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사형 -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극단의 형벌 - 사형의 비인간성에 대한 인간적 성찰
스콧 터로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난 개인적으로 사형제도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결정이거나 쉬운 판단이 아니다. 이유는 사형제도의 비인간성에 대한 단순한 동정심의 발로던 아니면 국가가 존엄성을 가진 한 생명에 대해 판단할 권리가 없다는 논리적인 판단의 귀결이든 이 문제가 한 인간의 삶의 자세와 가치관 등 온갖 철학적인 질문들을 끌어내는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끔 그것이 사회과학의 범주에 드는 것이든, 인문학의 여타 범주에 속하든 간에 모든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가치판단)은 철학의 영역에 속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이보다 깊이 들어가게 되면 다른 한 측면에선 종교의 범주에 든다는 생각도 있다. 어떤 이론도 최종적인 가치판단에 있어 절대진리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내가 지나치게 상대주의적이란 비판을 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형제도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많은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법정 최고형이다. 사형제를 최초로 성문화한 법은 우리들도 세계사 시간에 배운 BC18세기경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으로 이 법전에서는 모두 25개의 범죄를 사형으로 처벌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던 홍익인간을 말하지만, 고조선 시대에 이미 "범금팔조(犯禁八條)"라하여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相殺, 以當時償殺)"는 법률이 있었음을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8조 중 3조만이 전해지는 이 법률에서 첫 번째 법률이 사형에 관한 것일 만큼 인간이 인간의 목숨을 죄값으로 요구하는 사형제도의 역사는 살인의 역사만큼이나 긴 것이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생각해보자면 사형제도 또한 매우 인간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다른 어떤 동물도 같은 종을 살해했다고 해서 이로 인해 처벌받지 않기 때문이다. 숫사자는 무리의 우두머리를 제거한 뒤 이전 우두머리의 새끼들을 모조리 물어죽인다. 이로인해 새끼를 잃은 암사자들이 집단적으로 발정을 할지언정 새롭게 무리의 우두머리가 된 숫사자를 몰아내었다는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만이 복수의 감정을 품으며, 그로인해 살인자는 살해당한다. 이에 대해 스콧 터로는 매우 솔직한 입장을 견지한다.

나는 사형에 반대하는 수많은 전통적 주장에는 별로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생명을 신성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종교적 관점을 존중하기는 했지만, 정부가 어떤 사람들의 종교적 믿음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살인이 잘못된 것이라면 국가는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단순한 원칙은 인간 행동의 복잡함을 고려하지 않는 정말 단순한 원칙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그 원칙을 받아들일 경우, 내가 필요하다고 믿는 국가의 폭력, 예컨대 전쟁이나 경찰의 살인 무기 사용도 금지해야 했다. 반면 나는 사형을 복수일 뿐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논리에도 별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앙갚음을 하는 것이야말로 범죄자를 감옥에 보내는 동기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일부러 못 본 척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이 아니고서야 미국 교도소들의 삭막한 환경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본문 49쪽>

사형이 폐지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사형이 필요악이며 폐지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 사이에서 저자는 섣부르게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것이 이 책 "극단의 형벌"이 지닌 최대의 장점이다. 사형이란 범죄자의 목숨을 끊어놓음으로써 자신의 죄과에 대해 어떤 반성도, 번뇌도 할 수 없도록 단번에 모든 것을 종료시키는 행위이다. 여기에는 사실 교도(矯導)라는 '바른 길로 인도하여 바로 잡는다'는 보기 좋은 미명조차 설 수 없는 척박한 자리이다. 내 아이가, 내 가족이, 우리 사회가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으니 그의 목숨으로 단죄토록 하라는 요구가 바로 사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형폐지론자의 주장이든, 반대론자 주장이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솔직한 복수의 요구이기도 하다. 사형제도 폐지론자의 주장이 거세질 때마다 이에 발맞춰 높아지는 목소리는 한결같다. "그렇게 비참하게 죽은 아이가 네 아이라도 사형에 반대할 수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제 폐지는 시대의 대세인 듯 싶다. 국제 앰네스티가 2003년 4월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전세계 사형제 폐지국(과거 10년간 단 한건도 사형집행을 하지 않은 나라)은 112개이며 사형제 존치국은 83개다. 1985년 이후 50여개국이 사형을 폐지했지만 이중 네팔과 필리핀, 잠비아와 파푸아 뉴기니 등 4개국은 사형제를 부활시켰다. 하지만 네팔은 이후 다시 폐지했고 나머지 3개국도 실제 사형집행은 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지난 국민의 정부 출범 직전인 1997년 12월 30일 23명의 사형수에게 사형이 집행된 뒤 현재까지 사형집행이 한 건도 없었고, 15대와 16대 국회에서 모두 사형폐지특별법안이 제출됐지만 국회통과에 실패하거나 회기 만료로 자동폐기되었다. 국제 앰네스티(나도 적은 액수를 내고 있는 회원이긴 하다)에서는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지 10년이 경과한 나라들을 대상으로 사형제 폐지 국가로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이를 추진하고 있으므로, 올해는 대한민국이 그 주요 대상국이 되었다.

