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7
김원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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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뭐라도 하나 쓰는 게 좋겠다. 1978년 11월 10일 문학과지성사에서 발행된 이 책은 교학사 공무국에서 인쇄되었다. 김원일과 빨갱이와 문학과지성사와 교학사 공무국, 그리고 40년의 시간. 이 소설을 읽는 것은 40년의 세월을 읽는 것이구나. 40년 정도 지나고 나면 소설은... 40년 정도 지나고 나면 소설가는... 40년 정도 지나고 나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소설은 초판본 그대로 내 손에 쥐어져 있고 김원일은 또 아버지 이야기를 쓸 것이고, 세상은 그 이야기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 역시 내 마음대로 무언가를 쓸 것이다. 오늘은 뭐라도 하나 쓰는 게 좋을 것 같으니.

 

오래된 게임을 한다. 전화기로도 하고 컴퓨터로도 한다. 밥 먹으면서도 하고 똥 싸면서도 한다. 오래된 게임을 하면 오래된 기억들이 떠오르고 오래된 기억들은 변하지 않는 오래된 습관들을 재생시킨다. 그 기억과 습관들이 무언가를 다시 불러세우는데, 그 무엇이 무엇인고 따져보니, 예감이다. 반복되었던 것이 다시 반복될 것이라는 예감.

 

수고스러움이 다시 수고스러움을 불러세울 것이다. 수치스러움은 수치스러움을, 경멸은 경멸을, 헛된 희망은 다시 헛되 희망을, 피는 다시 피를, 노을은 다시 노을을 불러세울 뿐이다. 피가 노을을 불러세우는 것이 아니다.

 

할아버지는 빨갱이들에게 고무신을 빌려주었다가 경찰에게 처형당했다. 어머니는 언젠가 시아버지에 대한 꿈 하나를 일러주었는데, 눈물이 그렁그렁한 중소 한 마리가 끈에 묶인 채 수렁에 빠져 버둥거리는 꿈이었다. 어머니의 꿈 어디에도 시아버지를 연상시키는 내용은 없는데, 심지어 어머니는 시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그 소가 시아버지라 했다. 어머니는 그런 꿈을 자주 꿨고 얼마 전에는 내 꿈도 꿨다 했다. 불행한 내용이라 옮기고 싶지 않다.

 

할아버지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경찰이 고향 어디 구덩이에 던져 두었다고 했다. 무서워서 아무도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고 했다. 1948년도의 일이다. 김삼조만 당한 일도 아니고 할아버지만 당한 일도 아니다. 1848년에는 흔한 일이다. 나는 분명 신나서 이야기하는데, 이 이야기를 하고 나면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그때서야 내가 병신이구나, 깨닫는다. 그래서 이제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매품 책 하나를 노을과 함께 읽는다. 이 책 역시 오래된 이야기를 다룬다. 70년대 유신, 긴조와 문학운동. 수많은 선언문과 연명부와 강령과 고문과 조작과 민중과 민족과 국가. 이 책에 김원일은 없다. 있지만 없다. 김원일 아들의 이름이 있다. 자기 이름을 연명부에 기록할 수 없는 사람들은 아들의 이름을 올린다.

 

죽음, 한 명 한 명의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던 김지하를 생각한다. 70년대 이미 굿판은 마련되어 있었다. 유신 긴조가 판이었고 예술의 민중화가 굿이었다. 그 굿판에서 죽음마저 예술화되었던 순간이 존재했고, 김지하도 그 굿판에서 살푸리 하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 굿판에서 살푸리하던 사람들은 어영부영 살아남았고,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죽었다. 과오가 있는 사람들, 연줄이 닿지 않는 사람들, 죽어도 소란스럽지 않을 사람들이 죽었다. 글로만 보면 그렇게 보인다.

 

가는 데는 순서가 없고, 살아 있음에 이유는 없다. 그리고 누가 죽어야만 우리가 실은 우리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원래 우리라는 것은 없구나, 없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진짜로 없구나, 우리가 나와 너를 수치스럽게 하구나, 깨닫는다. 그래서 어쩌면 나와 너는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의 환상 같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수의 무덤 위에 교회가 세워지듯이.

