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이 아닌 모든 것
이장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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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설은 어쩔 도리 없이 그것을 쓴 소설가의 것이겠지만, 값을 지불하고 책을 산 뒤 거추장스러운 띠지를 버리고 손가락을 움직여 첫 페이지를 펴는 순간 독자는 어쩔 도리 없이 자기 마음대로 소설을 사용하게 된다. 이것을 두고 소설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주인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하더라도 무언가 변하기는 변한다. 그 변화는 값을 지불하는 순간 일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걸리적거리는 띠지를 떼어내는 순간일까. 첫 페이지를 펴는 순간일까. 결정적인 단어/문장/장면을 만나는 순간일까.

 

어떤 소설은 냉정하게, 어떤 소설은 실소를 흘리며, 어떤 소설은 착찹하게, 어떤 소설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어떤 소설은 허우적대며 읽게 되는데 이장욱의 소설은 허우적거리며 읽는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이장욱의 소설을 읽으며 허우적대는 것은 이장욱의 소설이 애매모호하기 때문인 것일까, 내가 허약체질이라서 그런 것일까. 나는 어쩌다 허약체질이 되어 버렸을까. 강인한 인간이 되고 싶었는데,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서, 잘못된 도미노를 넘어뜨려서, 그런 것들을 들춰내는 것도 이제는 좀 지겹기도 하고, 또 그런 것들을 곱씹는 것은 절반 이상의 나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내 그만두고 만다.

 

그러니까 이장욱 소설의 용도가 결정된 것은 절반 이상의 하루오를 다 읽고 난 다음이다. 지금 나는 이 글을 절반 이상의 하루오를 생각하며 쓰고 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하루오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지금 절반 이상씩은 자신이 아닌 것 아닌가, 하고 망연자실해지는 것이다. 하루오는 세상 어디에나 있지만 이 세계에는 없는 존재인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모두가 이 세계에서 조금씩 없는 존재들 아닌가. 그림에서 기어나온 아르놀피니도 그렇고, 입양아 알이나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문장들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걸어나올 정귀보의 평전도, 절간 앞에서 읽은 칠레의 세계도, 욕실생활자와 하마도, 소설 속에서 잠이 든 소설가도. 나를 규정하는 것들이 모두 허물어지는 순간에도 아무렇지 않게 눈을 뜨고 아무렇게나 아무데서나 살아간다. 이렇게 내 마음대로 소설을 사용하고 나면 이장욱은 내 마음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이미지를 갖게 된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 새겨진 이장욱의 이미지는 절반 이상의 이장욱이라고는 할 수 없기에 그 절반 만큼만 받아들이면 충분하다. 아마도 그 정도면 충분했던 것 아닐까.

  

모두가 절반 이상이 아닌 세상에서 전체를 말하라 한다면 벙어리가 되는 수밖에 없다. 이장욱은 벙어리가 되지 않고 절반에 대해 말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절반 이상을 말하지 않으려면 냉정함이 필요하다. 절반을 말하려면 낯선 것을 거두고 구차한 것을 견뎌야 한다. 이 교훈은 나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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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4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5 2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21 2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런 생각은 초등학교 때 하는 것인데(반공교육에서 배운다), 국가가 먹고 살 방법을 다 살펴주면 국민들은 안심하고 자신의 재능과 특기를 잘 발휘할 수 있을까. 개인의 일이 전혀 영리추구와는 거리가 멀다면, 영역을 좁혀서 문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영리추구라는 목적을 박탈하면(해방시켜주면) 그의 생산력에 어떤 변화가 생길까. 범위를 좁혀서 여기 소설가 한 명이 있다고 하자. 소설가 시험을 쳐서 합격하면 2급 소설가 자격증이 주어진다. 그러나 소설가가 되었다고 해서 자신이 쓴 소설로 인세를 받거나 계약금을 받지는 못한다. 그 대신 국가에서 일정 금액의 보조금이 나온다.

 

그는 어떤 소설을 쓰게 될까? 나는 결국 이 소설가가 국가에서 쓰라는 이야기를 마지못해 쓰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충효'나 '아지/프로'가 이 소설가의 주요 테마가 될 것이다. 이런 지독한 후진국가가 아닌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소설가는 돈이 되는 소설을 쓸 것이다. 무엇이 돈이 되는 소설인지, 혹은 나중에 돈으로 환산할 때 환율이 높은 소설인지 예민하게 살피고 진지하게 고민할 것이다. 물론 소설을 쓰는 동안 그런 걸 의식하는 소설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똑같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니 돈을 위해 글을 쓰는 사람들을 비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돈을 위해 쓰는 소설가는 우리의 욕망을 읽고 그 이야기를 쓰고 그것의 실패를 기록할 것이다. 돈이 있는 곳에 우리의 욕망이 있다.

