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정지돈 지음 / 스위밍꿀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세상의 모든 소설을 느린 소설과 빠른 소설로 나눈다면 이 소설은 어느 쪽에 속할까. 당연히 빠른 소설이다. 어쨌든 이 소설의 인물들은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하니까. 그런데 원래 앞선 질문은 그런 의미가 아니지. 사건 중심이냐 심리 중심이냐 뭐 이런 걸로 나누는 질문인데. 이 소설을 앞에 두고 사건 중심이냐 심리 중심이냐 하는 교과서적인 질문은 별로 의미가 없다. 이 소설은 분명 사건 중심이지만 낱낱의 사건이 최종적인 결과를 향해 주도면밀하게 진행되지 않기에 사건 중심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질문이 잘못된 거다. 질문을 바꿔보자. 이 세상의 모든 소설을 쓰기 위한 소설과 읽기 위한 소설로 나눈다면 이 소설은 어느 쪽에 속할까. 이 질문은 소설의 자기지시적 경향의 유무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 소설은 아무래도 쓰기 위한 소설인 것 같은데, 그렇다고 자기지시적 경향이 나타나지는 않으므로 이 질문 역시 뭔가 잘못됐다. 자,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자. 이 세상의 모든 소설을 윤리적인 소설과 비(그냥 윤리를 묻지 않는 소설)윤리적인 소설로 나눈다면 이 소설은 어느 쪽에 속할까. 아무래도 윤리적인 소설인 것 같다. 이 질문이 결정적인 건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질문이 마음에 걸린다.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삶이 더 이상 나빠지는 것에 반대하기 위한 소설. 이런 소설들이 지금 한국소설의 현주소다. 최악을 가정하고 있지만 아직 최악은 아니니 최악이나 마찬가지다, 라는 식 아닌가. 지금 내가 뭐라고 쓰고 있는 건가. 어디갔지? 선동렬의 슬라이더, 아니 최동원의 포크볼, 아니 오캄의 면도날. 이 악순환을 잘라낼 수 있는 것. 악순환이라니? 소설은 원래 간단한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든 건데. 복잡한 걸 간단하게 잘라낼 거면 왜 소설을 쓰겠니. 간단한 걸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소설의 미학이다. 간단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굉장히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소설의 미덕이다. 그래서 우리에겐(독자들) 시간이 필요한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는 것이 일을 어렵게 만든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어, 라고 외치다가 다음 기회에, 다음 기회에 외치다가, 다음 생에는, 다음 생에는, 다음 생에는? 다음 생 같은 건 없으니 이제 퇴근이나 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금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어컨이 싫다. 머리가 아프다. 이번 여름은 어떻게 기억될까. 습도가 높다. 머리가 아프고, 머리가 아프니 배도 아프고, 여름에는 에어컨이 있어야 하고, 머리가 아프다. 이번 여름은 습도가 높고 머리가 아프다.  

 

2016년 여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이 책을 주로 휴가지에서 사용한다. 2016년에 나는 뭘 하고 지냈나. 공백이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2016년에도 경주에 갔을까. 경주에서 나는 이 책을 읽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요즘 많은 것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다. 지갑과 카드와 전화기와 열쇠와 옷과 책과 가방과... 왜 이러는 걸까 생각해 보았더니 잃어버리기 싫고 잊기 싫어서라는 답이 나왔다. 모든 것을 지키고 싶거나 기억하고 싶으니 한두 가지는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릴 수밖에 없는 거다. 혹은 더 많은 것들을.

 

그냥 적당히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고 살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김금희의 <너무 한낮은 연애>를 읽었는데, 소설을 너무 잘 써서 놀랐다. 잘 쓴다는 게 뭐 대단한 게 아니라 내가 소설 읽는다는 걸 잊어버리게 만든다는 뜻이다. 김금희의 소설을 읽고 나서 다음 소설을 읽으니 내가 소설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확연히 느껴졌다.

