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발명 - 당신은 어떤 이야기의 일부가 되겠습니까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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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23년 10월 29일은 이태원 참사 1주기다. 백화점이 붕괴되지도, 다리가 끊긴 것도 아닌데 일상을 살던 시민들이 이태원 길에서 죽어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사과를 한 적이 없다. 용산구청과 용산 경찰서는 질서 유지와 치안의 책임을 서로에게 돌리며 1년을 때워왔다. 한 사람도 처벌 받지 않고 1년이 흘렀다. 믿을 수 없게도 용산구청장과 전 용산경찰서장에 대한 1심 결과는 올해에 나오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한다. 국민의힘 국회의원이 전부 퇴장한 가운데서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내년 2월에나 표결에 부쳐질 수 있을 것이다. 특별법에 명시된 조사 주체의 권한이라는 것도 대폭 축소되었다. 조사에 불응하는 자에게는 고작 벌금형 정도로 수정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놀다가 죽은 사람까지 애도해야 하냐.”라며 굳이 현수막까지 서울시청 옆 상가 가로수에 걸고 유족을 조롱하고 있다. (그걸 본 내 눈을 빨리 씻어내지 못해 안타까웠다.) 단지 참사 현장에 있지 않았다거나 빨리 빠져나왔다는 이유로 우리 모두 살아있을 뿐. 그런데 유족이 된 평범한 가족에게 막말이 돌아가고 있다.

이뿐인가. 자고 일어나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지구촌 여기저기서 펼쳐진다. 무려 21세기에 재래식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러시아가 일으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과 러시아 두 강국의 냉전 시대를 연장한 듯한 기시감을 일으킨다. 지치지 않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영토에 정착촌을 계속 만들어왔던 이스라엘은 확전을 선언하며 미국의 지원까지 받고 있다. 편안히 레트로 팝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는 지금, 나는 단지 그곳에 있지 않기 때문에 죽음을 피한 것뿐이다. 지구촌에서 오늘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그저 운이 좋을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근처에 도사린 죽음이, 혐오가 자신과 아예 상관없는 것처럼 죽음과 혐오의 대상자들을 끊임없이 조롱한다. ‘당할 만한’ 이유를 찾고 ‘왜 거기 있었는지’를 묻는다. 생명과 인격의 상실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 것이 쿨한 태도인 것처럼 보인다.

정혜윤이 신작 <<삶의 발명>>(초판 1쇄, 2023년 10월 23일, 위고 출판사)을 펴냈다. 내가 사랑하는 그의 전작처럼, 그는 비극만이 넘치는 지구에서 희망과 마음에 아로새길 별빛을 쓰고 있다. 그가 인간과 이 지구에 거는 희망, 그가 지구로부터 받았던 위안과 기쁨이 아주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서 읽을 때마다 ‘이것이 진짜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가?’를 질문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1944년 일본 정부가 동남아시아에 억류 중인 포로들을 감시하는 관리원들을 조선인으로 뽑아 노구치 부대 소속으로 콰이 강의 다리 등에 보낸다. 그들에게 포로 존중 의무가 담긴 제네바 협약을 알려줬을 리 없다.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냅다 사람의 뺨부터 갈기는 법을 배웠다. 그들 역시 죽지 않을 만큼 모이 수준의 식사를 하며 생활했다. 1945년 8월, 그들은 독립한 조국에 버젓이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전범 재판이었다. 삭발되고 온 몸이 벗겨진 전신 사진은 포로들에게 보내졌고 그들의 회상에 따라 포로감시원들의 생사가 결정되었다. 경성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해 포로감시원으로 콰이강의 다리에서 포로들을 대했던 조문상은 싱가포르에서 사형을 당했다. 그가 남긴 유서의 일부를 정혜윤은 집중해서 보여준다.

