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하지 않게 사는 법 - 인생을 편안하게 즐기며 사는 육조단경의 지혜
페이융 지음, 허유영 옮김 / 유노북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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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하지 않게 사는 법



오랫동안 길들어 있던 궤도를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처한 상황이 불만스러워도 막상 단념하고 떠나려고 하면 그로 말미암아 잃게 되는 것들 때문에 근심스러워서 결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그때문에 많은 사람이 일생을 불안, 우울, 회한 속에서 살아간다


솔직함은 가장 아름다운 처세술이다. 우리가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산다면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자신을 꾸밀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일상 속에서 혼란스럽거나 고민에 빠지는 이유는 거의 대부분 여러 선입견에 얽매여 있으면서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이는 허상이다. 세상 모든 것에는 동일성과 보편성이 있다. 그 보편성을 깨닫지 못하고 차이만을 바라볼 때 우리는 불안과 혼란에 휩싸여 번뇌한다


불안과 혼란에 휩싸여 번뇌한다면
세상 모든 것에는
차이가 있음을 받아들인 뒤
거기서 보편성을 발견하라.


바로 지금, 아무 망설임도 조건도 없이, 외부 힘을 빌리지 않고 자기 영혼으로 돌아가라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없어 고통스럽다면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것처럼
무언가를 얻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잃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어떻게 하면 마음속 걱정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겉으로 말하라.
하기 싫으면 하기 싫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말하라.


인생의 즐거움을 맛보고 싶다면 실천해 보라.
매일 집에 돌아와 먼지떨이로 먼지를 떨어내 보라.
땅에 떨어진 휴지를 주워 휴지통에 넣어 보라.
일상의 사소한 일 속에 미묘한 의미가 숨어 있다.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앉아서 천천히 불경을 읽거나 베껴 쓰는 것이다. 《금강경》도 좋고 《법화경》도 좋다. 천천히 읽거나 한 자 한 자 베껴 쓰면 된다.
경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어도 상관없다. 차분히 읽거나 쓰기만 하면 된다. 수많은 세월을 전해 내려온 경문 속에 담긴 이야기와 가르침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에 깃들 것이다.


지금부터 남을 험담하지 않는 것을 실천해 보자. 아주 작은 일이지만 계속 실천하면 인간관계가 완전히 바뀔 것이다


산다는 것은 허울뿐인 말 위에 사는 것도 아니고, 허무한 이론 위에서 사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바로 지금 생생한 이 순간을 살고 있고, 지금 우리가 하는 행동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면 작은 말과 행동에서 시작해야 한다


불안하고 즐겁지 않아 앞날이 암담하게 느껴진다면
작지만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일을 해 보라.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면
작은 말과 행동으로 시작해 보라.


행복한 사람은 풍경 바라보듯 인생을 대하고, 우울한 사람은 마라톤 경주하듯 인생을 살아간다


옛날 먼바다 위에 작고 아름다운 섬이 있었다. 그 섬에는 책 한 권이 있었는데 누구든 그걸 손에 넣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 섬으로 가는 길에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서 수많은 영웅이 그 책을 가지러 가다가 목숨을 잃었다. 마침내 한 영웅이 천신만고 끝에 그 섬에 도착해 책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책을 펼쳐 보니 모든 페이지가 거울로 되어 있었다. 어떤 페이지를 펼치든 자기 얼굴이 비추어 보였다. 숱한 역경 끝에 얻은 진리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라는 단순한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다른 누구도 말고 오직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


어째서 자기 마음으로 돌아가야 할까?
현재도 미래도 영원하고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은
오직 마음뿐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참 이상한 존재다. 평생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하면서도 바로 자기 눈앞, 자기 마음속에 있는 작은 행복은 쉽게 간과하거나 옆으로 밀어 둔 채 멀리 있는 것을 찾아 헤매니 말이다.


조주선사가 여든에도 도를 찾아 곳곳을 돌아다녔으나
마음속 번뇌가 사라지지 않았는데
돌아와 할 일 생각 없어지고 나서야
짚신에 헛돈 쓴 것을 알았다네


남에게 희망을 걸고, 남이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면, 자기 생활을 남에게 맡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타인은 우리가 좌지우지할 수 없다.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뿐이다.
그러므로 자기 생활을 스스로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걱정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고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안하고 우울해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편안한 마음으로 하면 된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신경 쓸 필요도 없다.