 

소설을 읽으며 소설을 읽는다는 걸 잊어버린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이제 소설은 소설로 읽을 나이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소설을 읽다가 소설 이상(이하인가)을 생각하게 되는 건 참 이상한 일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떄에는 그렇지 않은데, 소설을 볼 때면 이렇게 되어버린다. 이건 매체의 문제이긴 한데, 모든 소설이 그렇지는 않으므로 일부의 소설들에만 적용될 수 있는 (개인적, 이라는 말이 필요할지도 모르지만)미학적 효과라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경 1 - 제1부 불임의 세월
이문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문열 본명이 뭐였더라? 문열이 본명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본명이라도 그렇고, 필명이라도 그렇고 이름 참 기가 막히게 지었네. 이문열의 옛날 소설들을 읽다보면 왜 이리 낯이 뜨거운지. 촌스러운 거야 시간이 지났으니 어쩔 수 없는 건데, 확실히 다른 40년대 생과는 달리 트랜드에 민감한 소설가임이 분명하고, 자의식 과잉 역시 뭐 이문열 소설의 본질 같은 거니까 얼굴 붉히지 않고 읽을 수 있는데, 자학과 오만이 짬뽕된 내포작가 역시 소설가라면 무릇 그래야하고, 뭐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읽는 내내 종종 낯이 뜨겁네.   

 

그래서 이게 뭔가 싶어 계속 생각해봤더니 이 '붉음'의 이유는 아무래도 '대화' 때문인 것 같다. '붉음'에 대해서도 더 설명해야 하는데, 그건 조금 있다 하기로 하고. 아무튼 구어체로 된 대화들이 문제야. 지문은 작가가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지. 작가의 자의식으로 얼마든지 덮어쓸 수 있지.근데 인물의 말은 그게 잘 안 된다. 제대로 정신머리 박힌 소설가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날것 그대로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문열이 만든 인물들의 사투리는 바로 그 날것들을 현전시킨다. 그러나 그게 가능한가.

 

단순히 생각하면 언어의 운용은 지문이든 대화든 똑같은 거 같고, 작가가 마음 먹은대로 의미들을 실어나르기 마련인 것 같지만, 아무래도 작가의 분신인 내포작가의 말을 받아쓰는 서술자의 지문에 비해 대화는 캐릭터로부터 상당히 제한받을 수밖에 없지. 특히 사투리는 단지 보편적인 의미와 평행하는 지방적인 기호로서만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나름의 의미체계(어쩌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 이건 그냥 내 생각이니까, 아님 말고. 아무튼 그럭저럭하여 소설가가 지방의 기호로 인물의 말을 받아적는 순간 그 대화 속에는 그 땅이 만들어내는 날것들이 틈입한다고 봐.  

 

이문열의 소설, 지금 읽고 있는 건 <변경>이니까, <변경>의 경우 한반도 동남쪽 사투리가 대화의 중심인데, 이 한반도 동남부 사투리를 읽을 때마다 내 얼굴이 붉어진다. 나는 이 대화를 억양까지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데(물론 머릿속에서) 그 순간, 인물들의 마음과 그 마음의 바탕을 이루는 그 땅의 성장환경(뭐라고 해야 하나, 가정교육이라 해야 하나, 어쨌든 어른들의 말을 통해 아래로아래로 전달되는 세상의 이치 같은 거?)이 동시에 내 머리통에 재생된다. 이건 좀 무서운 거다. 별 거 아닌 말들인데, 이 말들이 만들어지고 전달되는 이치를 생각해보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어 역시 그렇겠지.

 

<변경>이라는 소설은 한국이 미국과 소련의 오랑캐였던 한 시절, 서울에 모여들었던 사투리 유저들의  이야기다(3권까지만 읽어서 뒤에 어떻게 될진 모른다). 한국의 중심에서 '우리가 오랑캐야'라고 말하는 소설가의 마음이란 뭐 대충 알만하다. 전혀 무섭지 않고 놀랍지 않고 아무렇지 않다. 무서운 건 그 오랑캐들의 사투리다. 그 사투리 속에 오랑캐들이 자기들의 땅에서 오랫동안 갈고 닦은 세상의 이치가 담겨 있어서 무섭다. 그리고 내가 오랑캐들의 사투리 속에 새겨진 그 세상의 이치를 내면으로부터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 얼굴을 붉게 만든다. 이 붉음은 부끄러움이거나 분노겠지.

