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전 남자에 대한 조건이 많이 까다로웠다. 한마디로 이상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키는 나보다 커야하지만 너무 크면 안되고, 천주교신자여야만하고, 너무 잘난 남자이면 안되고, 나이차이도 많이 나면 안되고, 센스가 넘쳐서 나랑 대화가 잘 통해야하고 착하지만 바보같아서는 안되고 등등등 말로 다 표현하기 버거울만큼 내 스스로 이상적인 남성을 만들어 놓고 남자들을 그 틀에 우겨넣어보고 실망하고 돌아서기를 반복했다.  

나의 이런 눈물겨운 노력덕분(이었다고.. 당시엔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그냥 남들 다 쓰는 콩깍지였을 뿐으로 판명이 났지만 어쩃든) 에 남편을 만났고,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모습을 모두 갖춘 남자라는 생각에 만난지 8개월만에 덥석 결혼이라는 일생에서 가장 큰 일을 치루어버렸다. 이렇게 완벽한 이상형과 결혼을 했으니 이제 남은건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는 일. 집안일도 서로 위해주면서 배려해주면서 당신이 빨래를 하니 나는 청소를 할께 뭐 이런식으로 하고 왠만한 일이 없다면(둘다 회사원이면서도) 항상 집에서 둘이 마주앉아 저녁을 먹고, 주말에도 둘이 딱 붙어 지내며 하하호호 놀러도 다니고 배우러도 다니면서 한 2년간 잘 살았다.  

아 이렇게 너무 완벽하면 안되는건데 하는 불안감을 이기는 방법은 더 잘하는 것뿐이었다.  호모아르텍스에 나오는 말처럼 비슷한 패턴을 유지하면서 강도는 점점 더 쎄게 해주는 아주 전형적인 방식으로 난 나의 완벽해보이는 가정을 더욱 견고하게 유지하고 싶었다. 7시에 출근하는 신랑의 아침 도시락을 싸기위해 6시 일어나는 오바를 하고 (정작 나는 출근준비와 집안정리에 바빠 아침을 굶었다) 저녁마다 칼퇴근을 하는 길에 시장에 들러 그날그날 저녁거리를 사와 찌개며 국을 끓여대고, 내 옷도 꾸깃하게 입고다니는 주제에 다림질까지 해서 입히면서 현모양처놀이에 빠져 혼자 즐기고 감탄하며 살고있었다.  

그에 반해 남편은 회식이며 상가집이며 출장이며 다니면서 점점 얼굴보기가 힘들어졌고, 힘들어진만큼 어쩌다 한번 만나는 날에는 무슨 축제날인마냥 나는 또 장금이인양 착각에 빠져 혼자 잔치상을 차려내고 있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점점 집안일에 손을 놓은 신랑이 피곤할테니 현모양처로서 닥달을 할 수 없는 일. 어느날 부터인가 빨래도 청소도 집안정리도 모두 내 몫이 되어있었다. 어느날부터인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긴 했지만 그래도 난 남편을 사랑했고, 우리 가정은 완벽했기때문에 그런 불만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너무 죄가 되는 것같아 가책을 느꼈다.  그런 날들이 몇달은 지속되었었던것 같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다음날. 결국 무언가 내 속에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일요일까지 바쁘다며 출근한 신랑이 아무데나 버리고간 영수증에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12시까지 일하다 온다는 신랑이 크리스마스케익을 사먹고 맛있는 저녁을 먹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뭔가 속에서 허물어지는 느낌.  

현모양처노릇하느라 바빠 회사일은 부업처럼 여겼던 나는 당연히 양심의 가책따윈 느끼지 않고 6시 칼퇴근을 하여 집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뒤늦게 남편이 전화를 걸어 회사에 급한일이 생겨 늦게 퇴근할 거라는 말만 하고 끊은 전화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 버리지 못하고 저녁까지 굶고 12시까지 기다리다 얼굴만 보고 잠이 들었더랬다. 그렇게 나의 크리스마스이브를 망쳐놓은 남편이 회사사람들과는 케익에 불을 붙이며 저녁먹을거 다 먹고 야근을 했다는 사실에 너무나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게 뭔지 몰랐다. 그냥 내가 생각하는 만큼 신랑이 나를 생각하지 않는데서 오는 배신감 정도라고 생각했다. 내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데 이럴수가 있니 같은 서운함? 물론 신랑은 이런 나의 마음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크리스마스이브까지 남아서 일을 해야하니 동료들끼리 서로 너무 한심하다 싶어 케익사다먹고 저녁이라도 잘 먹자 싶어 먹은것 뿐인데 왜 그걸 가지고 이렇게 싸움을 해야하는지 이해못하겠다는 거다.  

오히려 화를 내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의 현모양처질이 참 억울하고 한심하다 싶었다. 근데... 채운선생님 강의를 듣고 보니 딱 그지점에서 문제가 있었던것 같다. 그냥 신랑을 사랑해서 신랑을 위해 그렇게 집안일을 열심히 하고 신랑을 기다린 것이었다면 내가 그렇게 억울해하고 서운해할 이유가 없었던거다. 난 신랑을 사랑하는 나의 모습을 사랑해서 그런 나의 모습이 대견해보여서 그래서 그런일을 했던 거였고, 그렇게 내가 했을때 내 노력과 비슷한 크기로 신랑이 고마워할것이라는 어줍잖은 계산을 혹은 김치국 들이키기를 하고 있었던거다.   

갑자기 그 동안의 나의 가식스러웠던 행동들이 부끄럽고 민망해졌다. 생각해보면 난 나 혼자만 집안일을 하는 것에 대해 불편하고 찜찜했었고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그런마음이 들때마다 속으로 혼자 남편도 한가해지면 다시 예전처럼 가사분담을 하게 될꺼야. 지금은 바쁘기도 하고 집에 있어도 피곤해서 그래.. 하며 남편은 당연히 사랑해야하는거지. 이런것까지 따지면서 미워하면 어떡하니.. 하며 나를 달랬던것 같다.  

이상적인 부부 혹은 가정에 대한 나의 개념을 꺨 때가 된 것 같다. 싸우기도 하고(사실 싸우는 것 역시 이상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에 내가 대부분의 일을 감내하고 있었다.. 미련하게도), 내가 하고싶은 말도 하고, 내가 하고싶은 행동도 하면서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진짜 부부의 모습이 되어야겠다. 물론. 남편은.. 이런 내 모습이 많이 불만인듯 하지만.  

내가 행복해지려면.. 꺠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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