역시 정말로 죽고 싶지 않다. 이런 세상에 미련이 없다는 말은 본심이 아니었다. 역시 이 세상이 그립다. 이제 와서 아무 소용이 없다면 영혼만이라도 이 세상 어딘가를 떠돌고 싶다. 가능하다면 누군가의 기억 속에라도 남고 싶다. 26년이 거의 꿈에 지나지 않았다. 지극히 짧은 시간이라고 할 만하다. 이 짧은 일생 동안 무엇을 했는가. 완전히 나를 잊고 있었다. 모든 것이 흉내와 허망. 왜 좀 더 잘 살지 않았던가? 자신의 것이라고 할 만한 삶을 살았다면 좋았을 것을. 친구야! 아우야! 자신의 지혜와 사상을 가져라. 나는 지금 죽음을 앞에 두고 나의 것이 거의 없다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 유서는 조문상을 비롯한 전범 3400여 명의 명예를 위해 전범 재판과 여러 기자 회견 등을 다니면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물었던 이학래 씨가 갖고 있었다. 조문상, 감형되어 살아남은 이학래는 자신이 전범의 수치심만 안고 사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자신이 왜 감옥에 왔는지를 자문했다. 살아남은 이학래는 자신의 살아남음을 그저 수치나 행운으로 여기지 않았다. 조문상의 유서를 품고 거리에서 보는 일본인들에게 말을 걸며 도의심을 깨웠다. 조문상이 자신의 죽음이 어디서 왔는지를 통렬하게 성찰했다면 이학래는 자신이 살아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외면하지 않았다. 정혜윤은 자신의 역사를 남들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써내려가는 용감한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죽음 앞에서야 정직해지는 인간, 죽을 때에야 알게 되는 소중한 것을 지금 생각해 보자고 나를 자꾸 흔들었다. 그들을 타자로 보지 말자고, 그 시대에 살았고 그 공간에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할 수 있는 결정을 했던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나를 이해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내리는 결정이 진정 자신의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그것이 지혜와 사상이라고 준엄하게 말하고 있었다.

정혜윤 피디는 여행을 많이 다녔다. 그때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여기서도 한 보따리 풀어놓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내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미얀마의 탄바우자야트에 묻힌 상자 이야기다. 콰이 강의 다리를 달려 어린아이를 환호하게 했던 그 기차에는 일본의 패망 직후 엄청난 상자들이 실려 미얀마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보물이라고 전해졌다. 미얀마인들은 그 상자만 파묻고 사라진 일본인들을 보며 일확천금을 꿈꾸었다. 그러나 꿈을 품고 산으로 들어간 미얀마인들은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고 한다.(심심하다고? 책을 보라. 정혜윤 피디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자연이 아니고 돈이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장은 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윤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이 이야기속에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일부 인간만이 남는다. (중략) 우리가 다른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이유? 하나의 이야기밖에 모른다면 하나의 삶밖에 살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세계가 다른 삶이 가능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휴직을 하고 사두기만 하고 읽지 못했던 책을 펼쳤다. 여성-장애인-흑인-레즈비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 샌드위치 소스를 젓다가 기계에 끼어 죽은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 뉴욕 할렘가에서 어머니와 살면서 반목했다가 애정을 느끼기도 하는 여성의 이야기, 미국 사회 보장 제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몽 족의 방식을 고수하며 장애아를 키웠던 한 가족의 이야기, 이태원 참사 때 딸을 잃어 딸이 묻힌 묘에 한 달 안에 합장돼서 딸을 껴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한 어머니의 이야기 등을 읽었다. 나는 매일 커피를 마시고 쿠키를 한 입 물 때마다 이들의 얼굴을 한 번씩이나마 떠올리게 된다. 내가 힘들다고 생각했던 일들 -주력 부서 소속이 아니라고 후배들에게 (속칭) 까이던 경험-이 너무 가소롭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혜윤 피디는 내게 ‘나-나-나-나’로 이어지는 사슬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실감하게 해 주었다. 직장이나 집, 흔한 모임에서 나는 사람이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언급하지 않는다. 냉소하는 것이 똘똘해 보이기 때문이다. 냉소가 희망보다는 현실적으로 보이기에, ‘남을 생각하고 그를 위해 헌신하는 일’은 이윤이 따르지 않으므로 바보 같은 짓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가족을 의지하고 각자 도생을 위해 재테크에 헌신하는 것이 현명하다. 정혜윤은 질색한다. ‘미래는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머릿속 생각이고 꿈이다. 세상은 우리의 상상과 꿈과 생각대로 만들어지고, 상상하고 꿈꾸지 않으면 영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미래를 믿지 않으면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이 이야기꾼의 능력이다.’(219쪽)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현명하다고 믿는 지금의 사고 결과, 메인 서사를 의심하라고 한다. 삶을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구성하려면 다르게 생각하라고 한다.

