동안 미국 사회가 어떤 변천과정을 겪어왔는지를 설명하고 있으며, 그 분석 결과를 가지고 미래에 대한 조언을 제시한다.

나 - 우리 - 나

저자가 분석한 데이터에 따르면 미국 사회는 12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나에서 우리 그리고 다시 나를 중요시하는 관점의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1900년대 1차 도금 시대는 나를 중요시하는 개인주의가 극대화된 시기였으며, 1960년대 우리를 중요시하는 공동체주의로 이동하였다가 현제는 다시 개인이 중요시되는 사회로 변화해왔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통찰은 대단히 흥미롭다.

경제, 정치, 사회, 문화에서 그가 제시한 그래프는 모두 동일한 패턴을 보여준다.
1960년을 기준으로 모두 U자형 그래프를 보이며 나 - 우리 - 나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개인주의냐 공동체주의냐에 대한 우열을 가리는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이 책은 호불호가 갈리는 책이 될 것이다.
그가 제시한 데이터대로라면 개인주의보다는 공동체주의가 더 좋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의 시대에는 경제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되었고, 정치적으로는 분열되었으며, 문화와 사회적으로 균열이 심한 사회이다.
1차 도금 시대가 그랬고 2차 도금 시대인 지금이 그렇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1960년대를 황금시대로 그리워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그가 제시한 시대 구분을 잘못 이해한다면 이 책은 또 다른 분열만 추구하는 책이 돼버리고 만다.

P.39
이 책은 우리가 교훈을 얻어내야 하는 역사적 시대의 시작점이 1960년대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1960년대를 출발점으로 잡았기 때문에 많은 평론가들이 노스탤지어의 길로 걸어갔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낙원에 대해 탄식하면서 그 낙원을 어떻게 하면 되살릴 수 있겠냐며 따져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게 되었다.

120년 봐야 하는 이유는 최고점을 그리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왜 후퇴했는지를 알기 위해서이다.
1960년대 이전에 이미 공동체주의는 붕괴를 시작하고 있었다.
경제, 정치, 사회, 문화 4 분야의 분석에 더하여 인종문제와 젠더 문제에 대한 분석을 추가한 것은 바로 공동체주의가 붕괴되는 원인을 분석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P.642
지지하다시피 미국 사회를 지탱해온 두 기둥은 개인주의(자유)와 공동체주의(평등)였다.
라틴어식으로 표현한다면 에 플루리부스 우눔 E Pluribus Unum(다수에서 하나를)이었다.
이것은 자유를 중시하는 민주사회에서는 어디에서나 적용되는 진리이다.
시민 개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지만 국가라는 커다란 집을 위해서는 일치된 공동체주의를 실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1960년대를 정점으로 공동체주의가 무너진 것은 지나친 개인에 대한 억압과 소외에서 찾을 수 있다.
자유는 연대를 필요로 하고 연대는 자유를 양식으로 한다.
전체가 개인으로 이루어짐을 개인은 전체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개인주의든 공동체주의든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저자는 말하고 싶은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 업스윙을 위해 주변을 돌아볼 때가 되었다고 말이다.


※ 페이퍼로드 출판사로부터 서적을 제공받아 정직하게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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