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괴델, 에셔, 바흐> (이하 GEB) -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이 책을 어떻게 요약해야 좋은가. 무엇에 관한 책인가.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다. '요약이 어렵다' 어쩌면 이게 가장 알맞은 요약일지도 모른다. 간단히 말해서는, 이 책은 "마음, 의식과 같은 것들이 어떻게 무감각하고 의식이 없는 구성 성분들로부터 만들어지는가"를 설명하려는 매우 개인적인 시도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는, 수학기초론, 메타논리학, 이론 컴퓨터과학, 분자유전학, 번역, 개미 군락, 선불교, 통사론과 의미론, 인공지능 등의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자기지시, 재귀, 동형성, 기술(記述)층위의 구분, 전경과 배경, 복잡계 이론, 사용-언급 구분, 전일주의와 환원주의 등의 주제를 살펴본 뒤에, 그 주제들로부터 "무의미한 기호들로부터 어떻게 의미가 발생하는가", "의식이 없는 것들로부터 어떻게 의식이 탄생하는가", "과연 인공지능은 가능한가", "자의식, 자유의지와 같은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가" 와 같은 심오한 철학적 주제에 관하여 유추를 전개해 나가는 책이다. 저자는 이러한 주제들의 핵심이 이 책에서 "뒤엉킨 계층질서", "이상한 고리"라고 부르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 호프스태터는 독자에게 그 "이상한 고리"라는 개념에 대한 직관을 심어주기 위해 그것의 예시와 은유 및 선행 지식으로서 앞서 언급한 다양한 주제들을 소개한다. 그런데 보다시피 하나의 책 안에 전부 때려박기에는 너무 많은 주제들을 깊고 또 집요하게 다룬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다. 저자가 20주년 서문에서 직접 하소연하기를, 다루는 주제의 그런 방대함 때문에 이 책이 안 들어가 본 서점 코너가 없고, 심지어는 종교 코너에 진열되어 있는 걸 본 적도 있다고 할 정도이다. 이 점이 마지막 장까지 도달하는 여정에 있어서 최대 난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저런 분야를 다 편력하기 때문에 정말 다양한 학문 분야에 폭넓은 흥미와 관심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마르지 않는 호기심의 샘이 아니라면, 그 방대함으로 인해 관심 없고 지루한 주제를 최소한 한 번은 마주치게 된다. 꾹 참고 끝까지 읽어내면 서로 동떨어져 보이는 여러 주제들이 어떤 유사성을 갖고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는 신비, 거기에서 오는 지적 희열, 그리고 긴 장정을 마침내 끝마쳤다는 성취감이 책의 마지막 장에 약속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관심도 없는 분야를 공부하듯 꾸역꾸역 몇십 페이지 째 읽고 있노라면 누구든 상당한 피로감에 그냥 덮어버리고 싶은 유혹을 피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차함수를 처음 배우는 중학생의 마음으로, 혹은 문사철에 교차지원한 물화러의 마음으로 "대체 내가 이걸 왜 알아야 하는 거지?"와 같은 의문을 여럿 마주하게 된다. 특히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그것이 이 책의 메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물론 핵심 주제들 중 하나이긴 하지만) A부터 Z까지 정말 자세하게 설명하여 오죽하면 불완전성 정리에 대해 알고 싶으면 GEB를 읽어보라고 추천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꽤 많이)이다. 혹은 아예 이 책이 불완전성 정리에 대한 책인 줄 아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GEB의 과도한 tmi가 일독하는 과정의 즐거움에 있어서는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어도 이 책 전체의 마이너스 요소, 즉 내용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이 책을 그저 특색없고 지루한 백과사전으로 전락시키는 '옥에 티'같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방법을 통해서는 얻어질 수 없는 그만의 차별화된 특징을 갖게 함으로써 수많은 교양서적들로부터 독자적인 지위를 누리게 만드는 최대 기여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인즉 언급했다시피 그 과도한 tmi들이 전부 공통된 몇 개의 연결고리 아래에서 꽤나 체계성을 갖추고 "뒤엉킨 계층질서"를 이해하기 위한 직관적 이미지, 은유이자 구체적 사례들, 선행 지식으로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교양서들은 일반 독자를 상정하고 쓰여지므로,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에서 전문적인 영역과 학문적 엄밀성이 절제되어 정제된 지식만을 누리게 된다. 그래서 진정한 깨달음으로부터 박탈당한 채 반쪽짜리 깨달음으로 만족해야 하거나 상황이 돌아가는 꼴을 그저 팔짱 낀 채 관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GEB는 정말 불필요한 증명의 사소한 부분이나 각 주제들을 잇는 연결고리를 너무 벗어나는 부분을 제외하면 많은 내용들을 상당히 심도 있게 다루어 독자들로 하여금 보다 분명한 시야를 갖게 만든다. 그렇게 형성된 각 주제의 직관적 이미지들이 곧 저자가 "뒤엉킨 계층질서", "이상한 고리"라고 명명한 아이디어에 대한 다채롭고 생생한 이해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그 모든 것들이 '의식, 그리고 그 느낌의 근저는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라는 종착 지점에서 만나 한데 어우러지며 웅장하게 마무리된다.
