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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고마워." 나오코의 편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 몇 줄을 읽은 것만으로 내 주위의 현실 세계가 스윽 그 색이 바랜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쉬고 계속 읽어 내려갔다. "여기 온 지도 벌써 넉 달이나 지났네." 나오코는 그렇게 이어 갔다. "그 넉 달 동안 너에 대해 많이 생각해 봤어. 그리고 생각할수록 내가 너에게 공정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어. 나는 너에게 제대로 된 인간으로서 공정하게 행동해야 했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이런 생각도 그리 올바른 것이 아닐지 몰라. 왜냐하면 나 정도 나이의 여자애라면 결코 ‘공정‘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만 지금 나에게는 이 ‘공정‘이라는 말이 아주 꼭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튼 난 내가 너에게 공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그런 태도로 널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상처를 주었던 것 같아. 그렇지만 그러는 가운데 나 스스로도 방황했고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어. 만일 내가 너의 내면에 어떤 상처를 남겼다면 그것은 너만의 상처가 아니라 나의 상처이기도 해. 그러니까 그 때문에 날 미워하진 마. 나는 불완전한 인간이야. 네 생각보다 훨씬 더 불완전한 인간이야. 그래서 더욱 네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 네게 미움을 받는다면 난 정말 산산이 부서져 버릴 거야. 난 과거에 비해 많이 회복한 듯한 느낌이 들고 주위 사람들도 그렇게 인정해 줘. 이렇게 안정된 마음으로 편지를 써 보는 것도 정말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7월에 네게 보낸 편지는 피가 말라 버리는 듯한 고통 속에서 썼지만(솔직히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 기억도 떠오르지 않아. 아주 말도 안 되는 편지가 아니었을까?) 지금은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써.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아. 때로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곤 해. 만일 나와 네가 아주 정상적이고 평범한 상황에서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내가 정상적이고 너도 정상적이고(애당초 정상적이지만) 그리고 기즈키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지만 이 만약이 너무도 크네. 사정이 허락할 때 한번 와 줘.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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