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마, 아이야
응구기 와 시옹오 지음, 황가한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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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무심히 길 가던 내 발길을 붙든, 아이를 가진 이라면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을 수 없는 저 말을 곱씹으면서 '마을'로 대변되는 무수히 많은 것들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어째서, 이렇게 가슴이 먹먹할까.

  이 책은 영국의 식민치하에 놓인 케냐에서 자라는 아이, 은조로게와 그 가족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차마 개인이 어찌해볼 수 없는 시대 속에 살아야 했던 케냐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책의 배경은 두 번의 세계대전 후 영국의 식민치하에 놓인 케냐로, 케냐가 식민지화 되는 과정을 케냐인의 시선으로 서술한 점이 무척 인상적이다.

  「백인들은 왜 싸워야 했을까? 아아! 이 사람들이 무슨 행동을 할지 예측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들 모두가 백인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독극물, 불, 한 고장을 파괴하는 큰 폭탄으로 서로를 죽였다. 심지어 서로 죽이는 것을 도와줄 사람들까지 불러왔다. 영문 모를 일이었다. -p15」

  「전쟁이 끝났다. 다들 지쳐 있었어.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왔지만 뭐가 됐든, 영국인들이 우리에게 줄 보상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지.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달래어 곡식을 키우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길 원했다. 하지만 응오! 땅은 사라지고 없었어. -p42」

  그는 그들이 어떻게 땅을 빼앗겼는지 이야기했다. 성경과 칼을 통해서였다고 말했다. -p85」

 

   그들의 땅은 더이상 그들의 것이 아니라고 어느날 문득 '선언'됨으로써 정말 그렇게 '되어버린다.' 극적인 어떠한 사건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리저리 휘둘리고 보니 어느 날 문득 그렇게 되어있더라는, 어리둥절하기만 한 현실. 맥이 빠질만큼 허무한 그들의 식민지화 과정은 케냐인들의 무지에 가까운 순수함과 맞물려 식민지의 폭력을 배가시킨다.

​   식민치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만큼 유독 땅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영토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땅이라는 것이 가진 상징적이고 절대적 가치를 책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땅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 부자로 간주되었다. 어떤 사람한테 돈과 자동차가 아무리 많아도 땅이 없으면 절대 부자로 쳐주지 않았다.-p34」

   그리고 이러한 배경 하에, 필연적으로 땅을 잃은 아버지와 그 땅을 쟁취한 아버지, 은조로게의 아버지 응고토와 영국인 지주 하울랜드가 등장하게 된다.

  "이 세상은 교육이 전부야." 응고토가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땅이 전부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교육이 중요한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잃어버린 땅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p60」

그는 1차 세계대전의 산물이었다. 고향에서 안전하게만 살아오다가 갑자기 징집영장을 받고는 전쟁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젋은 혈기로 참전했다. 하지만 유혈과 끔찍한 파괴로 얼룩진 4년 후, 다른 많은 젊은이들처럼 '평화'에 완전히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벗어나갸 했다. 동아프리카는 좋은 곳이었다. 여기에는 정복해야 할 널찍한 황무지가 남아 있었다.-p48」

​  「두 남자 모두 이 샴바(*소규모 농지)를 경애했다. 응고토는 이 땅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을 느겼다. 자기 집안의 죽은 자, 산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을 대신하여 이 샴바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울랜즈씨는 농장을 쭉 돌아볼 때마다 항상 어느 정도의 승리감을 느겼다. 그가 순전히 혼자 힘으로 이 거친 황부지를 길들였기 때문이었다. -p50」

    판에 박은 듯 닮은 두 사람 - 전쟁으로 아들을 잃었고 땅을 숭배한다는 공통점을 가진- 을 통해, 그리고 '땅'이라는 하나의 대상을 통해, 이를 바라보는 전혀 다른 두 가치관과 상반된 시선이 드러난다. 땅을 빼앗겼다는 것이 단순히 영토의 찬탈 뿐만 아니라 가치관과 목적의 상실을 상징한다는 것을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다.

 

​  「응고토는 전쟁이 자신에게 가혹했다고 느겼다. 한 아들은 빼았겼고, 이제는 나머지 한 녀석이 그를 비난하고 있었다! -p61」

  「백인들과 세리칼리(*정부) ​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파업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흑인들이 겁쟁이도, 노예도 아니라는 사실을 정부와 정착민들에게 보여줘야 했다. 흑인들에게도 먹이고 교육시켜야 할 자식들이 있었다. 어떻게 계속 백인들의 자식들만 잘 먹고, 잘 입고, 잘 배우도록 일할 수 있단 말인가? -p77」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른들은 행동에 나서게 되고, 파업이라는 비폭력 저항은 폭력으로 제압되며 실패한다. 하지만 이로써 무력저항이 시작되고, 폭력의 악순환과 광기어린 살육이 횡횡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 속에서 자라는 바르고 신실한 아이의 모습은 어쩐지 위태롭고 이질적이다.

  「그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진짜 삶이었다. 남자건 여자건 "이봐, 나한테는 이 고장의 어느 누구 못지않게 착하고 교육도 많이 받은 아들이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가난하게 죽어도 상관없었다.-p29」

​  「학교는 낯선 곳이었다. 하지만 매혹적이었다. 그는 크고 허허로운 교회에 마음이 끌렸다. 그곳은 꼭 귀신이 나올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곳이 '신의 집'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남자애들은 그 안에 있을 때 소리를 질렀다. 이 또한 그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어려서부터 묘지나 무화과나무 주위의 덤불 같은 모든 신성한 장소를 존중하라고 배우며 자랐기 때문이었다. -p27 」

  「은조로게는 때때로 모든 곳이 여기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작은 낙원, 계급과 종요가 서로 다른 아이들이 그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함께 생활할 수 있는 낙원이었다. -p163」

   여느 아이가 그러하듯, 교육에 대한 부모의 믿음 속에 학교를 다니며 사회에 도움이 되는 훌륭한 어른을 꿈꿨던 은조로게는 무력저항을 시작한 형 때문에 끌려가 고문을 받게 되고 파업에 나섰던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듯 거세된다. 거세를 통해 사회로의 진출이 차단 된, 더 이상 성장 할 수 없는 은조로게는 죽음을 시도하고, 그를 붙잡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찾아 나선 어머니가 부셔온 꺼질 듯한 횟불과 그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다. 스스로를 겁쟁이라 말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그를 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살아남는 것에서 시작되는 거라는 자조섞인 위안을 하게 된다. 지켜야 할 가족이 있고, 살아내야 할 시대가 있으므로.

​   처음 책을 집어들었을 때 제목이 왜 이럴까 궁금했었는데 시대의 광기와 야만이, 아귀같이 허기롭기만 한 그 욕망이, 결국 한 아이를 집어삼켜 버리는 이야기를 읽으며 <울지마, 아이야>라고 은조로게에게 말해줘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읽는 내내 <수난 이대>가 떠오르는 책이었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수난의 반복이라는 모티프도 그러하거니와 그 안에 담겨있는 정서가 놀랍도록 유사해 어쩐지 우리네 이야기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프리카 문학은 생소하지만 낯설지 않았다. 가슴이 먹먹하기도 하고 목이 메기도 하고 아주 오랫동안 잔상이 남는 그런 이야기였다. 개인적으로 읽어도 좋지만, 독서모임이나 토론에서 함께 이야기 나누기에 더없이 좋은 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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