나는 가소로운 절망으로부터 벗어난다. 내가 하는 일이 미래를 구성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다. 세상이 얼마나 걍팍한지 강조하는 일을 멈추기로 한다. 성공해서 경쟁자를 따돌려 좋은 직장을 얻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꾸리자는 서사를 거부하기로 한다. 지금부터는 동물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우연히 어떤 곳, 어느 시간 대에 있었기에 학살과 죽음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조롱하는 목소리를 차단하겠다. 나 그리고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은 그들과 생명이라는 연대성을 붙들고 지구에 죽음 대신 탄생을, 성공 대신 성장을, 인스타 그램 대신 책을 말하는 꿈을 꿀 것이다. 아픔을 보더라도 그것에 매몰되지 않을 것이다. 똑똑해 보이기 위해 쉽게 냉소하지 않을 테다. 당장 피우지는 못하더라도 작은 씨앗을 땅에 뿌리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다만 끊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매일 작은 씨앗을 땅에 뿌리는 것이다. 사소한 방식으로나마 지구에 희망을 길어올렸는지, 하루를 그렇게 살았는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나는 내가 몹시 좋아하는 이야기의 일부에 편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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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 - 침묵과 빈자리에서 만난 배움의 기록
고병권 지음 / 돌베개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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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보통의 날들이었다면 부랴부랴 수업을 마무리하면서 뭔가를 반복하는 말을 하거나 간단한 형성 평가 등을 보았겠지. 오늘같이 뒤숭숭한 날은 '그래도 학교에서 근무하는 것이 낫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기 딱 좋다. 게다가 요즘 읽는 책들이 돈 벌고 그 돈으로 두 아이를 돌보고 가정을 일군다며 마음 구석으로 밀어놓았던 감정들을 일깨우는 책들이다. 이라영이 쓴 <말을 부수는 말>, 고병권 에세이 <묵묵>(돌배개, 초판 7쇄), <느티나무 수호대>(김중미 씀, 돌베개, 2023) 3권이 전부 그러하다. 이 세 권을 연달아 읽는 동안 나를 돌이키게 했던 것이 있다. '나는 타자를 보는 시선이 납작하다'라는 깨달음이다. 여성 차별과 비정규직 차별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회 문제에 대해 당사자의 입장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는 것.

고병권 선생님은 니체 이론 전문가이다. '수유 너머'라는 대안 연구 공간에서 일을 하셨는데 언젠가부터 그곳에서 나오는 연구서나 연구가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먹고 사느라 내가 관심이 없었나보다라고 생각했는데, 그곳이 해체 위기를 겪고 연구자들이 각자 다른 공간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수유 너머에서 주도적인 연구자 역할을 하셨던 고병권 선생님도 예외는 아니었던 듯하다. 장애인의 검정고시 학습을 도우며 이동권 등 장애인 기본권 향상에 힘을 쏟는 '노들 야학'의 철학 선생님으로 일을 하셨다. 그곳에서의 경험이 <묵묵>이라는 에세이로 나온 것. <느티나무 수호대>라는 작품은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작가 김중미 선생님의 작품이다. '다문화'로 통칭해서 부르는 많은 문화권의 사람들이 '대포읍'이라는 곳에서 부대껴 살며 당산나무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는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두 권의 책은 이라영의 <말을 부수는 말>을 읽으면서도 내가 깨지 못했던 '나의 억울함만 살피기'의 관점을 반성해 보라고 가만 가만 나를 흔들어 주었다.

