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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꿈꾼 독서가들 - 불온한 책 읽기의 문화사
강성호 지음 / 오월의봄 / 2021년 7월
평점 :
근대 독서가들의 책장을 들여다보다
역사학자 강성호가 쓴 [혁명을 꿈꾼 독서가들]은 독서의 계보를 통해 우리 근대사를 지성사적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있다.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에게 가장 큰 화두는 ‘독립’일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지 자신이 식민지의 피지배층이라는 한계가 도사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당시를 다룬 많은 역사 서술이 민족적 독립 서사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책에 등장하는 홍명희, 신채호, 김구, 김산, 김학철, 정칠성 같은 인물들 역시 식민지 현실 속에서 3.1운동을 비롯해 다양한 독립운동을 펼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책을 통해 세계사에 불던 민족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사상을 익히고, 이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일에 열심이었다. 신문 외에 별다른 매체가 없던 당시로서는 여러 사람이 같은 내용의 글을 돌려보거나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이 독립운동의 주요한 도구였을 것이다.
저자는 개인의 독서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근우회와 상록회를 비롯해서 비밀독서회의 존재에 주목한다. 특히 비밀독서회는 학생운동가들과 교사들이 주축이 된 집단적 학습과 결사의 장으로서 작동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책은 독립운동가들의 독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보기엔 어딘가 어색하다. 본문 5장 ‘페미니스트 나혜석의 탄생’이나 7장 ‘엘렌 케이의 애독자들’, 8장 ‘과학 조선을 꿈꾼 독서가들’을 보면, 독립운동만으로 이 책을 설명하기 곤란하다. 더군다나 일부 인물이나 독서 기록의 경우 1945년 이후까지 다루면서, 독립운동을 향해 한 길을 달리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옆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책 제목대로 ‘혁명’과 관련된 독서 계보를 떠올릴 수 있지만, 위와 마찬가지 이유로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독서 기록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럴 때 생각할 수 있는 답은 첫째, 저자가 그냥 쓰고 싶은 내용을 다 써서 그렇다와 둘째, 나름의 이유가 있다로 좁혀진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지만, 나의 생각을 말하면 처음에는 전자인가 싶었는데 읽을수록 후자로 기울었다. 나혜석이 일본의 페미니즘 잡지인 ≪세이토≫의 영향을 받은 것을 넘어 스스로 〈이상적 부인〉이라는 글을 통해 자신만의 기준으로 페미니즘을 받아들였다는 글이나, 비밀독서회 사람들이 사회주의 운동의 본류인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자신들의 현실에 더 필요한 볼셰비즘 독서를 했음을 짚는 글에서 저자가 말하려는 바가 단순한 사상적 교양의 전달 과정에 주목하는 도구로서의 독서 기록이 아님을 알았다. 오히려 거대한 서사에 가려 있던 문화사를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역사에 살아 숨쉬는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를 드러내려고 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제 식민지 시기는 벌써 100년 정도가 흘렀으니 생활문화적으로는 현재와 많은 차이가 있지만, 책 속에서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경제적 평등에 대한 논의, 교원 노조를 고민하는 교사 등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지금의 현실이 겹쳐졌다. 친일이냐 반일이냐의 이분법을 넘어서 생각하면, 식민지 조선이라는 거대한 현실 조건 속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입장과 처지에 따라 다른 선택과 꿈을 꾸었던 것이다.
결국, 책 제목의 ‘혁명’은 식민지 시대 유행했던 사회주의적 투쟁으로서의 혁명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다차원적 혁신에 더 가까운 뜻인 것 같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더 잘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그들도 우리처럼 저마다의 세계를 꿈꾸며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혁명을 꿈꾼 독서가들]에서 저자가 나혜석, 정칠성을 비롯한 여성 독서가들의 기록을 정리하고, 과학책 저술가와 요리책 저술가의 독서 기록을 살펴본 이유도 바로 그들이 식민지라는 제한된 환경 안에서도 치열하게 자신이 바라던 세계를 꿈꾸던 사람들이라 그랬구나 싶다.