그러면 명목상으로만 교양서고 사실상 전공서와 다를 게 무엇인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다시 GEB의 특장점 중 하나가 드러난다. GEB 또한 여타 교양서와 마찬가지로 일반 독자를 겨냥한 책이기 때문에 비록 깊고 무절제하게 건드릴지라도 매우 이해하기 쉽고 친절하게, 일반 독자 친화적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교양서라고 해 놓고 대학원생도 못 읽게 쓰여진 로저 펜로즈의 <실체에 이르는 길>과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주 엮이는데 분명히 그와는 궤를 달리한다. 다루는 내용이 너무 추상적이고 전문적이라 배경지식이 전무한 독자가 지루해하거나 따라오지 못할 타이밍 혹은 주제이다 싶으면 직관적인 (거기다 참신해서 재미있기까지 한) 비유와 예시를 두번 세번씩 들어 떠먹여주다시피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그래도 실제로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는 GEB를 기호논리학 교재로 쓴다고 하니, 교양서와 전공서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는 것 같긴 하다. 하여간 깊은 주제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친절하고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쉽게 쓰여져 조금만 참고 공부하듯 읽다가 보면 상당히 많은 것들을 얻어갈 수 있다.
출간 당시에는 GEB의 선풍적인 인기의 원인이 이 책의 인공지능에 대한 전향적인 관점과 전망에 있었다고 한다. 표제와 목차만 보면 이 책에서 인공지능은 소주제들 중 하나로 다루어질 것 같지만 당초 저자가 GEB를 통해 논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핵심 주제가 '의식', '지능'인 만큼 후반부 분량의 상당 부분을 고스란히 인공지능 그 자체만을 위해 바치고 있다. 1976년에 쓰이고 1979년에 출간되었으니 그로부터 40년 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낡은' 이론으로서 호소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얼핏 생각할 수 있다. 근 20년간 인공지능 기술력과 산업 규모가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빠르게 성장했는지를 고려해 보면 말이다. 실제로 GEB에서 예측하는 인공지능에 대한 몇몇 전망들 중 많은 것들이 현재로서는 이미 한참 전에 실현되었거나 단지 시간문제이고, 혹은 틀렸거나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된 것이 사실이다. 특히 호프스태터는 이 책에서 인공지능이 단지 체스 프로그램 등 실용적 목적으로만 접근되고 있는 당시의 학풍과 방향성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며, 우선 인간의 지능에 대한 충실한 연구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이에 대한 오늘날의 중론은 역자의 표현을 빌리면,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를 발명하기 위해 새가 아니라 기체역학을 연구했다. 비행기는 날개를 퍼덕거리며 날지 않는다." 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통찰과 예측이 조금 엇나갔을지라도, 인공지능의 토대가 되는 핵심 원리는 여전히 변함없는 것으로서 GEB에 드러난 호프스태터의 통찰과 공상은 오늘날에도 많은 부분에서 타당성을 유지하고 있고, 그 이유만으로도 여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GEB만의 또다른 독특한 매력 중 하나는 각각의 장에 들어가기에 앞서 해당 장에서 소개할 아이디어들을 아킬레스와 거북 및 다른 동물들 사이의 대화 형식으로 재치있게 녹여낸 우화가 삽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우화들은 저마다 바흐의 푸가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나는 바흐의 음악을 전혀 몰랐는데도 대화의 형식과 내용 사이의 조화가 워낙 창의적이고 참신해서 재미있게 읽었다. 처음에는 기존의 관례에서 많이 벗어난 구성이라 막연한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겠으나, 읽다 보면 저자 호프스태터의 재치 넘치는 언어유희와 대화의 아이디어에 분명 감탄하고 그 매력에 빠지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개인적으로 GEB의 지분 50%는 이 우화들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재치 넘치는 익살과 꽉 찬 내용 구성을 통해 "의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수많은 깨달음과 통찰을 제공하는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교양 서적이라고 생각한다.