장애인과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라고 하면 내게는 한 장의 사진처럼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도움으로 일상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불우한 사람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라고 하면 '부모의 나라에서도 태어난 나라에서도 어엿한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혼란스러움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이미지이다. 표정이 어둡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일상을 유지해 나가는 나약한 모습을 한 스테레오 타입의 사진이다. 이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 이들과 공존하는 것이 얼마나 무식하고 폭력적인지를 알려주는 두 작품을 만난 것이다. 고병권 선생님께서 <묵묵>에 쓰신 글 중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자선가의 무례'라는 장이었다. 이 장에서 자선가의 무례를 니체의 입을 빌려 설명한다. '자선가는 도움을 줄 대상을 먼저 상상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그 사람의 위치에 놓아 본다. 가련한 처지에 있는 자신을 도와준다면 그는 고마움에 눈물까지 흘릴 것 같다. 이런 상상을 마친 그는 가난한 이에게 선행을 베푼다. 그의 상상대로라면 상대방은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야 한다.(중략) 그런데 이게 구현되지 않을 때 우리의 자선가는 끔찍한 배우를 만난 감독처럼 분노한다.'(77쪽)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장애인 역시 비장애인과 같은 욕구를 지니고 있으며, 그 욕구는 자립할 때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온정주의적 시각을 배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내가 노들 야학에서 국어 수업을 한다고 생각해 본다. 시간을 내어 몇 번이고 같은 말을 하면서 검정고시에 도움이 되는, 읽기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전수'했는데 '고맙다'는 말이나 '당신 덕분에'라는 말을 듣지 못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매우 서운하고 은혜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 뻔하다. 사랑과 헌신으로 장애인의 품행에 대한 명령권을 믿는 (78쪽) 습관은 여전한 것이다.

<느티나무 수호대>에 나오는 예쁜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만일 내가 느티 샘이었다면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지 않고 오해와 끔찍한 싸움이 난무하는 활극으로 끝났을 것이다. 느티 샘은 마을을 품고 있는 당산나무가 인간화된 존재로, 애초에 내가 품는 인간적 감정을 훨씬 초월하고 있는 인물이어서 다행이다. 매일 아침 갓 구운 빵과 잘 깎은 사과를 내주고, 넓은 방과 읽을 책을 계속 제공해 주는 데도 고맙다는 말 없이 훌쩍 나가거나 '더 맛있는 빵 없냐'고 두리번거리는 아이들을 본다면 나는 쫓아낼 게 뻔하다. 남편의 집에서 적응하지 못해 집을 나간 엄마를 둔 동호, 코로나 19로 인해 한국에서 나고 자랐는데도 혐오의 말로 마음이 찢긴 금란이,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건너 와 한동안 '동남아 바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민호...전부 사회의 편견, 사회가 만들어 놓은 '정상성'의 범주에 들지 못해 마음의 상처를 혼자 다스려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어른들 역시 '정상성'의 범주에 들지 못하고 한국인이 꺼려하는 일을 하거나 한국인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일해야 한다. 그들을 느티나무에서 환대하며 먹을 것을 내오고 함께 모이도록 하는 존재가 느티 쌤이다. 화 내지 않고 온유하며 자신의 존재가 지워질 위기에 처해도 의연한 초 인간적 존재. 아이들은 느티 샘 곁에서 사람들을 만나 따뜻하게 어울리는 경험을 하며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 그리고 느티 샘의 존재가 지워질 수 있는 재개발의 위협 앞에서 자기들이 잘 할 수 있는 춤과 브이로그로 그를 지키기 위해 나선다.

