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독립했다. 대학 입학 후 처음 경험한 주거 형태는 ‘하숙’이었다. 2000년, 당시 내가 살았던 하숙집 가격은 보증금 없이 30만 원이었다. 싸다고 해야 하나, 비싸다고 해야 하나. 이불 두 개 정도 깔 크기의 비교적 넉넉한 면적이었다. 서울에서 그렇게 큰 방, 게다가 아침, 저녁 식사까지 제공되는 하숙집이 30만 원밖에 안 한다고?

 


싼 데는 다 이유가 있다. 2인 1실이었기 때문이다. 혼자 살면 45만 원은 족히 받아도 될 만한 정도의 방이었지만 둘이 살았기에 가격이 내려갔다.

 


하숙을 택했던 이유는 부모님 의지였다. 자취와 달리 하숙은 식사가 제공되니 조금이라도 안심이 되셨나 보다. 아직 고등학생 티를 벗지 못했던 아들 혼자 서울에 보내놓고 얼마나 걱정이 되셨을까.

 


한 달에 한 번 삼겹살이 별미로 제공되는 하숙집에서 나는 대학 1년을 보냈다. 부모님의 의지가 반영된 주거는 거기까지였다. 서울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될 무렵부터 나는 내 의지대로 주거 형태를 결정하기 시작했다.

 


자취에서 더부살이까지, 온갖 주거 형태를 이때 경험했다.

 


자취, 그냥 월세, 우편물 수령이 어려운 다가구주택, 공동 화장실 옆 미닫이 방, 후배 집에 얹혀살기, 선배 원룸에 얹혀살기, 독신자 간부 숙소 등.


  

대학 1학년 시절을 보낸 하숙집은 2인 1실이었다. 방을 같이 사용하는 동갑내기 하숙생은 알던 사이가 아니었다. 둘 모두 예민하지 않은 성격이었지만 타인과의 동거는 기본적으로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방에서 속옷을 갈아입기 민망하다. 혼자 살면 창문 단속만 잘 하면 속옷을 입든 말든, 퍼질러 누워 있든 코를 후비든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만물의 영장인 한 인격체와 방을 공유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체면 해소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느니 나는 그냥 자유롭게 혼자가 되기를 택했다.

 


반지하에서 지내는 생활이었지만, 이상만큼은 하늘을 날아다녔다. 생의 의미를 생각하고, 의미 있는 삶을 꿈꿨다. 대학을 졸업하고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 저마다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어떤 진로를 택해야 하나, 결혼은 할 수 있을까 등의 질문은 일단 뒤로 제쳐놓았다. 어차피 한때 나그네로 살 인생, 안락한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도 했다.

 


방랑하는 20대, 그 시절. 배는 고팠지만 이상은 맘껏 춤췄다….

 


 

6화에서 계속됩니다.

 

* 위 내용은 <나의 주거 투쟁>(김동하 지음, 궁리 펴냄)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나의 주거 투쟁>

김동하 지음 / 궁리 펴냄 / 2018년 6월 18일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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