2. <오블리비언> -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이하 DFW)
<오블리비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참으로 비범한 인생을 살다 간 한 명의 인간으로서 특히 좋아해 마지않는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단편집이다. 주요 테마는 표제의 사전적 의미 그대로 무의식, 잠재의식,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이고, 각 단편은 저마다 현대사회가 앓는 여러 문제점 및 그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여러가지 조금은 병적인 면들을 그리고 있다. 주제의식이 분명한 단편들을 몇 가지 나열해보자면, 현대사회에 만연한 합리주의적 정신과 타인에 대한 대상화의 문제를 다루는 <미스터 스퀴시>, 소통 가능성의 본질적 한계로부터 비롯되는 인간의 기만적인 면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굿 올드 네온>, 유명인이라는 상징과 그 작동 방식에 대한 <더 서퍼링 채널>.
DFW의 글은 "DFW식 스타일"만으로 이미 유니크하고, 몇몇 작가들이 그러하듯 소설의 특징과 그 작가 개인의 스타일이 뗄레야 떼어놓을 수 없는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어서 <오블리비언>에 대한 소개를 그의 문학적 스타일에 대한 소개로 대체하더라 무리는 아닐 것 같다. 그의 책 어느 곳을 펼치더라도 1차적으로 바로 발견할 수 있는 문체상의 특징은 만연체가 매우 심하다는 점이다. 정말 미친듯이 심해서 어떤 문장은 세 페이지에 걸쳐서 늘어진다. 종속절 안의 종속절 안의 종속절... 정말 끝없이 늘어져서 주술관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조차 버거워진다. 읽다보면 번역가가 겪었을 노고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표제작 <오블리비언>의 후반부에서는 이것이 본 내용보다 긴 괄호, 괄호 안의 괄호, 괄호 안의 괄호 안의 괄호와 본문보다 긴 주석, 주석 안의 괄호...등등과 만나 정신나간 시너지를 발휘하여 이해의 흐름을 방해한다.
그가 말이 너무 많고 이토록 절제력이 없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것, 의식의 표면 위에 포착되는 최대한 많은 것들을 현미경적으로 세세히 묘사함으로써 어떤 오해도 남기지 않고 인간 존재에 관하여 최대한 많은 것을 담아내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경험으로 알고있다시피 인간의 심리라는 것은 극도로 복잡해질 수 있어서 때로는 단 3초간의 심리라도 온전히 설명하는 데에 30페이지의 지면을 할애해야 할 수도 있다. DFW는 그 30페이지를 결코 낭비라고 생각하거나 아까워하거나 독자의 인내심을 그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는(아니 오히려 괴로워하는 독자를 보면서 즐기는 것 같기도 한) 작가이기 때문에 그러한 문체상의 특징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 마디로 솔직하려는 발악이자 남김없이 소통하기 위한 발버둥의 결과물이다.