두 작품에서 '한국인의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어야 하는 존재는 찾을 수 없다. 다만 들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못했던 존재들이 생동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강의하는 동안 "이거 골 때리네!"라며 감동을 표현한 사람, 고병권 님이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때까지 자신의 몸으로 끝까지 단어를 완성한 사람,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해 광화문에서 4년간 농성하며 죽은 자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 자기는 몸치라며 웅크리고 울고 있는 대신 BTS의 노래를 부르며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아이가 있다. 먹고 사느라 자기에게 동생 돌봄을 다 맡겨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마냥 착한 아이가 되지 않고 기어이 자신이 힘들다고, 어른은 자기에게만 이해해달라고 한다고 소리 지를 줄 아는 아이도 있다. 금메달씩이나 따야 학교 대표로 인정한다는 어리석은 어른들을 보면서도 씩씩하게 태권도를 하기도 한다. 이 생명력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자기가 삶의 주권자임을 깨달은 데에서 온다. 그 깨달음은 자기를 핍박한 사람들에게 지기를 선택하지 않음으로서, 자신과 연결된 사람을 모른 척 하지 않는 연대성에서 온다. <느티나무 수호대>에는 이런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다. 대신 이런 말들을 살아나가는 사람들이 대포읍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책으로 읽은 말만 기억했다가 한국 사회의 정상성 범주에서 무엇이 어긋나는 사람이 있으면 대뜸 연민부터 하고 보는 게으른 나를 일깨운다.

이 사회에서 진실의 빈 자리는 너무도 크다. 내가 또 알지 못하는 많은 곳이 빈 자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 어제 메타포라 수업이 생각난다. 계속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몸으로 부딪힌 경험만이 경험이라고 할 수 없다. 진실의 빈 자리가 울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왜 빈 자리가 계속 생기는지, 왜 이 사회는 계속 그 소리를 은폐하는 것인지를 알려고 하지 않으면 고병권 선생님의 말대로 '자선가의 무례'를 저지를 수 있다. 내가 배운 것으로 도움을 주겠다는데, 내가 원하는 예쁜 모습을 하고 있지 앖다고 충분히 불쌍하지 않다고 비난하는 폭력적인 사람이 되기란 얼마나 쉬운가. 은이와 완이부터 내가 그렇게 대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이를 약자로 본 것은 아닌지, 아이한테 인간을 빼앗은 것은 아닌지'(<묵묵>, 80쪽) 매 순간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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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에서
이승우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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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에서(이승우, 은행나무, 2022. 9)>>를 읽었다. 이전에 읽었던 <<지상의 노래>>와 얼개가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복제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가슴이 웅장해진다. 무엇보다 내가 몸담은 세계의 외부자를 정의해 보게 된다.

나는 친구가 몇 없다. 좋은 책을 나누는 기준이 있지만, 그것을 공유할 만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블로그에 글을 쓰게 됐다. 글을 쓰면서 책을 고르는 취향이랄까, 좋다고 여기는 기준을 뱔견하게 된다. 좋다는 기준 중 하나는, "역사성이 담길 것"이다. 자기가 사는 시대의 상처가 새겨져 있거나, 적어도 시대의 아픔을 모른 척하지 않는 캐릭터가 좋다. 요즘엔 이런 캐릭터가 서사를 이끄는 이야기가 많지 않다고 생각해서 한국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다. 이승우의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는 시대의 아픔뿐 아니라, 역사의 오점까지 함께 지는, 알고 보니 그런 인물이라는 게 너무 마음에 든다.

