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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회장의 그림창고
이은 지음 / 고즈넉 / 2011년 11월
평점 :
태어나서 시종 이렇게 웃으면서 읽었던 소설책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TV 프로그램이나 영화라면 모를까 문자로 이어진 소설책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 편견을 어지없이 무너트렸다.
재벌 그룹인 세계그룹 회장이 차기 대권 후보인 여당 대표한테 뇌물로 건네는 그림이 도난당한다. 그것도 차치기를 하다가 그림 상자를 과자 상자인줄 알고 훔쳐간 멍청한 좀도둑에게서 말이다. 게다가 그 그림은 돈세탁용으로 구입한 그림. 이 사건 하나로 '여러 명'이 뒤집어 진다. 뇌물을 주려던 세계그룹의 박회장과 그 아들들, 세계미술관 관장 이사벨, 그 그림을 훔치려고 했던 명화절도단 피카소파, 그리고 뭣도 모르고 폭탄을 훔쳐갖고 온 좀도둑의 동거녀 김소미. 뿐만 아니라 이 일에는 엉뚱하게(?) 사채업자 양아치와 세계그룹과 절친한 은갈치파라는 조폭이 개입되게 된다.
그 때부터 소설은 김소미가 주인공이 되어 여러명의 사람들이 쫒고 쫒기는, 속고 속이는, 치고박는, 대 소동이 벌어진다. 그 과정이 너무나 다이나믹하고 코믹하다. 게다가 각각의 캐릭터들이 독특하다못해 때로는 엽기적이어서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성깔로 치자면 둘째가면 서러울 세계그룹 박노수 회장, 박회장의 개망나니 두 아들, 프랑스 시를 무척 좋아하는(?) 이사벨, 참으로 너저분하고 변태적인 은갈치파 두목, 자뻑과인 피카소파 두목, 나중에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건에 괴상하게 말려들어가는 양아치......
그러나 그렇게 마냥 웃으며 소설의 절반을 넘길 때쯤 이 소설이 결코 만만치 않은 내용임을 알게 된다. 소설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재벌 그룹들과 그 그룹과 얽힌 사회적 사건들, 특히 미술품 돈세탁에 대한 내용이 패러디돼 심도 있게 깔려 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은 사건의 한 복판에 휘말려 간 전형적인 서민의 자화상인 김소미를 통해 통렬한 비판이 가해진다. 그러면서도 이 소설의 미덕은 상투적인 '정의'나 '도덕'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깜짝 반전을 통해 미술을 전공한 저자가, 미술을 전공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신선한 마무리로 종결된다.
정말 간만에 읽은 코믹하고 유쾌한 풍자소설이다. 묵직한 주제 의식을 쉽게 풀어나갔고, 그러면서도 핵심은 놓치지 않았다. 마지막 세계미술관에서 그 많은 등장인물이 모두 뒤엉키는 난리판이 이 소설의 백미! 더욱이 짧지만 무척 강렬하게 다가오는 에필로그도 쉽게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