 

근데 이 오랑캐들 본적이 어디야? 당연히 한반도 동남부라 생각하는데, 혹시 '문열'이나 '문약'은 아니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시의 시간 오늘의 젊은 작가 5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굳이 여기에 이걸 쓸 필요는 없지만 굳이 여기에다 이걸 써야겠다. 지금은 여름이고, 장마고, 나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앞의 두 문장 사이에는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어가 생략되어 있다. '굳이' 그러는 것이다. 접속어가 없어도 사람들은 접속어를 넣어서 읽게 마련이다.

 

그래서 굳이 나는 여기에 이걸 쓴다. 왜냐하면 이 소설에는 '왜냐하면'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며 '이럴 수는 없다'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이 소설이 굳이 '왜냐하면'을 삭제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이 생략된 세계는 자연이다. 그래서 도시도 일종의 자연이다. 물론 시간도 자연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제목은 <자연의 자연>이다. 그들이 살았던 자연은 자연의 흐름에 따라 자연히 저렇게 된 것이다.

 

나는 그들이 살았던 도시에 살았던 적이 있다. 그들이 다녔던 도서관에서 커피를 뽑아마시고 그들이 다녔던 학원을 지나치고 그들이 들렀던 헌책방에서 참고서를 사기도 했다. (나는 그 도서관과 학원과 헌책방의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는다는 것을 굳이 괄호 안에 넣어 말한다) 그들이 살았던 바로 그 시간에, 나는 그들이 지나간 그곳을 지나쳤다. 그 시공간은 특정한 시공간이다. 자연이 아니다. 아무리 자연인 척 해도 그 시공간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이 소설에 나오는 그 시공간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굳이 대구라고 쓴 건 굳이 대구를 생각하며 읽으라는 것이다. 굳이 대구라고 쓴 건 굳이 대구를 생각하며 읽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대구가 아닌 것에 대해 말하면서 굳이 대구에 관해 생각해보라는 불가능한 미션을 독자에게 부여하는 셈이다. 그 반대거나.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은 <자연의 자연>이 될 수 없다. 이 소설은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를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를 걸치고 있기 때문에 '왜냐하면' 또한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요지부동 '왜냐하면'의 세계이고, 나는 그 '왜냐하면'에 대해서라면 제법 전문가다. 그럼 지금부터 그 '왜냐하면'의 세계에 대해 얘기해볼까.

 

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 소설을 굳이 리얼한 세계와 걸쳐놓을 필요가 있을까. 걸쳐놓는 데에 힘을 쓸 필요가 있을까. 먹은 음식물을 확인하기 위해 굳이 토할 필요가 있을까. 토할 것 같은 대구의 더위와 답답함과 친박 미용실 아줌마와 이문열과 장정일의 차이에 대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혹은 다른 도시에 대해.

 

답은 물론 그럴 필요가 없다, 이다. '왜냐하면'을 걸치고 있을 필요가 없었고, '대구'를 걸치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대구는 소설 속에 나오는 그대로 '단핵 집중형 공간 구조'로 계획된 하나의 도시일 뿐이다. 부동산 투기의 파라다이스이자 대프리카 고담 등으로 불리는 가열차게 망해가고 있는 소비도시. 라고 굳이 쓰지 않아도 된다. 걸쳐만 놓아도 그렇게 읽는다.

 

더 쓸데없는 소리 쓰기 전에 서둘러 결론을 내리자면, <부자연스러운 비자연>에 대해 쓴 작가는 걸치는 데에 재주가 있다, 이다. 작가는 그걸 아이러니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냥 무책임이라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시의 시간 오늘의 젊은 작가 5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 19쪽을 읽고 있다. 18-19쪽에는 '준은 눈물과 우울, 슬픔 모두 한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했다.'라는 문장이 세 번 반복된다. 세 번째 같은 문장을 읽고난 뒤 나는 깜짝 놀란다. 나는 이 소설을 최소한 세 번째 다시 읽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매번 이 소설을 가방에 집어넣을 때마다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오늘은 이 책을 한 번 읽어볼까'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도 깨닫는다... 여기까지 타이핑을 마치고 20쪽으로 넘어간다. 20쪽에는 더 무서운 일이 기다리고 있다.

