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박각시
줄리 에스테브 지음, 이해연 옮김 / 잔(도서출판)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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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욕망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비록 옳고 분명한 사실이라고 해도 반드시 정해진 정답은 없으며 사람과 상황에 따라 적합한 해답을 찾아야 하는 현대사회에서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는 이 구절이 마음과 몸의 연관성을 말한다고 한다. 감정과 욕망을 다스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달콤한 유희를 위해 나방이 된 롤라.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나비가 되지 못한 나방을 생각했다.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크기가 작은 새, 벌새라고 생각했던 꼬리박각시를 본 적이 있다. 한국벌새로 알려진 꼬리박각시는 꽃에 앉지 않고서도 정지상태로 꽃의 깊숙한 꿀샘에 긴 빨대를 꽂아 꿀을 빨아 먹는 재주를 지니고 있다. 나비도 아니고 벌새도 아닌 꼬리박각시는 꿀을 빠는 빨대는 나비의 빨대를 닮고, 날개는 벌새의 날개를 닮고 꼬리는 붕어의 꼬리지느러미를 닮은 희귀한 나방이다. 자리이동이 너무나도 빠르므로 정확한 모습을 보기 어려서인지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을 닮아 있었다. 나방은 칙칙한 겉모습과 야행성의 습성 때문인지 사촌격인 나비와는 너무나 차이나는 평가를 받는다.




롤라를 따라 어둠이 내린 파리 곳곳을 휘청거리며 걸어다닐 것이다. 몽수리공원과 센강, 마라보다리, 시테섬, 콩시에르주리, 뤽상부르공원, 튈르리정원 그리고 파리 교외 팡탱의 선술집과 파테우스 로팍 컨템퍼리리 아트 갤러리, 생제르맹앙레의 옛날 유원지 같은 놀이공원까지. 작가는 “파리의 아름다움이 그녀를 아프게 한다”라고 했다. 상처 입은 외로운 사람에게 도시의 아름다움은 아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더구나 파리는 관광객들의 SNS사진처럼 아름다운 곳만 잇는 게 아니다. 지저분한 지하철, 우범 지역, 관광객에게 꽃을 파는 남자, 적포도주를 발치에 두고 잠든 부랑자 등 “파리는 지독하게 외로운 사람들을 집어삼켰다가 경고장처럼 거리에 다시 토해 놓는다.”



‘동전을 십 년 동안 굴린 과부의 고백을 통해서 죽는 것보다 과부가 되어 수절하는 것이 더 어렵다.’ 연암박지원은 <열녀전>을 통해서 조선사회의 모순된 제도에 의해 고통받았던 여인들의 한을 세상에 고발했다.

오늘의 여인들이여. 우리 어머니들이 겪었던 고충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아기가 결코 아니다.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불륜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사회가 오늘의 사회가 되었다. 옛날로 돌아가자는 얘기는 아니다. 불륜의 사회에서 또는 향락의 사회에서, 사치와 방종의 사회에서 우리는 파리의 민낯을 읽을 수 있다. 성의 개방사회를 그릇된 사회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개방사회라고 해서 분별력을 잃어서야 하겠는가. 롤라가 느끼는 또 다른 어떤 불편함이 그를 거리로 내몰고 있을까




나는 폭력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보다 더 근본적인 권력 관계라는 인식을 이 책을 통해서 하게 되었다. 가부장적 남성 문화는 자기가 '정복한' 여성은 구타해도 된다는 약속했다. 오랫동안 남성과 여성의 섹스는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고 소유되는 절차였다. 현실의 심각함에 비추어 보면 너무나 얇고 낮고 가볍다. 우리의 일상은 아주 친밀한 폭력에 익숙해져 이 부분을 알게 된 것이다. 가정 폭력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많은 피해자가 발생하는 폭력이다. 그러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과 관련된 이런 문제나 언제나 사적인 문제로 취급되는 편견에서 롤라는 밤이 되면 나방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나는 오히려 성(차)별 제도에 의한 가족내 남여의 차별적 지위와 그에 따른 성 역할 규범은 그대로 둔 채 억압이 가해지는 현실을 알리러 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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