 

어떤 사명감으로, 혹은 어떤 고상한 가치를 추구하면서 소설을 쓰는 작가가 있다면 정말 최악일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한국문학의 대표라 생각해서, 자신이 무너지면 끝장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주체가 있다면 오 그것은 정말 말리고 싶다(겉으론 그렇게 말해도 속으로는 내가 왜 이래야 하지, 라고 생각할 것이라 믿는다).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이미 끝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은 똑같이 더 이상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 수 없는 경제적 형편에 놓여 있다. 그들의 문학은 재미도 감동도 없기 때문에 교훈도 없을 것이다. 그냥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미 돈을 가졌는데 더 이상 무슨 재밌는 이야기를 쓰고 싶겠는가. 그러니 돈이 필요 없는 자들이 하는 말을 믿지 말자. 다들 그냥 하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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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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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에서 자라 도시 사람이 된 소설가가 무슨 '생각'을 하며 늙어가는지 알지 못한다. 늙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에는 아직 충분히 팽창하거나 늙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 여전히 나는 더 가지기를 원하며 늙거나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이 글은 오독이거나 아예 읽지 않은 자의 '생각'일 수밖에 없겠다. '죽음'에 대해서는 때가 되면 생각하도록 하고, 그럼 나머지 반에 대해 생각해볼까.

 

숲 속에서 자라 도시 사람이 된 자는 고향이 없다. 도시에서 바라보는 숲은 의심스럽고, 숲 속에서 바라보는 도시는 공포스럽다. 숲은 시간에 의해 왜곡되어 있어 믿을 수도,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다. 믿지 않을 때 '나'라는 존재의 역사는 분해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도시에서 바라보는 숲은 항상 의심스러운, 딱 그 정도의 시공간이다. 도시는 가득 차 있다. 온갖 관계들과 힘과 소리와 색과 카페와 자동차들로 가득 차 있다. 숲 속에서 바라보면 도시는 거대한 아가리 같다. 아가리 속에 들어가면 똥이 된다고 생각한다. 필연적으로 똥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숲 속에서 자라 도시 사람이 된 자는 숲과 도시의 경계 쯤에 이정표를 세우고 싶어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의심스러운 곳으로 향하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힘을 내자, 나는 지금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똥이 될 것이다, 똥이 아닌 척 하자, 이정표를 보며 한숨을 쉰다.

 

이렇게 분리된 시공간을 바라보며 방황하다보면 숲과 도시의 경계에 눌러 앉아 거간꾼 노릇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내가 가지기에는 썩 내키지 않고 남 주기는 아까운 그런 것을 이쪽저쪽으로 교환해주는 것이다. 오에의 소설이 그렇게 되고 만 것은 아닐까, 라는 것은 아니고 오에의 소설을 읽고 있는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거다. 여전히 나는 오에의 소설을 좋아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에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어느 지점부터 서사가 예상되기 시작하고, 설마 하는 불길한 예감이 하나하나 맞아들어가다 결정적인 파국이 맥빠지게 제시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면서 냉정해진다. 똥이 된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워진 것이다. 

 

이 의심스러움, 오에의 말로 하면 '애매함'은 어떤 성취일 수 있을까. 숲과 도시, 근대와 전근대, 일본과 세계, 여성과 남성, 장애인과 정상인, 식민지와 제국의 경계에 표식을 세우는 행위는 관계 자체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주체나 존재를 재구성할 수 있는 방법이 못 되며, 현상 자체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소설에서 답을 찾으면 환멸만이 남는다. 소설에서 문제를 찾으면 생각이 많아진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환멸 쪽인 것 같다. 멋지게 해결하길 바랬는데, 그런 건 역시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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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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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위 포식자는 게으르다. 게으르나 사냥할 때는 뛰어난 집중력을 발휘한다. 김영하는 이를테면 한국소설판의 최상위 포식자다. 그러므로 게을러야 하며, 소설을 쓸 때는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김영하는 게으른 것 같지도 않고 이 소설을 뛰어난 집중력으로 사냥한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앞선 유비추리는 잘못 설계된 것임이 틀림없다. 한국소설판은 먹이사슬로 계층화된 초원이 아니며, 소설 쓰는 것 또한 이야기감을 사냥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아니면 김영하가 이미 퇴물이라서 그런 것인지. 그런데도 나는 왜 자꾸 김영하를 생각하면 초원에서 멍때리는 사자가 연상되는 걸까. 이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는 소설을 읽다보면.

 

늙은 사자가 사냥감을 응시한다. 사냥감을 응시하는 사자를 초원의 각종 먹이들이 바라본다. 늙은 사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각종 먹이들의 시선을 의식없이 의식한다. 의식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차라리 감각한다고 해도 좋겠다. 사냥을 시작했지만 사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사냥감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사냥의 시작이라는 것을 사자도 알고 먹이들도 안다. 천천히 발걸음을 뗀다. 먹이들은 긴장한다. 먹이들이 긴장하는 순간 이미 사냥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자는 천천히 초원을 산책한다. 먹이들의 이름과 성별과 취향을 잠시 생각한다. 저 먹이들의 뼈와 살을 발라내던 지난 시간을 조금 더 생각한다. 잠시 생각하다보면 초원의 끝에 닿는다. 이제 그만 해도 될 것 같다. 먹이들은 등 뒤에 있고 돌아본다는 것은 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시간이 다 되었고 사냥은 이만하면 성공적이었다. 