 

아, 원래 이런 거 쓰려던 건 아닌데. 그러니까 나는 왜 이렇게 보수적일까,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었다. 오래된 게임을 하고, 김삼조가 불쌍해, 판 까는 놈이 있고, 그 판에서 먹히는 놈은 따로 있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오버워치 따위는 하지 않는다.

 

김삼조가 불쌍한가. 김삼조가 이데올로그가 아니라서 불쌍한가. 김삼조는 이데올로그가 아닌데 죽어서 불쌍한가. 김삼조가 이데올로그였다면 김삼조는 한국문학사에서 문제적 개인으로 남았을 것이고 그의 죽음은 순교가 된다. 깨닫지 못하고 죽으면 그 죽음은 허망한 것이 되고 남는 것은 이념의 허망함뿐이다. 전망은 삭제되고 '우리'를 불러세울 수도 없다. 그런 김삼조를 왜 만들어냈나? 그런 김삼조를 두고 다시 조민세를 만든 건 무엇 때문인가? 이데올로그로 만들면 무언가 달라지나? 없던 전망이 생기고 '우리들'이 조민세의 뒤를 따라 대오를 이룰 것이라 생각했나?

 

아닐 것이다. 수많은 죽음이 있고, 각각의 죽음은 그 죽은 자가 우리들이라 생각했던 각각의 사람들에게 우리에 대해 깨닫게 할 뿐이다. 정말 우리'들'이었구나.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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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법칙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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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책을 다 읽었다. 그리고 지금 좀, 아니 몹시 당황하고 있는 중이다. 이건 편혜영의 소설이 분명한데, 왜 이렇게 이질적이지? 파국을 향해 치닫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 그 파국에 대한 간단한 진단과 그것이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건조한 문체 모두 편혜영의 것이 분명한데, 뭔가 이질적이다. 윤세오를 구제하고, 수퍼마켓 대안 공동체를 조성하고, 신기정과 엄마가 화해하고 뭐 이런 것도 이질적이지만 그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이 소설은 뭔가 이질적이다. 수다스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소심해졌다고 해야 하나. 예전 같으면 검객이 대나무 잘라내듯 팍팍 치고 나갔을 부분에서 미적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많은 것을 설명하는 것이 나쁜 건 아닌데, 편혜영이 이러니 좀 당황스럽다. 지금 느낌은 확실히 당황스러움이다. 그러니까 인물의 내면이 너무 복잡하고, 그러다보니 모호해지고, 결국은 모두 비슷해져버렸다. 한 번 더, 그러니까 인물들이 진짜 인간처럼 보이게 되었다는 거다. 예전 편혜영 소설의 인물은 인간은 인간이되 종이로 만든 인간이었다. 평면적이라는 의미는 아니고 뭔가 회화적인 느낌을 주는, 단면을 잘라낸 인간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잘라낸 인간이 얼마나 낯설고 강렬했었는지 기억한다. 그런데 지금 이 소설은 도대체 뭔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진짜 인간을 재현하는 것이 소설인가? 아 물론 그런 소설도 있겠지만 적어도 편혜영 소설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왜 이러는거지? 지금 여기다 편혜영을 걱정하는 내용을 마구 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러다가 편혜영이 김애란 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편혜영을 걱정하다 편혜영 소설을 읽지 않게 될까봐 걱정된다. 그 외에도 걱정되는 것이 많고 짐작되는 것도 많고 합리적으로 만들 수 있는 걱정도 있는데 이게 다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누군가 설명해주면 좋겠다. 인간 편혜영이 좋은 사람인 것과는 별개로 소설가 편혜영은 계속  독한 사람으로 남아주었으면 좋겠다. 아 이거 좀 오덕 같긴 한데 지금의 솔직한 심정이다. 뭐 내가 이런다고 한 번 강을 건넌 사람이 다시 돌아올 리도 없고 괜한 소리라는 것도 아는데, 적어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쓰는 동안 강을 건넌 사람은 어쩌면 편혜영이 아니라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을 다 읽었는데 당황스러움만 남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미 강에 발을 들여 놓은 거지. 그러나 아직 건너가진 않을 거다. 돌아와요 편혜영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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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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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라는 이름은 부르기도 좋고 듣기도 좋고, 그래서 나나가 나오는 소설은 그냥 좋다. 그냥 소리만 들어도 좋은 말이 있는데 나나가 그렇다. 반면에 듣기만 해도 거북살스러운 이름이 있는데, 예를 들면 졸라 같은 경우가 그렇다. 좆나 존나 졸라 이렇게 순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름이 졸라면 좀 그렇지. 어쨌든 백년 좀 더 전에 이 거북살스러운 이름을 가졌던 프랑스 사람 에밀 졸라가 나나라는 소설을 썼다고 하는데, 나는 그 소설을 읽기 전에도 이미 그 소설을 좋아하고 있었다. 나나가 누군지도 몰랐지만 나나가 누구라 하더라도 나는 아마 나나를 좋아했을 것이다(에밀 졸라의 나나가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나나는 한자로 娜娜, 황정은의 나나도 娜娜, 나나는 원래부터 아름다운 것). 그리고 이런 생각을 나만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왠지 졸리는 이름을 가진 한국소설가 한 사람은 난아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가 썸남에게 자신을 나나라고 불러달라는 시덥잖은 에피소드가 나오는 단편을 쓴 적이 있다. 이 시덥잖은 에피소드 때문에 나는 그 소설을 좋아하게 되었다. 지금 거북살스러운 이름을 가진 고대 프랑스 소설가와 졸리는 이름을 가진 대한민국 현대 소설가 얘기를 하자는 건 아니고 황정은 소설에 대해 생각하자는 것인데, 황정은의 소설에는 나나처럼 뭔가 부르기도 좋고 듣기도 좋은 말들이 무더기로 나온다. 예를 들면 이런 건데,

