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는 종종 만나서 차도 마시고 밥도 먹었지만 김희자 박사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찾아봤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메일을 보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그녀에 대한 정보를찾아보면서 느꼈던 복잡미묘한 감정에 대해서도 당연히 이야기하지않았다. 할머니는 내게 희자의 독일 유학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하지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여섯이 되던 해에 그녀가 독일로 떠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고,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김희자박사가 메일에 답을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봤다. 어쩌면 - P307
시간이, 무엇보다 힘이 센 시간이 할머니와의 기억을 빛바래게 했는지도 몰랐다.할머니는 겨울이 되어서도 계속 일을 다녔다. 김치 공장에 가서 절인 배추에 소를 채워넣는 일을 하기도 하고 시에서 하는 공공 근로에나가기도 했다. 일 년 동안 할머니를 만나오면서 나는 할머니가 무엇하나 허투루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할머니는 끌차를 끌고 시장에 가서 일주일 동안 먹을 채소를 사와 반찬을 만든 뒤 남김없이 딱 그만큼만 먹었다. 물건도 잘 사지 않았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있는 계모임은 예외여서, 그날이 되면 제일 좋은 옷을 챙겨 입고 머리도 예쁘게 꾸미고서 친구들을 만났고, 몇 년 동안 모은 돈으로 다 같이 제주도를 다녀오기도 했다. - P308
이야기하는 할머니, 소리 내어 웃는 할머니, 화투 치는 할머니, 높에 가려고 봉고차에 올라타는 할머니, 정자에 앉아서 친구들의 말에귀기울이는 할머니, 끌차를 끌고 언덕을 오르는 할머니, 가끔 돋보기를 꺼내서 무언가를 읽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의 모습 중에서도언제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식탁 의자에 앉아서 한 손을 컵에 댄채 그 자리를 떠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가끔 할머니는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잊은 듯했다. 때로는몇 초에서 길게는 일이 분 정도 할머니는 자신이 앉아 있는 장소를 떠나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할머니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다시 돌아와서 컵에 담긴 음료를 마시고 자신이 머물고 있는 장소를감각할 수 있기를, 그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할머니는 마치 잠수했다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프리 다이버처럼 유유히 다시 이곳으로 돌아 - P308
작은방 구석에 이불을 개켜놓는 자리가 있었다. 언니는 그 위에 올라가서 두 손을 맞잡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다. 골목을 달리면서도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서 이웃들에게 야단맞기도 했다. 그 모든 일이나에게는 생생했다. 사람들은 네다섯 살의 기억이 그토록 구체적일수는 없다고 이야기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지우는 힘이 그렇게 강하다면 마음 깊은 곳의 나는 그 강한 힘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는지도모른다. 나는 절박하게 기억했다."지연이 네가 정연이를 많이 좋아했었지. 정연이를 자랑스러워했어. 사람들은 네가 너무 어려서 뭘 모를 거라고 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나는 내가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 말을 오래 기다려 왔다고생각했다."정연이는 미선이를 많이 닮았었잖아. 생긴 거며 말하는 거며 밥먹는 모습이며."정말 그랬다. 언니는 판에 박은 듯이 엄마를 닮았었다. 웃을 때면반달 모양이 되는 눈이 그랬고 좁은 이마가 그랬다. 그런 언니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 P317
반스 소설 다운 결말이라고 해야할까. 독자가 기대한 이야기를 벗어낫다며 비아냥 거리는 줄리언 반스의 표정이 아른거린다. 물론, 나는 반스를 알지도 그럴다고 일면식도 없지만.. 왠지 그런 모습으로 소설을 끝마친 독자 앞에서 있을 것만 같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는 팽팽한 긴장의 끈을 툭 끊어버러 맥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면, 이번 단하나의 이야기는 그럼에도 무겁게 나를 짓누는 것만 같다. 그렇다고 그 이야기를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또 완전히 그 이야기구나 하고 답도 못할 이야기. 그럼에도 나는 반스의 이런 글이 좋다.
그에게는 그녀가 과거에 어땠는지 돌아보고, 그녀를 탈환할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의무도 있었다. 돌아보고…… 자신을 탈환하는? 무엇으로부터? 그 이후 그의 삶의 난파‘로부터? 아니, 그것은 멍청할 정도로 신파적이었다. 그의 삶은 난파한 적이 없었다. 그의심장, 그래, 그의 심장은 불로 지져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살 방도를 찾아냈으며, 그 삶을 계속했고, 그것이 그를 여기로데려왔다. 여기에서, 그는 그 자신을 한때 그랬던 모습으로 볼의무가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젊었을 때는 미래에 아무런 의무가 없는데, 나이가 들면 과거에 의무가 생긴다. 하필이면 자신이 바꿀수도 없는 것에.
그가 이해하게 된 또 한 가지. 그는, 현대 세계에는, 시간과장소는 이제 사랑 이야기와 관련이 없다고 상상하고 있었다.그러나 돌이켜보니,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에서 그가 미처 깨닫지 못했을 만큼 큰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오래되고, 지금도 계속되고, 도저히 뿌리 뽑을 수 없는 망상에 굴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연인들은 시간의 밖에있다는 망상.
조롱거리곤 했지만, 그러면 시간이 갔다. 아, 그 표현, 갑자기 수전이 조운에 관해 말하던 기억이 났다. "우리 모두 그저 안전한장소를 찾고 있을 뿐이야. 만일 그런 곳을 찾지 못하면, 그때는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배워야만 해." 그 시절에는 그 말이 절망의 권고처럼 들렸다. 그러나 이제는 정상적이고, 감정적으로 실용걱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 심지어 생각조차 하지않을 것이었다. 안 그런가? 사물이란, 한번 사라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이제 그는 그것을 알았다. 한번 날린 주먹은 거두어들일 수 없다. 한번 뱉은 말은 도로 삼킬 수 없다. 아무것도 잃지않은 듯, 아무 짓도 하지 않은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듯, 계속살아갈 수는 있다. 그걸 다 잊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우리의 가장 깊은 핵은 잊지 않는다, 그 일로 인해 우리가 영원히 바뀌어 버렸기 때문에.