“행복은 남이 문을 두드릴 때 당신이 그를 위해 문을 열어 주는 것이다.”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
불안하고 우울하다면
어떻게 대하는지는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라.


거리를 지나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이 제각각 다른 옷을 입고, 저마다 다른 위치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눈에 보이겠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을 배제하고 바로 이 순간 생명의 생동적 자태만 바라보자. 시간과 장소, 누구인가에 따라 그 모습이 모두 다르지만 가장 궁극적 차원으로 올라가 생명 그 본모습을 본다면 그 어떤 구분도 모두 무의미해진다.


“없다 함은 무엇이 없다는 것이고 생각함이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없다 함은 상 두 가지가 없는 것이니 모든 번거로운 망상이 없는 것이며, 생각함이란 본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오직 본성만 생각한다는 의미다.


즉, 무념이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분별심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차가움과 뜨거움의 구분을 초월한다면 무더위에도 짜증이 나지 않는다. 더움을 느끼지만 또 그것은 일종의 상태이자 감각일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들을 배제하고
생명의 생동적 자태만 바라보라.


인간 세상의 소란스러운 다툼은 대개 개인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서 시작된다. 오직 자기의 생각을 사물과 현상의 본모습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타인 의견을 용납하지 못한다.


관세음보살은 어떤 ‘관점’이든 다 떨치고 사물이 본모습으로 돌아간 상태를 생각하며 “모든 사물이 공(空)이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이 한마디로 인간 세상에 있는 중생들을 끝없이 광활한 우주로 데려다 놓았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런 사람들이 있다. 그가 어디서 왔고 예전에 무엇을 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느 곳에 살든 누구와도 원만하게 잘 어울린다. 마치 고고한 학이 잠시 머물기 위해 이곳에 온 것처럼 무엇을 하든 온화하고 자연스럽다


점잖고 차분한 말투는 성급하게 판단하거나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 진중함의 표현이 된다.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면 무엇이 보이는가? 하늘, 대지, 거리, 사람들, 숲······. 이런 것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얼굴, 길 건너에 서 있는 나무 개수, 오늘 책에서 읽은 재미있는 말······. 이 세상은 그만큼 넓고 이곳에는 수많은 것이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들은 내버려 두고 자신을 괴롭게 만들고, 무언가를 분별하고 시비를 따지는 이야기만 한다. 입만 열면 공허하고 비관하는 얘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말할 때 ‘나’라는 주어를 없애 보자. ‘나’라는 주어가 장애물이 되어 자신을 어딘가에 가두고 번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원래 진정한 말에는 인칭이 없는 법이다.


진리는 그저 거기에 조용히 있다. 우리가 그걸 말해도 되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것은 말하느냐 침묵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마음으로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느냐 하는 사실이다.


무엇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기교가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모든 것을 평등하게 바라보면
저절로 좋은 말을 할 수 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 화나거나 흥분되는 일을 떠올리면 더 잠이 오지 않는다. 빨리 자야 한다는 사실에만 집중해도 마찬가지다. 자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잊어버리라. 아무 목표가 없는 상태로 생명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마음을 맡겨야 한다. 잠이 와도 좋고 잠이 오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으로 그 순간에 충실하며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때 자기도 모르게 잠들게 된다.


마음속에 깨달음이 있다면 출가했든 출가하지 않았든 깨달은 사람이고, 우매한 사람은 절에서 살든 집에서 살든 우매한 사람이다.


‘관조’란 무엇일까?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화났다면 화내면 된다. 일부러 분노를 눌러 삼킬 필요는 없다. 하지만 분노가 자신을 완전히 매몰하도록 만들어서도 안 된다. 자신이 화났다는 것을 알고 그 분노를 바라보고, 분노가 갑자기 솟구쳤다가 천천히 사그라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어떤 감정이든 두렵지 않다. 어떤 감정이든 생겨났을 때 억지로 막지 말고 차분히 지켜보면 된다. 차분히 지켜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자신을 관조하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다면 어떤 감정이나 상황에 갇혀 꼼짝도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진정한 해탈이란 수행하고 있을 때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해탈을 얻었다면 언제 어디서든, 잠을 자고 있을 때든, 밥을 먹고 있을 때든, 역경이 닥쳤을 때든, 일이 순조로울 때든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다.


