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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길 - 양세형 시집
양세형 지음 / 이야기장수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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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형님이어서 이야기장수에서 낼 수 있었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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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 - 기독교에 회의적인 교양인과 나누고 싶은 질문 25가지
정한욱 지음 / 정은문고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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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
초판 1쇄 발행 2023년 3월 24일
5쇄 발행 2023년 9월 20일
지은이 정한욱
펴낸곳 정은문고
펴낸이 이정화
디자인 원선우

모태 개신교 신자였다. 그랬던 내가 점점 교회 다니는 일과를 불편하게 여기게 됐다. 대학생 시절 본가를 떠나있을 때는 한 번도 교회 출입을 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너는 구원받았다고 믿느냐? 그렇다면 찬송가 89장, 샤론의 꽃 예수를 4절까지 불러라.’라고 훈육하신 할아버지를 대할 때마다 어린 나이부터 할아버지 얼굴에 내 얼굴을 맞대고 찡그리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기도를 20분씩 할 때마다 ‘그러지 말라고요!’라고 외치면 ‘이 사탄아, 저리 물러가라!’라고 날벼락처럼 외치는 소리가 괴로웠다. 나머지 식구들이 ‘좀 조용히 있으면 안 되냐!’, ‘너는 분위기 파악을 못 하냐!’(평생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다.)라는 소리를 말로 하고 눈으로 보여줄 때마다 절망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이 정말 잘못하는 것을 정죄만 하는 분이라면, 언젠간 죄 많은 이 땅을 싹 쓸어버리고 인간을 하나하나 일으켜 세워 심판할 거라면 그런 하나님일 뿐이라면 나는 왜 이리 화 많은 신을 믿는 것인가. 아니, 당장 이스라엘이 미국과 독일의 비호 아래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감옥을 만들어놓고 팔레스타인을 억압하는데 왜 가만히 계시는가. 왜 당장 심판하시지 않는가.

개신교인이고 싶었다. 예수를, 내 후일을 심판하는 거대한 신으로서가 아니라 내 인생의 지표로 삼고 싶었다. 한센병자와 과부, 제국의 하수인으로 찍혀 인간다운 생활을 하지 못하던 세리를 모두 친구 삼으시고 축복하신 그를 따르고 싶었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에서는 내 생각을 펼칠 수 없고 함께 할 친구도 찾을 수 없다. 평생 ‘무교’라고 나의 정체성을 말한다. 차라리 무교라고 밝히고 조용히 예수의 삶을 읽는 편이 마음 편하다. 일요일에 나가서 신도들 점심 식사를 준비할 필요가 없다. 남편이 주차장 요원을 할 일도 없다. 요즘은 멀리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나보다 더 뛰어난 분들의 저작을 읽으며 어린 시절 내내 당했던 ‘개신교라이팅(?)‘을 극복하고 있다. 며칠 전부터 이런 나에게 빛으로 다가온 저자 한 분이 있다. 정한욱이라는 분이다. 교회 평신도로서 안과 의사로 일하신다. 이 분은 책 읽기를 몹시 좋아하셔서 1년에 80권 정도를 블로그에 정리하는 분이다. 올해 <<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라는 책을 내셨다. 독서 평론 전문가 장정일 씨가 ’올해 나온 최고의 책‘으로 상찬을 했다. 예수가 갔던 길에 대해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책을 쓴 것 같다는 반가움에 두 권을 샀다. 한 권은 사랑하는 사촌 동생에게 선물을 바로 했다. 사흘째 이 책에 빠져 있다. 나는 예수의 삶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묻고 싶을 때 찾을 수 있는 스승을 한 명 더 찾았고, 디트리히 본 회퍼의 삶을 나눌 수 있는 책속의 친구로도 정한욱 작가를 좋아하게 되었다.