멍의 기억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 중에서
아무튼 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네가 살아 있는 편이 천배는 더 좋겠지만 죽어버렸으니 어떡해, 그냥 죽은 너를 사랑할수밖에. 네가 죽었다고 해서 갑자기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될 리도 없잖아. 이미 생겨난 것인데 그 사랑이 어디로 사라지겠어. 어릴 때 난로 위의 주전자를 한나절씩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는 말을 너한테 했 던가? 기운차게 치솟던 하얀 김이 점점 흩어져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서운했어. 어디로 간 걸까. 그것들이 눈에 보이지않을 뿐 여전히 공기 중에 다른 형태로 떠 있다는 사실을 자연시간에 배우고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지. 죽음이란 삶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바뀐 것일 뿐 사라진 건 아니야. 죽은 너를 사랑하는일이 조금 외롭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런 건 두렵지 않아. 두려운 건를 잊는 일이야. 너를 잊게 되면 사랑을 잃는 거니까.
여행지를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내가 읽었던 것은 그러니까 어쩌면 그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서른 다섯 소년 p16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해인은 비행기 창가 자리에 앉아 어린 소년처럼 유리창에 이마를 바짝 붙이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창밖 풍경은 그의 마음을 가지고 곧잘 장난을 쳤다.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 이륙하면서 몸이 붕 뜰때면 마음이 잘게 분해되는 것처럼 아렸다. 자신이 떠나온 장소들이 어느덧 장난감 마을처럼 작게 보이면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들, 고민하던 일들이 너무 바보 같고 하찮게 느껴져 마음이 허전하고 시큰거렸다. 하얀 뭉개구름 사이를 둥실둥실 뚫고 지날 때면 어린 아기의 낮잠과 같은 평화속에 마음은 다시 보들보들해졌다.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도 있었지만 눈부신 오렌지 빛이 나타나면 천공의 밤이 시작되었다는 신호였다. 해인은 뭉클한 감상이 더 밀려오기 전에 비행기 창문 가리개를 내리고 갈색 안경테 뒤의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천장 비상등이 일제히 꺼진 비행기 안은 이제 아늑한 어둠과 고요에 휩싸였다. 건조한 공기로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와 얇은 모직 담요로 몸을 빈틈없이 덮으려고 뒤척이는 소리만 들렸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하나둘씩 잠을 청했다. 맨 앞줄 중간 자리에서 칭얼대던 갓난아기도 아직 한참 남은 비행시간을 눈치채고 체념했는지 이내 잠이 들었다. 해인은 어두컴컴해진 비행기 안에서 개인 조명 버튼을 누르고 좌석 주머니에서 잡지를 꺼내 펼쳤다. 그는 탈것들에 비치된 자기 주장이 겸손한 간행물들이 마음에 들었다. 놔두고 가는 것이 자연스럽고, 오로지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읽히기 위해 존재하는 잡지들. 페루의 산간 지역에서 알래스카의 어촌마을, 시카고의 스카이라인을 거쳐 불쑥 항공기 운항 정보와 기내 상영영화 줄거리, 비상시 대피요령 안내 페이지를 견뎌내야만 어딘가 도달할 수 있는 사람들 중 한명에 불과함을 실감했다.빨단 스웨터를 입은 학생 P20 인생의 패배자들은 대체로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한다던 아버지의 일침이 불현듯 뇌리를 스쳐갔다.하지만 해안의 귓가에는 종일 그 구절만이 고장 난 기계처럼불길하게 반복됐다. 그는 세상의 모든 농담이 농담으로 끝나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P 140차라리 멀리 살면서 그를 못보는 것이 덜 고통스러웠다. 물리적 거리가 그리움을 키워줄테고 기다림은 반드시 보상을 가져다 준다. 사람들은 기다리는 여자를 바보 취급하지만 그것은 인내해 본적 없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P156이 계단에 앉아있노라면 세상은 크게 변할일이 없고, 여기서 더 나빠질 것도 없고, 내일이 오면 조금더 힘을 낼수 있을것 같았다 p173잠시 책을 덮고 역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사람들의 호흡에서 설렘이 느껴졌다. 단순한 기차여행이라해도 새로운 장소로 데려다준다는 것은 우리안의 무언가를 바꾸는 모험이다 p188아직도 어머니 많이 원망하고 있니?˝한때는 그랬지 . 하지만 이젠 아냐. 스무살이 넘어서 독립하고나면 그 다음부터는 부모 탓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그때부터는 각자의 삶을 알아서 잘 살아가면 되는 거잖아. 내가 지금 행복하지 못한걸 부모 탓으로만 돌리면서 합리화한다면 그건 어리광에 지나지 않아. 설령 우리가 한때 부모님에게 무시못할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말이야. 억울하잖아. 앞으로의 내 인생이, 내 젊음이 평생 그 그늘에서 못 벗어나서 시들어 가는거. P193인기척 없는 한겨울의 교실 풍경은 호젓하다 못해 냉기로 가득했지만 해인은 한때 저 자리에 앉아 있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 한켠이 뜨거워졌다. 그 시절은 결코 다시 돌아올수 없지만 형체없는 기억으로 몸 안에 차곡차곡 각인되어있었다. P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