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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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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유, 위안, 위로 

인간은 문학을 통해 '치유(治癒)' 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치유라는 단어는 불필요하게 거대해 보인다. 활자 나부랭이가 어떻게 인간을 치유한단 말인가? 그래서 '위안(慰安)'으로 바꿔 생각해봤지만, 이번에는 문학의 가치가 다소 폄하된다는 느낌 때문에 망설이게 된다. 노벨문학상이라는 무지막지한 아우라를 지닌 작가에게 다소 실례일 수도 있겠고, 그러니 '위로(慰勞)' 정도로 해두자. '위(慰)'는 '위로하다', '우울하다'. '울적해지다' 등의 뜻이 있다. '위로하다'는 동어반복이니까 그만두고, '우울해지다', '울적해지다' 정도가 '위'의 적당한 어의일 것이다. '로(勞)'는 '일하다', '노력하다', '힘쓰다', '근심하다' 등의 뜻이 있다. 우울하고, 울적한 것들이 힘쓰고, 근심하는 것들과 합쳐질 때 '위로'가 되는 것이다.  

 

2. 우리는 모두 이런 곳에 이러고 있잖아 

사소설의 독법을 강요하는 서술자 덕분에, 시작부터 겐자부로의 특이한 인생역정을 기억해낼 수밖에 없었다. 김지하, 핵문제, 히카리 등이 소설의 문맥 속에 요철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 만났던 겐자부로의 문장들이 내게 안부를 전했다. "뭐야, 자네는 이런 곳에 있었나?" 칠십이 넘은 나이에 중년의 지체장애자 아들과 '빨간 지팡이'를 들고 '걷기 훈련'을 하는 늙은이가 내게 물어온 것이다.(그러게요, 난 아직도 학교라는 곳에서 당신의 소설을 읽고 있네요) 소설 속의 인물들은 각각 자신들의 '곤경'에 직면해 있었다. 대로변에서 간질 발작을 일으킨 아들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소설가, 30년 전 '사건'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여배우, 소년으로 분장했지만 사실은 노인이라는 것을 들킨 영화기획자, 이들 모두는 각자 살아가는 공간 속에서 곤경에 쳐해 있으며, 플롯의 운명에 의해, 혹은 삶의 장난 같은 우연에 의해 재회하도록 되어 있었다. 과거에 해결되지 않았던, 그래서 기억 속에 각인된 사건들이 현재의 어느 순간 재해석되기를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 그 강요에 응할 것인가는 각자의 판단이겠지만, 어쨌든 해결되지 않았던 사건의 기억을 다시 불러오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며, 어쩌면 현재의 '나'라는 정체성 전체를 위기에 빠뜨릴 수도 있는 행위이다. 그래서 '우리는 왜 이런 곳에 이러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의미를 획득한다. 우리에게는 해결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3. 거짓으로 위안 받기, 진실에 직면하기 

소설의 몸통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하나의 기획 속에 얽혀 있다. '애너벨 리' 영화에 대한 기억과 '메이스케 어머니 출진'이라는 연극 이야기가 '미하엘 콜하스 영화'의 기획 속에 수렴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모티프는 각각 여배우, 소설가, 영화기획자의 삶과 관련되어 있으며, 유사한 의미 층위를 구성한다. '애너벨 리' 영화에 두 가지 버전이 있고, '메이스케 봉기' 사건에 전해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는 것은 우리의 기억이 가지고 있는 왜곡을 잘 보여준다. '미하엘 콜하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고모리(영화기획자)의 기획 속에는 여배우와 소설가가 모르는 복잡한 자본의 논리가 은폐되어 있는 것이다. 각자의 삶 속에는, 혹은 인류의 역사 속에는, 은폐하고 싶은, 그러나 반복해서 꾸는 악몽처럼, 끈질기게 재해석되기를 강요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점령군의 성적 학대일 수도 있으며, 귀족 계급의 폭력일 수도 있고, 존경하는 스승의 죽음일 수도 있으며, 훼손된 명예에 대한 보상심리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지체장애자로 살아가야하는 운명, 지체장애자 아들과 유명 소설가를 거두며 살아가야하는 여인의 운명, 군부정권에 대한 비판을 담은 작품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은 시인의 운명, 이 모든 것들이 재해석되기를 강요하고 있다. 이 모든 복잡하고, 우울하고, 괴로운 진실과 대면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하는 일종의 투쟁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그리고 우리는, 쉬운 위안을 찾는다. 그것이 거짓이라도,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선택하는 누군가를 우리는 쉽게 비난할 수 없다. 

 

4. 그래봐야 문학, 그래도 문학! 

마지막으로 소설이라는 양식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오에 겐자부로는 한동안 소설을 쓰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에서 전제한 것처럼 나는 사소설의 독법으로 이 소설을 읽기 때문에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면 쓰겠다"는 1인칭 화자의 언설을 나는 겐자부로의 생각으로 이해한다. 70살이 넘은 노인, 게다가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작가가 줄 법한 삶의 교훈을 기대한 나는, 내가 너무 순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게다가 50년 가까이 소설을 써온 노련한 작가였으니까. 사소설의 의장을 갖추고 있지만 허구일 것이 분명한 이야기들을 아슬아슬하게 조직하고 잇는 작가는 '새로운 형식'이 자기의 소설을 성취시킬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리고 평생 소설을 써온 작가에게 소설은 자신의 삶과 동일하거나, 자신의 삶을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무언가일 것이다. 따라서 문학을 문학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자기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과 겹쳐진다. 이런 질문은 사실 요령부득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많은 소설을 써도 결코 소설이 무엇인지, 문학이 무엇인지 정의내릴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인생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 따위가 과연 무엇인들 제대로 알 수 있겟는가? 그래서 문학은, 그래봤자 문학일 뿐이며, 인간이라는 것도 그래봤자 인간 따위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래도 문학'은, 그리고 '인간'은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그들도 역시 인간이니까, 그리고 이 '반(半)사소설'도 결국 문학이니까. 발작에서 깨어나 자신을 내려다보는 참담한 표정의 늙은이에게 건내는 히카리의 '안녕!'이라는 인사, 칠십 노인이 꾸려낸 단어 하나하나의 '노력', 이런 것들의 작은 '위로'에서 '삶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하는 요령부득의 질문과 대면할 수 있는 작은 용기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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