 

쌍년.

하고 생각했다.

쌍년.

하고 두고두고 생각했다.

...

징그럽다는 말은 내가 들었지만 그 정도 호의를 보였다고 그렇게까지 말을 한 나나야말로 징그러운 사람, 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79-81>

 

이게 아닌가. 어쨌든 소라가 마음에 나직하게 내뱉는 쌍년 소리가 어디서 많이 듣던 말처럼 반갑다. 원래 싸움이란 이렇게 내가 더 많이 상처받았다고 생각하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쪽이 진 거다. 그러니 내가 좋아하는 나나가 이겼네! 라고 기뻐하기에는 나는 아무래도 소라쪽인 것 같고, 하여간 소라가 불쌍하고 나나는 쌍년이다. 하지만 왠지 나나에게 미안하고 소라는 역시 교활하다. 이런 말들은 별로 의미가 없고, 사실 나는 계속 황정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황정은의 말들과 황정은이 만든 공간을 계속 생각하고 있다. 이 작은 공간에서 추방된, 조금씩 껍데기가 되어 죽어가는 애자가 있는데, 애자를 생각하는 것이 가장 괴로워서 애자는 없는 셈 치고 싶지만 이 소설 속에는 계속 애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있습니다. 왠지 애자에 대해 말하자니 존댓말을 쓰고 싶어집니다. 애자가 말합니다.

 

불을 피우던 사람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고 보니 여자가 아궁이 속에 들어가 있더래. 빨간 불 속에서 여자의 표정이며 피부가 그토록 아름답더래. 아름답더래.

나는 그렇게 못해서 아름답지 못한 것이 되고 말았어.

<84-85>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엄마나 어머니라기보다는 그냥 애자인 거지요. 애자라는 이름 자체가 뭔가 굉장하고 지긋지긋하고 돌이킬 수 없다는 느낌을 줍니다. 아니, 돌이킬 수 없다기보다는 더 이상 환원하거나 추상할 수 없는, 그러니까 그냥 애자로 존재한다고 쓸 수밖에 없는 상태가 바로 애자입니다. 그래서 그냥 無이고, 검은색이고, 블랙홀이고, 전체입니다. 이 블랙홀이 황정은이 만든 작은 공간 위를 둥둥 떠다니며,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들에 의미를 두지 말라고 말합니다. 조용히 한 덩어리가 되어 다 같이 죽는 것이 이 세계의 법칙입니다. 나나는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말합니다.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으로 가득 채워진 세계에서 나나는 아이를 낳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것은 원래 마음 먹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 이제 침대에서 일어나자, 처럼 자, 이제 아이를 낳자, 라고 한 뒤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자식을 낳는 존재는, 아마 신화에서나 찾아 볼 수 있을 겁니다. '자 이제 우리의 모양을 본 떠 사람을 만들자' 중동의 유목신이 했던 말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마음을 먹어야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고,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이제 거의 신이 되었습니다. 기합을 넣은 뒤 한 번 낳아보자, 하고 단단히 각오해야 합니다. 황정은이 만든 세계도 사실상 신화의 세계입니다. 완전히 검은색이고, 블랙홀이고, 무이고, 전체인 그런 세계에서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신적인 의지 이외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지 황정은의 말을 별로 믿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또 그처럼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 아니겠습니까. 나나가 말합니다. 