깊은 뜻을 깨닫고 싶다면
가만히 들여다보며 음미하라.
자신과 환경, 자신과 존재가 하나로 융합되는 순간
가장 완벽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자고 싶다면 자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잊으라.
아무 목표가 없는 상태로
생명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마음을 맡겨야
비로소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변한다. 머릿속에 악한 생각이 가득 찬 사람은 그가 있는 곳이 지옥이 되고, 머릿속에 선한 생각만 있으면 그가 있는 곳이 천당이 된다. 남을 해치도록 행동하면 짐승이 되고 자비롭게 행동하면 보살이 된다. 그러므로 자신이 스스로를 구도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천백억화신불에 귀의하는 것이다.

요컨대 부처에게 귀의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에게 귀의하는 것이자, 자기 본성에 귀의하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고 변한다.
나쁜 일을 생각하면 나쁜 일을 하게 되고
선한 일을 생각하면 선한 일을 하게 된다.

지식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정보와 가공되지 않은 소재이고, 지혜는 현상을 통해 본질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다. 아는 것은 많지만 평생 지식을 습득하는 데만 몰두해 훌륭한 인격을 갖추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글이라는 틀에 얽매여 더 아름답고 활기찬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마음으로 그 세상을 듣고 보고 생각해야 한다.

밖에서 진리를 추구하려고 하면
곳곳이 잡초 덤불이지만
자기 안에서 구한다면
한 발만 나가도 풀이 없는 곳이다.

진흙 인형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 본성은 진흙으로 빚어낼 수 없기에
단지 외형이 똑같다고 해서는
진흙 인형을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당나라 때 천연선사가 겨울에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나무 불상을 내려다가 불을 피웠다. 절의 주지승이 그것을 보고 꾸짖자 그가 말했다.

사리를 얻기 위해 불상을 태운 것입니다.”
 
주지승이 말했다.
 
“나무로 된 불상에 어찌 사리가 있겠는가?”
 
그러자 천연선사가 말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저를 꾸짖으십니까?”
 
그가 태운 것은 그저 나무토막에 불과했던 것이다.


형태가 있는 것들은
인연과 깨달음 정도에 따라 다를 뿐
공통된 본성이 있다.
따라서 위대함과 평범함의 차이가 없다.

“달마조사의 말씀이 옳다. 무제의 마음에 그것으로 복을 받으려는 사심이 있었다. 공덕은 자기 마음속에서 구하는 것이다. 공덕을 어찌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얻겠느냐? 자기 본성을 보는 것이 ‘공’이요, 평등함이 ‘덕’이니, 생각에 막힘이 없고 항상 본성의 진실함을 보여 주는 것을 공덕이라고 한다.”

모든 생각과 마음이 끊어지지 않고 자기 본성에서 멀어지지 않는 것을 공이라 하고, 마음이 한결같고 마음과 행동이 솔직하고 정직한 것을 덕이라고 한다는 뜻이다.

우리 마음이 허공과 같을 수 있다면, 개인적 부와 명예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이 아니라 바깥 사람들과 자연을 바라볼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자비와 사랑을 보여 줄 수 있고 이익을 둘러싼 다툼에서도 너그럽게 양보할 수 있으며 모든 적에게 관용과 인내를 베풀 수 있다. 또 무엇을 맞닥뜨리든 흔들림 없이 대할 수 있고 세상이 아무리 소란해도 고요함을 듣고 평온해질 수 있다

“흔들리는 것은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있다. 욕망을 해결하고 싶다면 그 욕망을 계속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어야 하고, 해탈을 얻고 싶다면 육신 수련이 아니라 영혼의 깨달음에 힘써야 한다.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자기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흔들리는 것은 그대의 마음이다.”라는 말의 진정한 뜻은 외부 현상에 얽매이거나 외부의 것에 자기감정을 휘둘리지 말고, 자기 본모습으로 돌아가서 자기 마음이 주체가 되도록 하라는 뜻이다.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을 대하는 우리의 해석이다.

남종 종심선사가 문원이 불당에서 절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막대기로 때리며 물었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
 
문원이 대답했다.
 
“부처님께 절하고 있습니다.”
 
