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처럼오빠내
이 내려오도록 삐라를 뿌렸다. 아이들과 노인을 등뒤로 숨기고,
총에 맞지 않기 위해 흰 수건을 나뭇가지에 묶어 들고 내려오는짱마른 남녀들의 행렬이 자료사진으로 실려 있었다.
처벌하지 않겠다던 약속과 달리 수천 명이 체포됐는데, 천운으로 풀려난 친척이 당숙네로 찾아왔대. 주정공장 뒤에 있는 십여동고구마 창고에 사람들이 갇혀 있다고, 외삼촌과 같은 동에 두달 동안 있었다고 말해주려고. 그날 밤 엄마와 이모는 기뻐서 잠을 못 이뤘다. 어쨌든 오빠가 죽지 않은 걸 알게 됐으니까.
친척이 쪽지에 써준 요일과 시간에 맞춰 두 자매가 주정공장으로 찾아갔어. 약도에 표시된 대로 창고 뒤 언덕 모퉁이에서 기다리니까 청년 여덟이 줄을 지어 식수통을 지고 올라왔다. 그중 맨뒤에 있던 사람이 외삼촌이었어. 오래 굶주려선지 더 작아진 체구에 머리가 부석부석 헝클어지고, 늘 장난기 있던 특유의 표정이사라져서 낯설게 느껴졌다.
양쪽에서 안기는 동생들을 마주 안지 않고 멍하게 서 있는 외삼촌한테, 인솔을 맡은 듯 어깨에 흰 띠를 두른 젊은 남자가 말했다.
눈감아줄 테니 물길어올 때까지만 이야기하고 있으라고. 그 사람들이 돌아올 때까지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는데, 그때 엄마는 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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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열람실 창문의 블라인드 틈으로 들어오던 육년 전 겨울햇빛이 그때 내 눈앞에 떠오른다. 이 섬의 마을 단위 구술 증언들을 과감히 건너뛴 날, 두 권의 책을 골라 들고 복도 끝 간이 책상에 앉아 본 빛이었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석 달 동안 중산간이 불타고 민간인 삼만 명이 살해된 과정을 그 오후에 읽었다. 무장대 백여 명의 은거지를 알아내지 못한 채 초토화작전이 일단락된 1949년 봄, 이만 명가량의 민간인들이 한라산에 가족 단위로숨어 있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즉결심판이 이뤄지는 해안으로 내려가는 것이 굶주림과 추위보다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3월에 임명된 사령관은 빗질하듯 한라산을 쓸어 공비를 소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효율적인 작전 수행을 위해 먼저 민간인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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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 그 시국 때는 흉년에다가 젖먹이까지 딸려 있으니까, 내가 안 먹어 젖이 안 나오면 새끼가 죽을 형편이니 할 수 없이 닥치는 대로 먹었지요. 하지만 살만해진 다음부더는 이날까지 한 점도 안 먹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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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그 신문을 접어서 배낭에 넣었어. 집에 돌아가 짐을 풀면서는 사진만 오려 책상 앞서랍에 넣었어. 밤에 꺼내 보기엔 잔인한 사진이어서, 햇빛이 밝은 오후에만 서랍을 열고 들여다보다 닫았어. 겨울이 되면서는 흉내내듯 책상 아래 모로 누워 무릎을 구부려보기도 했어.
이상한 건, 그러고 있으면 어느 순간 방의 온도가 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던 거야. 겨울 볕이 깊게 들거나 온돌 바닥이 데워져서 퍼지는 온기와는 달랐어. 따스한 기체의 덩어리 같은 게 방을채우는 게 느껴졌어. 솜이나 깃털, 아기들 살을 만지고 나면 손에 부드러움이 남잖아. 그 감각을 압착해서 증류하면 번질 것 같...... - P212

가물거리는 촛불의 음영 때문에, 인선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인지 빛과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뿐인지 구별할 수 없다.
그럼, 군이 데려간 사람들은?
P읍에 있는 국민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12월에 모두 총살됐어.
모두?
군경 직계가족을 제외한 모두.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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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다.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 P134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그녀는 주전자에 생수를 부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제목을 묻지 않았어.
나는 대답했다.었다.
작별하지 않는다.
주전자와 머그잔 두 개를 양손에 들고 걸어오며 인선이 되되었다. 작별하지 않는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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