 

이것은 몇번째 태몽인지 모르겠습니다. 수줍은 듯 일렁이던 달을 생각하자 묘하게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렇구나, 생각합니다. 가슴이 미어진다는 것은 이런 말이었구나. 여러개의 매듭이 묶이는 느낌. 가슴이 묶이고 마는 느낌.

<225>

 

가슴이 미어진다... 나는 지금 가슴이 미어진다는 느낌을 완전히 알 것 같습니다. 여러 개의 매듭이 심장을 묶는 느낌. 알 것 같습니다. 나는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에 대해서는 완전히 알고 있다, 그러니 나나도, 황정은도 그 느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황정은도 믿을만하다... 자식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이건 거의 물리적인 통증에 가까워서 감정이라 말하긴 어렵습니다. 이렇게 육적으로 체득되는 감각은 추상화하거나 제어하기도 어렵습니다. 얻어맞을 때의 감각과 유사한 겁니다. 이런 식으로 감각은 초월적인 지위를 갖게 됩니다. 그러니 결국 황정은의 나나는 아이에게 압도당한 겁니다. 아이로부터 감각되는 이 세계의 오랜 질서가 나나에게 각인된 것입니다. 앞에서 잠시 말했던 졸라의 나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닙니다. 뭐 자연주의 소설이 대개 그러니까, 그냥 세계를 병균과 구더기가 우글거리는 부패한 시체 같이 여겼던 시대니까, 인간의 몸이 사물처럼 해부되던 시대였으니까 그랬겠지요. 결국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기계론이든 휴머니즘이든 같은 매커니즘이니까요. 그냥 멈춘 지점이, 인물과 작가가 갈라서는 지점이 다른 것 뿐 아니겠습니까. 아직 조금 더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멈추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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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5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구의 증명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7
최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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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들고양이처럼 버려지고 어른들은 자기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자기에게 하고 싶은 말을 충고나 위로랍시고 아이들에게 늘어놓는다. 버려진 아이들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거나 기다리지 않는다.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기다리지 않는다. 아이들이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은 기댈 수 있는 몸과 살이고, 어른들은 아이들이 살과 살을 맞대고 있는 것을, 몸과 몸을 기대고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것은 어리석거나 불온하다고. 그들의 말이 맞다면, 이 세계가 그들의 것이라면 구와 담은 실패할 것이다. 실패하고 실패할 것이다. 영원히, 죽을 때까지, 죽어서도 실패할 것이다. 실패했다는 것조차 잊혀질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이 소설도 자꾸 노래가 되려 한다. 노래가 되버린 소설의 목록에 이 책을 꽂을 것이다. 노래 제목은 나를 잊었나요 라고 하자.

 

함께 하던 어느 날 구와 나 사이에 끈기 있고 질펀한 감정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우리의 모난 부분을 메워주는 퍼즐처럼, 뼈와 뼈 사이의 연골처럼, 그것은 아주 서서히 자라며 구와 나의 모나고 모자란 부분에 제 몸을 맞춰가다 어느 날 딱 맞아떨어지게 된 것이다. 딱 맞아떨어지며 그런 소리를 낸 것이다.

너와 나는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네.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하겠네.

 

얼마간은 그런 확신으로 구를 기다렸다.

 

또 얼마간은 이모 말을 따라하며 구를 기다렸다.

지나면 그뿐.

지나면 그뿐.