“절은 해서 무엇하느냐?”
 
“부처님께 절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좋은 일도 일이 없는 것보다 못하느니라.”
 
마음으로 철저히 깨닫지 못하면 좋은 일이 나쁜 일보다 더 마음의 평정을 해쳐 우리가 인생의 본모습을 보지 못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처가 무엇을 도와줄 수 있겠는가

“무엇이 너를 옭아매고 있느냐?”
 
도신선사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그 뜻을 깨달았다.
그렇다. 누가 당신을 옭아매고 있는가? 우리는 처음부터 자유로운 해탈의 상태였다.
곤경이 우리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옭아매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일, 가정,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과 일, 원치 않는 불행에 둘러싸여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자기 내면의 본성으로 돌아간다면 자신을 꽁꽁 묶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올가미가 사실은 작은 깨달음만으로도 훨훨 떨쳐 낼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은 원래 그곳에 있었다. 길가의 집도, 나무도, 강도, 찻잔도 모두 거기에 있었다.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그 속에 숨은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얻으면 기뻐하고, 잃으면 고통스러워한다. ‘마음이 한없이 넓다’는 혜능의 말은 우리가 시야를 넓혀야 한다는 의미다. 세상은 한없이 광활한데 우리는 그것을 잊은 채 작은 득실에 연연하고 있다.
복작대는 생활에서 벗어나 세상을 둘러보면 그곳에 드넓은 하늘과 대지가 펼쳐져 있다. 시야를 넓히고 한없이 넓은 세상을 바라보면 일상의 잡다한 일이 더 이상 우리 영혼을 갉아먹지 못한다. 시야를 넓히고 시선을 멀리 두고 먼 곳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속세를 바라보면 모든 것이 아주 작고 희미해진다.
거기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자신을 무한한 세상과 융화시키면, 몸도 원래 몸이고 일상도 원래 일상이지만 마음은 지금 이곳을 초월해 허공과 같은 태도로 일상을 관조할 수 있다

“허공은 본래 변하지 않는 것이다. 허공은 밝음이 왔다고 밝아지고, 어둠이 왔다고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다. 어두운 허공이 곧 밝은 허공이고, 밝은 허공이 곧 어두운 허공이다. 비록 밝음과 어둠이 각자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는 하지만 허공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번뇌와 보리(진리) 역시 같은 이치다. 깨달음과 미혹은 다르지만 보리의 본성은 변함이 없다.”
 

무념이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어차피 사람의 생각은 계속 움직인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움직이느냐 하는 것이다. 생각이 어지러운 사람은 외부 형상을 보고 헛된 생각을 한다. 마음이 어떤 사물을 인지하고 느껴도 마음이 그곳에 머무르지 않으면 무념에 도달하게 된다.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명경대라
부지런히 털어 내어 먼지가 일지 않게 하리라
 
보리는 본디 나무가 아니요, 명경 또한 대가 아니라네
본디 아무것도 없는데 어디서 먼지가 일어나리오
 
마음은 보리수요, 몸은 명경대라
명경은 본디 깨끗하니 어디에 먼지가 있으리오

평범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단순함이다.
이치는 단순한 것이지만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진정한 깨달음도 없이 좌선하고 독경하는 것은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려는 것과 같아서 그것으로는 결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근본을 깨달았다면 그것으로 이미 선정과 지혜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공의 이치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근본 이치를 깨달았는데 좌선이나 독경 같은 외적 형식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깨달음은 점진적 과정이 아니라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것이다.
 
 
마음속에 진정한 깨달음도 없이
좌선하고 독경하는 일은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려는 일과 같다.
근본 이치를 깨닫는다면 외적 형식은 필요 없다.

‘돈오’와 ‘점수(漸修)’, 즉 갑자기 깨닫는 방식과 점진적으로 깨닫는 방식

우둔한 사람을 만나면 점수의 방식으로 이끌어 주어야 하고, 예민한 사람을 만나면 돈오의 방식으로 이끌어 주어야 한다.”