 

20쪽에서 '나'는 "어. 그러니까 저절로, 내일 또 그렇게 되고 다음 날 또 그렇게 되면 잊고 지내다가 한 달쯤 후에도 그렇게 되면 바람은 자주 나를 넣는 거잖아."라고 말한다. 나는 또 한 번 깜짝 놀란다. 나는 이 문장을 읽은 기억이 없다. '나'는 내가 이 소설을 세 번째 반복해서 읽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인가. 마치 바람이 '나'를 저절로 넣듯이 이 소설도 저절로 내 가방 속에 들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작가가 알고 있나. 그러니까 이 소설은 '나'를 저절로 집어넣는 바람 같은 것인가. 그러고도 다시 잊혀지는?

 

그래서 나는, 왜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소설을 18-19쪽의 이야기가 끝나는 4장까지만 읽기로 마음먹었다. 4장에는 바람과 비와 마음과 슬픔과 아득함과 기다림에 대한 '나'와 '우나'의 생각이 담겨 있다.'나'와 우나는 안다고, 바람과 슬픔과 우울과 마음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4장까지만 읽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 도리가 없다. 물론 끝까지 읽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알고 있다. '나'와 우나가 알고 있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들이 느꼈을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라면 나도 잘 알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들은 그런 걸 알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가만히 앉아 넋놓고 있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쓴 것이고(안 그런 소설가가 어디 있겠냐만), 그런 사람들이 읽으라고 쓴 소설이다. 내가 이 소설을 세 번째로 처음처럼 읽는 것은 바로 이런 마음 상태 때문인가 보다.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상태일 때 나는 이 소설을 읽었다. 그래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 소설을 읽지 않을 것이고 읽으려고 책을 폈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덮게 될 것이다. 나는 왜 가만히 앉아 멍때리는 시간에 이 책을 읽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사실을 잊는 걸까. 이게 참 희한한 일인데 내가 책을 반복해서 읽는 경우는 어떤 부분을 다시 보고 싶어서거나 다시 읽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때 뿐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도 없고 이 책을 읽었다는 기억조차 없는데 반복해서 읽고 있다.

 

마음을 추스리고 이 책이 내 가방 속에 들어가게 된 연유를 한번 따져보자. 사실 이 책을 가방 속에 넣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은 아주 작다. 그리고 제목이 아주 추상적이다. 작가의 이름도 뭔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아직 안 읽었다!!!!! 내 책장에 있는 소설책 중에 안 읽은 건 이것밖에 없어! 라고 생각한다ㅜ 결국 제자리다. 문제는 책의 부피도 아니고 제목도 아니고 작가의 이름도 아니고 이 책을 읽은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한 번은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지. 첫 장을 읽다가 졸려서 책을 덮었을 수도 있지. 그래서 마치 처음처럼 다시 읽는 것일 수도 있지. 그런데 방금 나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고 잠시 5장이랑 6장을 살펴봤는데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 책을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읽은 것이다. 아직 무서워서 더 살펴보진 않았지만 어쩌면 다 읽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짓을 최소한 세 번째 반복하고 있다. 내가 굳이 여기다 이걸 쓰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럴 수 있다. 제목이나 책의 모양이 마음에 들어 도서관에서 빌려와 읽다보면 아, 옛날에 읽었던 책이네, 이럴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내가 돈 주고 산 책이고, 그것도 산 지 2년도 안 된 책이다. 도저히 모를 수가 없다. 그런데도 나는 2년 사이에 최소한 세 번째로 이 책을 마치 처음처럼 다시 읽고 있다. 이럴 수는 없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면 이럴 수는 없다, 이다. 이럴 수는 없다. 도저히, 납득이, 이해가, 이해하려 해도, 노력은 해보겠지만, 원래 인생이 그런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럴 수는 없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면 이럴 수는 없기 때문에 이 소설을 다 읽어야겠다, 이다. 그리하여 결론은 비록 이 소설을 다 읽지는 않았지만(어쩌면 다 읽었을 수도 있지만), 이 소설에 대한 내 별점은 3점이고, 이 3점은 내가 최소한 이 소설을 세 번째 반복해서 읽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한 주술 같은 것이다, 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