지적 세계를 여행하는 혁명가들의 발자취
백범 김구는 책을 허투루 읽지 않고 지행합일의 정신으로 자신이 읽은 책의 가치를 현실에서 이루고자 했다. 단재 신채호는 부단한 독서를 통해 자신이 바라는 혁명을 수정해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사회주의 혁명가였던 김학철은 나중에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책을 써 감옥살이를 했는데 그 바탕에는 [고요한 돈강]을 손에 놓지 않은 인본주의적 독서 경험이 있었다. 이들 외에도 이 책에서 다루는 많은 인물들이 고정된 사상에 머물기보다 독서를 통해 다른 생각을 수용하고 지속적으로 배움을 이어갔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 책 마지막 장에서 다루듯이, 일제 식민지 조선에서 한글로 독서를 하는 일은 반체제적인 행동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독서는 그 자체로 불온하고 혁명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독서는 일방향적 수용의 과정이 아니라 쌍방향, 다방향적 사유와 가깝다. 한 권을 읽으면 또 다른 책이 궁금하고, 한 권의 책에는 해당 저자에게 영향을 미친 사회문화적인 배경과 시대적인 맥락, 그것들이 담긴 여러 권의 책이 스며 있다. 덕분에 각 장의 인물과 책마다 관련해서 더 깊이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읽다보면 책과 자료가 꽉차다 못해 쏟아져 나올 듯 가득한 책장이 떠오른다. 저자가 얼마나 많은 자료를 찾고 또 검토했을지 생각하면 머릿속이 까마득해진다.
무엇보다 독서가 가능하려면 글자와 자신 사이의 간격을 이해하고 세계를 해석하려는 독자의 의지가 필요하다. 독서 기록에 독자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면,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읽은 책을 살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강성호 연구자는 각 인물들이 스스로 적은 독서 기록을 비롯하여, 당시 신문 인터뷰와 이후의 연구 등을 통해 각 인물들이 어떤 책을 어떤 경로를 통해 읽었고, 그 사회문화적 배경에 무엇이 있었는지 성실하게 추적하여 적었다. 당대의 전 세계적인 지적 흐름 안에서 각 인물들이 어떻게 책을 읽고 받아들였는지 상세히 설명되어 있어서 여러 대목에서 감탄할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은 저자 서문을 통해 이 책이 독립운동에 한정되지 않는 책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각 인물이나 단체를 선택하고 배열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본문을 읽으면서 글의 순서가 중간에 바뀐 걸까 싶기도 해서, 책의 구성에 대해 저자의 설명이 있으면 독자들에게 책의 윤곽이나 흐름이 더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한다.
또 하나 아쉬운 것은, 많은 정보를 가진 저자와 관련 지식이 적은 일반 독자 사이의 간격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지만, 식민지 시기 한국 유학생들이 특정한 일본어 책과 잡지를 어떻게 접했는지 찾아보는 과정에서 번역이나 출판 시기와 함께, 개인적인 인연의 유무나 현지 체류 유무가 분석에 활용되고 있다. 책에서도 일본 서적이 그대로 조선에 직수입되는 일이 1920년대에 이미 상당했음을 지적하고 있어서 각 도서가 전달되는 여러 경로에 대해 궁금증이 들었다. 일본 도쿄에서 한글 표기로 책을 간행한 것으로 보이는 권독사 같은 출판사에 대해서도 설명이 더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같이 보면 좋을 책.
천정환, [근대의 책읽기], 푸른역사, 2014
책을 둘러싼 이야기 혹은 책의 이면에 감춰진 이야기는 언제나 큰 흥미를 불러일으킵니다. 제가 평소 ‘책 읽는 사람들‘ 내지 ‘책에 미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즐겨 읽는 이유입니다. - P5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는 데는 조건과 의지, 그리고 우연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맞물려 작용한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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