또한 각 단편의 테마가 미국적인 문제들과 많은 연관이 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gta를 오랜 시간 즐겼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문화에 대해 거의 무지해서 그 맥락 속에서 읽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테마들은 단지 오늘날의 미국에 대해서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문제들이고 특히 코로나 이후 세대에서 더욱더 심화되고 있는 다양한 사회문제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에 미국적인 게 무엇인지 전혀 모르더라도 그다지 걸림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단편은 <굿 올드 네온>이다.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단편이 특히 더 슬프고 애절한 이유는 작품 외적인 요소와의 연관 때문이다. 저자 DFW는 2004년 이 단편집을 출간하고 4년 뒤인 2008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이 단편이 사실상 그의 유서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굿 올드 네온>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 필립 로스의 <포트노이의 불평>과 같은 자기고백형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주인공의 자기고백에서 DFW가 앓았던 고뇌가 거의 그대로 드러난다. 아니, 소설은 소설로서 받아들여야지, 작품 안의 인물과 작가를 너무 연결짓는 거 아닌가. 일반적으로 그래야 하지만, 이 작품 속에서는 작품의 주제와 작가를 떼어놓을 수 없게 만드는 하나의 중요한 암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책 뒷표지에 들어간 정지돈의 추천사가 마음에 들어 이것을 인용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가 소설, 더 나아가 예술에서 보고자 하는 것, 원하는 것은 뭘까. 천재적 재능 덕분이건 괴팍한 성격 때문이건, 집요한 강박과 비대한 자의식, 어리석은 욕심 때문이건, 한계를 시험하는 유형의 작가들이 있다. 언어의 한계, 사고의 한계, 감정과 기억, 신체와 행위의 한계. 다시 말해 인간 존재의 모든 것을 담아내려는 작가들. 그런 시도가 옳은 것인지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계와 부딪치려고 했을 때만 탄생하는 것이 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소설이 그 완벽한 사례다. 그의 소설은 중독을 끊을 수 없는 도박이나 컴퓨터 게임, 입안이 찝찝해질 때까지 먹어대는 불량 식품과 같다. 자기혐오와 연민이 뒤섞인 채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자의식 기계. 그의 소설에는 깨달음도 교훈도 즐거움도 없다. 소설을 읽는 내내 우리는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할 뿐이다. 인간이란 무엇이고 우리는 왜 삶을 이어가야 하는가. 한계가 명확한 질문에 죽기 직전까지 집착하기 또는 죽음과 함께 집착하기. 실비아 플라스의 말처럼,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된다. 모든 것을 알고자 할 때 그것이 우리가 무(無)에 가장 가까이 근접했다는 신호라는 사실을.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소설은 그러한 한계의 흔적이자 망각의 신호다."
3. <수학철학> - 스테판 쾨르너
앞의 두 권이 임팩트가 워낙 세서 세 번째는 뭘 골라야 하나 고민을 좀 했는데, 앞의 두 권만큼 인상적이었던 책이 하나 있긴 하지만 책 중에는 너무 해로워서 타인의 행복을 눈곱만큼이라도 존중한다면 추천하지 말아야 할 책이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의 사진작가 에두아르 르베의 어떤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을 골랐다. 이 책은 1960년대에 쓰여자 책이라 이후의 담론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 점만 빼면, 나 같은 문외한도 이해하기 쉽게 서술되어 있어서 수학철학 입문서로 매우 괜찮았다. 논리주의, 형식주의, 직관주의의 관점을 차례로 설명하고, 각 장이 끝날 때마다 해당 견해에 대한 비판을 살펴본다. 역자인 최원배 교수는 믿을 만한 분이지만, 역자 서문에서 밝혀 놓았듯 형식주의와 직관주의에 대해서는 (역자 본인 기준에서) 자세히 아는 바가 없어 올바른 번역인지 자신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치만 수학철학 분야는 번역된 게 별로 없고 그마저도 대부분 절판이라 사실 선택지가 이거 말곤 별로 없는 실정이다. 그 외에는 이 책의 특징이라기보다는 그냥 수학철학의 특징이라 별로 써 넣을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