그 자신이 법에 의한 사형수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26일 국제 앰네스티(AI) 기고를 통해 "우리 나라와 전 세계에서 사형제도가 없어져 민주주의가 완성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며 사형제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그의 이런 신념이 집권 당시 관철되었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사형제 폐지국가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앞서 나는 사형제도에 대한 찬반 결정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란 말을 했다. 사형제도에 반대한다는 것은 생명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일에 반대한다는 말이다. 스콧 터로의 말대로 이런 논리를 궁극적으로 펼치면 낙태 문제와 피임(혹은 자위행위금지 같은)같은 또다른 민감한 뇌관을 건드리게 된다. 오늘날 진보의 논리를 개인의 자유 신장과 보호에 있다고 했을 때, 사형제도에 대한 반대는 이른바 진보의 문제에서 서로 상충되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그것이 사형제도 존폐론에 있어 특정한 입장, 일관된 논리를 갖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물론, 종교는 이럴 때 일관된 입장을 전해줄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부 종교를 제외하곤 특히 대한민국의 종교는 국기에 대한 맹세나, 양심적 병역 거부 등에 대해서는 국가의 편에 서 있는 편이다.

스콧 터로의 "극단의 형벌"을 읽으면서 나는 머리가 엄청나게 복잡했고, 지금도 뒤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다. 극우논객으로 유명한 조갑제는 또다른 한편으론 사형반대론자였고(현재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에서 가해진 가장 많은 종류의 법적 살인(사형) 중 하나는 권위주의 통치 아래 극우적 사법당국에 의한 정치적 사법살인이었다는 것을 떠올려볼 때 더욱 그렇다. 1975년 4월 9일은 세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이 날의 유래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른바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연루자 8명의 대법원 상고 기각 판결이 내려진지 10시간 만에 신속하게 집행된 사형으로 인해 우리가 얻어낸 불명예스러운 날이었다. 그날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오늘날, 인혁당 사건은 당시 박정희 정부에 의해 조작된 사건임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고, 그들을 목매달았던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은 박물관이 되었으며, 당시 그들과 함께 했던 이들 가운데 몇몇은 오늘날 집권 여당의 핵심이 되었다.

이 책을 다 읽은 뒤에도 나는 여전히 사형제도가 복잡다단한 사안들과 연계되어 있으며, 더불어 극우논객이 사형제도 반대론자일 수도 있는, 모순이 혼돈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역사의 복잡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사형제도에 대해 반대한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어떤 한 인간이 다른 어떤 한 인간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더이상 반성할 기회도, 번뇌할 기회도 주지 않는 사형이란 극단의 형벌이 지닌 일회성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비틀즈의 유명한 노래 "Let it be"는 폴 매카트니의 어머니가 유암으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라고 하는데, 그 노랫말의 뜻은 대강 이렇다.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내가 어떤 문제에 빠져 고통스럽고 힘들 때, 그 대답은 그대로 두는 거다." 우리가 누군가의 목숨을 법의 이름으로 거두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통스러울 때, 그에 대한 대답 가운데 하나는 그들의 목숨을 그대로 두는 거다.

만약 우리가 지난 50년대에 그럴 수 있었다면, 60년대에 그럴 수 있었다면, 그리고 70년대, 80년대에 그럴 수 있었다면 우리는 법의 이름으로 민주주의의 제단에 뿌릴 피를 좀 더 줄일 수 있었을 것이고, 우리의 권위적인 법이, 졸속이었던 수사관행이, 과중한 업무량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억울한 죽음이 줄어들 수 있었을 것이다. 사형이 복수이든, 필요악이든, 현재는 민주화된 사회이므로 더이상 정치적인 이유로 사형당하는 이가 발생할 가능성이 적다고 하더라도 생명에 대한 논쟁은 앞으로도 살아있는 동안 우리들은 꾸준히 진행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죽어버린 이들에게, 곧 죽게 될지도 모를 이들에게 난자 채취는 괜찮지만 너는 죽어야 한다고 그렇게 말하지는 말자.

* 어쩌다보니 책 내용보다는 사형제도에 대한 나의 주절거림을 담은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단순히 사형제도의 역사나 유형을 들먹이는 책이 아니라 사형제도에 대해 깊이있게 생각해보는 책이다 보니 그리 되었다고 변명하고 싶다. 언젠가 이 책에 대해 스콧 터로의 글만큼이나 김두식 교수(한동대 법학, "헌법의 풍경"의 저자)의 머릿글이 읽을 만하다고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은 여전히 유효하고 이 책을 읽을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스콧 터로의 글이 미국, 일리노이주의 사례를 중심으로 들어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사례와는 부분적으로 다소 다른 고민의 내용일 수도 있겠으나 고민의 질이 다르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미국이든, 이라크든, 아프가니스탄이든 인간의 생명이 어찌 다른 가치로 매겨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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