얼마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나는 결국 무엇이 지나가길 기다리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구를 기다리는 시간인지, 구인지.

 

(84-85)

 

그러네.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네,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하겠네> 와 <지나면 그뿐, 지나면 그뿐> 사이에서 오락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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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도미난스 - 지배하는 인간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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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용도는 어젯밤 거실에 불을 끄고 책방에 들어선 순간 결정되었다. 조용하고 비가 오고 방문은 닫혀 있고 전등은 밝고 잠은 역시 안 오고 골치 아픈 생각은 하기 싫고 마음에는 서글픈 분노가 차오르고 책은 많고 안 읽은 책도 많고 만만해 보이는 제목의 책을 하나 읽어야겠고 뭐 그런 이유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소설에 초능력자가 등장하면 뭐랄까 만만하다고 할까 안심한다고 할까 그런 상태가 된다. 그런 존재가 있을 리도 없고 그런 존재를 열심히 구상하고 묘사하는 사람이 그런 존재를 믿을 리도 없고 그런 초능력이 은유하거나 비유하는 대상은 역시 너무나 익숙한 것이고 그 거리 역시 너무 가깝고 그래서 내가 생각할 필요는 더욱 없고 그냥 따라가다가 마음에 드는 묘사나 인물이 있음 조금 생각해보는 정도다. 어쨌든 비가 오고 방문은 닫혀 있고 전등은 서글프게도 너무 밝고 잠은 빌어먹을 안 오고 쓸데없는 생각은 너무 많이 해서 골치 아프고 해결 안 되는 분노는 차근차근 쌓이고 케케묵은 책들과 신삥 책들은 모두 아무렇지 않게 섞여서 먼지만 뒤집어 쓰고 있고, 그래서 그냥 닥치고 읽어야 하는데, 이 소설은 상한 맥거핀이 왜 이렇게 많나. 나는 그 머시냐 라오스 촌장 부하가 나중에 정말 거물 악당이 될 줄 알았다. 그는 지배 당하는 경험과 지배하는 경험을 동시에 갖고 있으며, 지배와 피지배에 대해 강한 자의식을 갖고 있는 인물인줄 알았다. 그래서 뭐라도 될 줄 알았더니 전두엽 절제술이나 당하고. 이렇게 되고 보니까 이 소설의 무수한 맥거핀은 전혀 맥거핀이 아니었고 그냥 작가가 감당할 수 없는 캐릭터의 세부를 실토하는 기능만 하게 된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금 추적추적 비가 오고 나는 오전부터 옛날 노래를 너무 많이 들은데다 커피를 이미 다 마셔버렸고 해가 지는데 집에는 들어가기 싫고 분노는 차갑게 식어서 경멸 비슷한 감정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별점 두 개를 주려다가 문득 생각 났는데, 내 별점 두개가 이 책의 전체 평점을 지나치게 낮은 쪽으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닌가, 혹시 이런 작은 평가가 작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닐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보다 더 못한 책도 얼마든지 많은데, 내가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낮은 평점을 받게 되는 것은 좀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가자의 별점 부여 습관에 따라 조정 별점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투덜이가 투덜대는 것은 그냥 상한 맥거핀 같은 것이니까. 그러나 조정 별점으로 책을 평가할 만큼 책이 돈이 되는 시대가 올 리는 없기 때문에 앞에 쓴 건 그냥 미안한 척 하는 정도의 용도라 해두자. 아무리 사이버 네트워크 시대라 해도 이 정도 미덕은 나쁠 게 없으니.

 

책을 읽으면서 순수하게 감정이입한 장면이 몇 개 있었는데, 그게 어떤 것이었는지 하루만에 잊어버렸다. 아마도 상실감, 죽음충동에 대한 묘사였던 것 같은데, 이게 이 책에서 나온 내용이었는지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나온 것인지 헷깔린다. 어쨌든 이제 해도 졌고 집에 들어가야겠다. 거실에 불을 끄고 또 책방에 앉아 넋을 놓고 앉아 있겠지. 최악은 아니야. 그런데 최악이 아닌 것이 정말 최악인 경우도 있지. 한국 프로야구에서는 10등 하는 것보다 9등 하는 것이 더 최악이니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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