 

반복하다가 죽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이라니!). 반복은 완성을 욕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복은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반복은 기억이면서 망각. 인생은 최초의 기억을 상실해가는 것. 그러므로 기억하기 위해 반복하는 것. 반복하는 동안 상실하는 것. 이게 바로 인생이다! 뭐 어쩔래!! 소멸하는 방향에 놓인 이 소설은 그래서 늙은 사자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으며, 지금 한국에서는 어쩌면 정말로 진짜 리얼리 (김영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온리 김영하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인지도 모르겠다. 뭔가 자꾸 이유는 알 수 없는데, 막 자꾸, 내가 이 글을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이,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 것을 망설이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라기보다, 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이나 소설가에게 진 것이 아니라 반복-완성-상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수긍 때문에 진 것 같다. 그게 그건가? 어쨌든 사람을 죽이진 않았지만, 나도 무언가를 꽤 많이 반복했고, 반복하며 소멸하는 것을 적잖이 목격했다. 그리고 인생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점차 수긍하게 되었다.

 

이제 컴퓨터를 끄고 잠을 잘 것이다. 눈 뜨기 전까지 꿀잠 자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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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린디합을
손보미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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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는 예전에 읽었다. 다 읽었을 때 레이먼드 카버가 곧장 떠올랐고, 본인도 순순히 자백했으니 이제 그만 말해도 될 것 같다. 그게 뭐 대수랴. 어쨌든 이 정도 썼으면 레이먼드 카버는 정말 열심히 봤다는 뜻이니. 그러나 레이먼드 카버를 정말 열심히 읽은 것이 뭐 대단한 일인가. 결국 소설 쓰는 원천 기술을 허락없이 훔친 것인데. 그러나 원천 기술을 허락없이 훔친 것 또한 얼마나 사소한 일인가. 삼성은 애플을 훔치고, 애플은 또 머시기 다른 회사 걸 훔치는 판인데. 그러나 정말 훔친 것인가. 정말 그것은 원천 기술인가. 소설은 태생적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알게 모르게 훔친 이야기들로, 훔친 형식으로 덕지덕지 이어붙여 만들어진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인데. 괴물의 기워진 살점을 하나씩 떼어내 이건 누구의 것이고 저건 누구의 것이라고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건 그냥 살점일 뿐이다. 단지 살점과 살점 사이의 균열이 제대로 봉합되지 못해 보기 흉하니 자꾸 손가락질 하는 것이지.

 

그런데, 간혹 그 이어붙임이 눈길을 끌 때가 있다. 손보미의 경우가 그런데. 분명히 레이먼드 카버가 모종의 분위기를 만들 때 활용하는 기법들이 손보미의 작품 속에 확인된다. 제한된 공간, 엇나가는 대화, 단편적으로 삽입되는 과거의 경험들, 갑자기 퓨즈가 나가듯 상황을 낯설게 만드는 사건 등등. 이런 컨벤션이 있다. 이런 컨벤션으로 시종일관하는 작품도 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여러 장면을 어떠한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연속적으로 배열하는 기술을 아주 노련하게 구사하기도 한다. 이어붙임이 매끄럽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음, 작가가 열심히 공부도 하고 연습도 했겠지만, 기본적으로 기술이 좋은 것 같다. 점점 기술 좋은 작가들이 좋아지는 것 같다. 그러니까 더 이상 메시지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나도 배울만큼 배웠고, 나이도 먹을만큼 먹어서, 결국 꼰대가 되어서 언뜻보고도 얘가 이런 낡아빠진 소리를 아직도 하고 있구나, 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니 아직은 꼰대가 아닌 것도 같다.

 

그러니까 기술이 필요한 것은 자명하다. 모든 것이 합리화될 수 있으니 어떤 메시지도 새롭지 않다. 그러나 혹시 오로지 기술만이 메시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소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기술은 그냥 기술이다. 메시지는 이제 없어도 그만이다. 그런 것은 나중에 비평가들이 할 말 없을 때 그냥 덧붙이는 것이고. 아, 이거 좀 막다른 골목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막 나머지 열 두 명을 찾아야 하나 싶기도 하고, 거울 속에 나랑 악수라도 하려고 하니, 아 거울 속에 나는 오른손잡이고, 망했다. 한국소설 끝장난 것 같다. 어쨌든 기술은 그냥 기술이다. 그러니 끝장나진 않을 것이다. 좋은 기술은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을 터이니, 손보미는 그럭저럭 잘 살아남을 것이고, 나는 또 기술 좋은 작가를 만나면 좋다고 떠벌리고 다니겠지. 그냥 식고 자야겠다. 

 

아, 그리고 누구든간에 작가의 말 컨셉 좀 그만 잡았으면 좋겠다. 흰 종이에 검은 글자가 있으니, 궁금해서 읽기는 한다만 소설의 여운에 찬물을 끼얹는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자기 소설에 자신이 없다면 닥치고 있어야 하고, 자기 소설에 자신이 있다면 더욱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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