불안과 혐오가 세계를 뒤덮고 있다는 인식, 이것이 옳지 않다고 일갈하는 캐릭터가 있는 것도 마음에 든다. 젊은 한국 소설 작가들의 흐름과 별개로, 도도히 자신의 물길을 내는 이승우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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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감지 마라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기호 지음 / 마음산책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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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용도 제 몫의 이삿짐을 들고 일어 섰다. 정용은 그나마 낡고 오래된 캐리어가 있어서 한결 짐 싸기가 수월했지만 문제는 컴퓨터였다. 본체와 모니터를 들고 캐리어까지 끌자니 손이 모자랐다. 정용은 진만에게 모니터라도 부탁할까 싶어 힐끔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그는 이미 두 손에 다른 것을 들고 있었다.(같은 책 20쪽)

서로를 도운다는 것이 사치인 지방대 졸업 청년 진만과 정용의 '보증금 없는 월셋방 살이' 이야기라고 줄여 말할 수 있는 소설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끝내기에는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세계가 너무 거대하고 슬프다. 나는 이 책을 국립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가 소장해야 하기 때문에 서점에서 다시 샀다. 이들의 삶이 너무 고달프다. 그런데 왜 고달픔의 연속일까. 다시 읽으니 20쪽이 다시 읽힌다. 가족(이나 유사 가족)에게 짐을 덜어달라고 부탁하고 싶지만 그들 역시 두 손이 꽉 찬 상태다. 자동차를 이용하거나 돈을 들여 택배 차량을 이용하면 두 손이 남고 그들은 걷지 않아도 된다. 여유가 생겼으므로 그들은 초코파이에 초라도 꽂고 입주를 축하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보증금이 없는 광역시 외곽의 월셋방을 선택했다. 셋방으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짐은 두 손에 든다. 월셋방까지의 이사가 그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한 눈에 보여주는 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지 못한다. 잠깐이라도 기대는 순간, 다른 사람이 돈 벌 힘, 버티는 인내심을 빨아 먹게 된다. 사소한 부탁이 상대를 무너뜨리는 어마무시한 무기가 된다. 컴퓨터 하나라도 더 가져온 정용에게 진만은 아주 버겁고 신경질을 유발하는 존재가 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정용은 진만을 거의 부축하다시피 해서 택시를 타고 인근 종합병원으로 갔다. 새벽 무렵부터 진만이 계속 구토를 하고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열도 다시 펄펄 끓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응급실이라도 가야 할까, 고민했지만 그 정도까지는 또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중략) 아이 씨, 이래서 혼자 살아야 하는 건데.(같은 책 63쪽)

진만은 쉽게 아르바이트에서 잘리고, 자주 아프다. 원가족은 초단기 알바생처럼 경비 일을 하며 할아버지를 부양하는 아버지뿐이라 여윳돈을 가져올 처지도 못 된다. 그런데 정전 되니까 호빵 먹고 싶지 않냐며(71쪽) 정용이 듣기에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아무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고 정용은 생각했지만 뜬금없다고 무시하는 태도가 맥락에서 보인다. 홀로 쇼핑 카트를 끌고 가는 할머니를 부축하고 트럭 짐칸에 짐을 실어주는 착한 청년, 점원들을 못 나가게 하려는지 어깨에 귀신이 보인다고 말하는 이상한 사장에 대한 하소연도 들어주는 배려심 넘치는 청년이다. 그런데도 나는 왜 정용의 입장에 서서 진만이 이렇게 못마땅해지는 걸까. 소설을 이렇게 읽어도 되는 걸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뚝배기를 바로바로 홀로 내보내야 하는데 지체가 생기니 지배인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어쩔 수 없이 진만이 아주머니 일까지 도울 수밖에 없었따. 아니, 아주머니 왜 이런 일을 하세요? 아무리 일당이 좋아도 그렇죠. 이러다가 아주머니 쓰러져요. 진만은 그 말을 하고 싶었으나, 차마 꺼낼 순 없없다. 아주머니가 이마에 땀까지 뻘뻘 흘려가며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다.(같은 책 166쪽)

