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이형기 지음 / 문학세계사 / 199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살아 생전

가장 소중한 생명이었기에 그는

어둠 속에서

꺼진 그 불길의 향방을 지켜보았다

--- 이제 세상에는

엄청난 변화가 올 거다 틀림없이

그러나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해는 여전히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형제들한테서도 그는

사흘만에 잊혀져 버렸다

죽음보다 허망한

이 차가운 기류를 타고

휴지로 날리는 부고 한 장

 

시집 <절벽>에는 죽음에 대한 시들이 많다. 1998년 시집을 발표할 당시 오랜 투병 생활 속에서 쓰여진 시였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고인(2005년 작고)이 됐지만 시인에게도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순간임에 틀림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시에는 시인이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오롯이 담겨있다.  

 

극단적인 말일지 모르지만, 지금 세계 그 어느 곳에도 시집을 발간하려 하지 않고 시를 읽으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찍이 찬란했던 시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혹 시집을 들고 다니면서 읽는 사람이 있다면 별종으로 취급된다. 그래도 우리나라에는 시를 읽는 사람이 유달리 많다고 한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평론가조차도 의아해한다. 시를 읽는다고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시를 읽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

 

<절벽>에는 독특하게 시와 함께 "시를 위한 아포리즘"으로 구성돼 있다. '불꽃 속의 싸락눈'이라는 제목의 "시에 대한 아포리즘"은 이형기 시인의 시사랑을 느낄 수 있다.

 

슬퍼할 수밖에 없는 일이 이 세상에는 적지 않다. 그때는 슬퍼해봐도 물론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슬퍼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슬픔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슬픔은 가장 순수하고 따라서 값지다.

 

유적의 도시 로마에는 외국 관광객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치기배와 사기꾼과 바가지상인들이 들끓고 있다. 그리고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피해를 본다. 그래서 톡톡히 당한 어느 관광객이 가해자를 붙들고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고 화를 냈더니, 그자는 태연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대는 이만 일도 당하지 않고 찬란한 로마의 유적을 공짜로 구경할 셈이었는가?" 말인즉 맞다. 요즘 시는 알 수 없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이 에피소드를 상기한다. 지금 읽은 시를 이해하기 위해 그대는 얼마만큼 값을 치르었는가. 누워서 떡먹듯 그렇게 쉽게 시를 이해하려고 드는 것은 로마를 공짜로 구경하겠다는 생각보다 더 뻔뻔스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