혜능은 돈오든 점수든 불법이라면 모두 ‘무념(無念)’을 으뜸으로 놓고 ‘무상(無相)’을 기둥으로 세우고 ‘무주(無住)’를 뿌리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무상’이란 물론 형상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형상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바람이 불어서 깃발이 흔들리면 못 본 척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감각적으로는 형상을 없앨 수가 없다. 하지만 자신의 태도를 바꾸어 ‘공’의 마음으로 그것들을 대한다면 그것이 거기에 없는 것처럼 내 마음을 조금도 흔들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상이다. 형상을 느낄 수 있지만 또 초월할 수도 있다. 형상 자체는 거기에 있다. 바람이 불어 깃발이 흔들리는 것은 우리가 막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태도로 그것을 대하느냐에 있다. 그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대할 것인지 분노하는 마음으로 대할 것인지는 자기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무주’, 즉 한곳에 머물거나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면 그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다

무념에 도달하는 방법은 눈에 보이면 생각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면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이 어떤 사물을 인지하고 느껴도 마음이 그곳에 머무르지 않으면 된다.

형상을 느낄 수 있지만
초월할 수도 있는 상태가 ‘무상’이다.
한곳에 머물거나 집착하지 않고
그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상태가 ‘무주’다.
마음이 계속 움직이면서도
자기 본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상태가 ‘무념’이다.


보고, 듣고, 읽고, 외는 것은 하등의 구도 방법(소승)이고, 부처의 말씀과 불경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중등의 구도 방법(중승)이며,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것은 상등의 구도 방법(대승)이다. 또 모든 이치를 다 통달하고 마음에 담아 더 이상 잡념을 품지 않으며, 어떤 이치에도 구애되지 않고 아무것도 얻지 않는 것이 최상등의 구도 방법(최상승)이다. 최상등의 구도 방법은 최상등으로 행해야 한다.


때로는 진정한 질문 하나가 우리 인생을 바꿔 놓기도 한다. 종교적 깨달음이든 창의적 학설이든 과학적 발견이든 모든 것은 의문 하나에서 시작된다. 낮에는 명예와 이익을 좇으며 분주하게 살지만 깊고 조용한 밤에는 자기 자신에게 가만히 질문을 던져 보자. “왜?”, “설마?” 같은 근본적 질문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다면 지금까지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인생은 병원. 환자들은 저마다 침대를 바꾸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어떤 사람은 기왕이면 난로 옆에서 신음하기를 바라고, 어떤 사람은 창가 자리로 가면 나으리라 여긴다.”

보들레르의 말처럼 사람의 일생은 병원이다. 하지만 침대를 바꾸고 싶은 욕망은 표면적 고통일 뿐 진정한 고통은 우리가 항상 무언가를 추구하거나 지키려 한다는 사실에 있다.
 

피안은 ‘저쪽 기슭’이다. 즉, 이쪽 기슭의 맞은편이자, 이쪽 기슭과 ‘다른 세상’이다

물보라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바람을 만나든 누군가 물에 돌멩이를 던지든 외부에서 무언가에 부딪칠 때 물보라가 생긴다. 번뇌도 마찬가지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거나, 자기 것을 잃어버리거나, 어쨌든 우리 마음이 외부의 영향을 받으면 번뇌가 생긴다.
하지만 물보라가 일어도 물속은 조용하고 물의 흐름이 멈추지도 않는다. 존재의 본질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번뇌하고 있어도 모든 존재의 본질은 고요함이자, 절대적 ‘공’이다


이쪽 기슭에 단단히 발을 디딘 채 피안에 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물보라가 튀어 오를 때 그 생동감 있는 모습 속에서 변치 않는 물의 영원함을 발견해야 한다.


물보라가 일어도
물속은 조용하고 물의 흐름이 멈추지 않는다.
겉으로 번뇌하고 있어도
모든 존재의 본질은 고요하다.


“마음은 한없이 넓어서 텅 빈 허공처럼 끝없다.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자신에게 닥치는 일을 충실히 수행하라.
한 사람의 일생은 무한한 시간 속 찰나이므로
고난과 기쁨도 사실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최종적 존재는 고요함이다. 죽음은 고요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슬퍼할 것도, 기뻐할 것도 없다. 본래 태어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으므로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다

분별심 없는 본성이 진정한 부처이며 부처의 경지에 다다르고 싶다면 밖에서 찾지 말고, 남에게 의지하지도 말고, 자기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몸이 함께 있는 것은
한때이지만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 그대의 본모습은 무엇인가?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으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때가 바로 나의 본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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