진만은 정용 없이는 홀로 서기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정용이 매달 10만원 이상 더 월세를 내고 신라면 2+1을 구입하거나 로션을 채워 넣으니 말이다. 그런데 진만은 통장에 3만원도 없으면서 58만원 짜리 롱 패딩코트가 20만원 할인되었다며 그것을 너무 입고 싶다며 정용에게 호소를 한다. 트럭 사고 목격자의 증언자가 되겠다고 나서기도 하고 정용 컴퓨터의 전원을 제대로 끄지 않는다. 서술자는 한 번도 정용의 심정을 대변하지 않는다. 현명하게도 진만이 일하는 삼계탕집 아주머니를 통해 각자도생이 되지 않으니 성질이 나는 진만을 보여주며 정용이 쌓아왔던 울화를 보여준다. '아들같은 동료에게 고마워서' 포카리 스웨트를 건네는 아주머니에게 되려 속으로 원망하는 진만, '왜 고생시키느냐고요.'라며 별 감흥이 없는 그는, 아주머니가 사라지자 몸이 편해졌다는 생각만 자꾸 하려고 한다. 아마 진만은 잘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정용이 진만을 생각할 때 그랬던 것처럼. 보증금이 없던 월셋방이 반전셋방이 되면서 500만원을 다 낸 정용은 울화를 한 마디로 진만에게 던져버린다.

"이거 네가 다 먹었어?"
정용이 등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어, 미안... 내가 다시 사다놓으려고 했는데..."
그 순간 정용의 입에서 툭, 그 말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에이, 씨발 진짜...무슨 거지 새끼도 아니고."(같은 책 268쪽)

화장실에서 나온 정용은 짐을 다 챙겨 가출하는 진만을 본다. 잡지 않는다.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으나 믿음은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언제나 일을 하고 있었던 진만과 정용, 그러나 이력서에 들어갈 버젓한 한 줄이 아니었을 뿐이었던 그들의 노동은 언제나 지치고 고단했다. 함께 사는 사람을 챙기고, 불의를 보면 시민으로서 행동하기에 그들은 뭐든지 모자랐다. 집, 잠, 휴식, 여행...이런 것들. 두 사람이 각자도생하느라 눈감고 있었던 현실은 아르바이트 여자 청년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또한 트럭 기사와 할머니의 생계를 가로막는 일로 이어지기도 한다. 둘은 그럼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린 동물을 학대하는 동물원을 보아도 대화를 하지 않는다. 울분과 하고 싶은 많은 말들이 가난에 고여버리는 바람에, 둘은 함께 있어도 각자의 잠자리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묶어버린다. 결국 사장에게 가불받아 아무 말도 못한 진만은 면허 없이 오토바이를 묵묵히 몰고 만다.

희망 없음을 정직하게 밀고 나간 이 소설은 이상하게도 덮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각 장이 완결성을 지닌 손바닥 소설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지나친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열심히 살고 있는' 이 두 청년에게 누가 공평을 말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니 졸음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자란 청년이지만 서울에서 대학 공부했다고 스스로를 전혀 지방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나다. 이 뻔뻔함에 대해 근원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잘 되었을 때 우연히 대학 신입생이 되었던 행운, 아버지의 사업이 잘 되지 않았을 때 정규직에 취업된 행운...이 모든 것에 대해 두 청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에게 묻는다. "우리도 열심히 살았어요. 그런데 아버지 덕으로 이 모든 것이 골치없이 풀어질 수 있었다면 이 세상, 우리한테 너무한 거 아닙니까?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습니까? 그런데 왜 당신의 아르바이트는 이력서에 쓰이고, 왜 나의 아르바이트는 숨겨져야 합니까?" 행운 하나가 불러오는 극명히 다른 두 세계, 내가 몰랐던 세계에서 계속 사회가 외면하는 시간을 쌓아가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의 삶을 '공평'과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재단할 수 있는가. 어두운 마음으로 책을 덮는다. 정용이 부디 덜 아파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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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 - 앤드루 숀 그리어 장편소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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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원서를 읽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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