현재 개신교는 의로운 행동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을 믿는 것 자체로도 구원을 얻는다는 ’값싼 은혜‘론을 교인에게 설파하고 있다. 그러나 디트리히 본 회퍼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의 외아들인 예수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한 신이기에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성도는 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희생과 헌신을 하며 살아야 한다. 더이상 이 사회는 종교가 권위를 가지지 못하는 ’성인의 사회‘이기 떄문이다. 신이 지녔던 인간 멸망의 권능을 인간 스스로 지니고 있는 시대, 기독교는 거칠고 여전히 야만스러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디트리히 본 회퍼는 숙고 끝에 답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는 그로 하여금 와서 죽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라고. 실제로 그는 그를 아끼고 따르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까지 갔지만,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유태인을 도륙하던 나치의 제3공화국으로 돌아온다. “미친 운전자가 죽이는 사람을 장례 지내는 것이 기독교인의 할 일이 아니다. 미친 운전자를 끌어내야 한다.”라며 히틀러 암살단에 합류했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속세에만 기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저작 일부를 읽어보면 시편 암송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성경의 기도서-시편 개론>>을 읽어보면 시편을 매일 공동체인과 암송하면서 경건의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가 경계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세상을 등지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는 기도는 다음과 같은 자들은 할 수 없다. 도망치는 개개인의 경건한 영혼, 광신자나 다름없는 공상적 사회 개선가, 완고한 세계 개혁가.(<<시편 개론>> 104쪽)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세상의 한 가운데서, 세상의 밑바닥에서, 진부한 세상, 종속된 세상 안에서 함께 참고 견디’(104쪽)는 사람, 생활에 놀라우리만치 성심을 다하고 세상 안에서 특별한 곳을 확고히 응시하는 자들(같은 쪽)이라고 한다. 정한욱 작가는 책 여기 저기서 디트리히 본 회퍼의 삶을 조명하면서 ’종교적 언사를 자주 입에 담지는 않지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섬김과 희생과 고난이라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하며 책임지는 세속적 사람’을 말한다.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가운데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도(마태복음서) 이와 통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인상적인 부분이 많지만 하나만 더 들어보기로 한다. ‘수술의 신’(69쪽-75쪽)이라는 장이다. 이 책은 딸이 교회를 다니고 성서 공부를 하면서 의혹이 생긴 점에 대해 아버지에게 질문하면 이에 대해 아버지 정한욱 작가가 답하는 구성으로 이뤄져 있다. 딸은 ‘하나님을 어디서 만날 수 있는가? 일상적 시공간에서 만나는 일이 가능한가?‘라고 질문한다. 작가가 이에 대답하기 위해 ‘수술의 신’이라고 명명한 존재에 대해 설명한다. 작가는 백내장 수술을 하는 전문의이다. 일상적으로 진행하는 수술임에도 불구하고 가끔 친숙하지 않고 무시무시한 얼굴로 자신에게 겁을 줄 때도 있다고 고백한다. ‘수술의 신’이다. 이 신이 정말 싫어하는 것이 몇 가지 있다고 한다. 내 손으로 누군가를 돕는다는 데서 오는 쾌감에 중독되어 우쭐해지면 생기는 교만이 첫 번째다. 금전적 이득이나 자기 만족을 위해 필요하지 않은 행동을 무리하게 하는 욕심도 있다.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이런저런 술기를 시도하며 주변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자기 불신’도 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든 되겠지’라며 날카로움을 벼리지 않고 작은 문제를 그냥 넘겨 버리는 ‘적당주의’도 꼽는다. 정한욱 작가는 인간이 완벽하지 않으므로 자신은 이런 주의 사항 중 한 가지 정도는 늘 가지게 된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수술의 신을 ‘알 수 없는 분’, ‘두려운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수술이라는 일상에서 만나는 이런 존재의 두려움을 성스러운 것으로 표현한 선배 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며 그 신의 실체가 하나님이라고 정리한다. 나는 이 장을 올해 읽었던 책 중, 강력한 실천적 지침을 내게 주는 것으로 꼽는다. 내게는 ‘교육의 신’과 ‘육아의 신’이 있는 것이다. 내가 아이들과 학생들의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쭐함, 내 만족을 위해 학생들과 아이들에게 필요없는 짓을 하는 욕심, 더 멋있게 보이기 위해 이런 저런 잡기를 시도하며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자기 불신, 많은 교사들과 더불어 내가 곧잘 발휘하는 ‘적당주의’를 물리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상의 배후에서 나를 응시하는 거룩한 존재의 시선을 느끼며 살아가’(75쪽)며 일상의 모든 순간을 감사히 여기기를 기도할 수밖에.

팬데믹을 거치며 교회는 사회가 걱정해야 하는 곳이 되었다. 과학적 방역을 무시하고 지니의 램프같은 하나님을 부르며 정부의 지침을 거슬렀다. 요새같은 교회에서 모여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을 도리어 비난하면서 하나님의 길을 모르는 자들이라고 정부를 비난하는 종교인들도 있었다. 동성애자를 비난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배척하고 난민(자기 땅에서 살 수 없어 탈출한 자들)을 괴물화하고 있다. 일부 종교인들의 인식이 사회의 평균치보다도 공감성이 떨어지는 듯하게 보여 교회에 낙심한 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기독교계 내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담론의 발화에 대해서 아주 쉽게 설명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계의 문제에 대해서도 충분한 근거를 들어 합리적으로 설명한 책이다. 신성과 세속의 조화 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딸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생각해 봤을 것이다. 평신도로서 사회에서 제 역할을 수행하는 시민으로서 자율적으로 공부하고 심오하게 사색한 아버지의 자상한 의견이 여기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이다.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서지 정보를 보니 벌써 5쇄를 찍었다고 한다. 더 많이 찍어서 교계와 사회가 기독교적 이상에 대해 더 숙고하는 계기가 조성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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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여자들의 특별한 친구 - 문학적 우정을 찾아서
장영은 지음 / 민음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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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우정을 다룬 몇 안 되는 가치있는 책. 읽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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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볶이 : 언제나 다음 떡볶이가 기다리고 있지 띵 시리즈 23
김겨울 지음 / 세미콜론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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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다음 떡볶이가 기다리고 있지
지은이 김겨울
찍은날 2023년 6월 7일
펴낸날 2023년 6월 14일 1판 1쇄
펴낸곳 세미콜론

남편을 11년째 알아가고 있다. 놀랍게도 나는 그와 떡볶이를 한 번만 먹어보았다. 그것도 딸을 임신하고 “떡볶이가 너무 먹고 싶다고 다정이(태명)가 난리를 쳐. 꼭 그렇게 거절해야겠어?”라고 애원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남편은 유명 빵집 앞에 줄지어 있는 떡볶이 포장마차 집에 가서 떡볶이를 먹고 싶다는 나의 제안을 거절했다. 위생적이지 않고 거기까지 가서 먹을 맛은 아닐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지금도 성격이 하해같지 않은 나지만, 그때는 뾰족하기가 바늘 끝? 아니, 늘 폭발 대기 중엔 활화산 같아서 이런 간단한 거절에도 견디지 못하고 울어버리곤 했다. 울고 싶지 않으면 고성을 지르며 화를 냈다. 그래서일 것이다. 남편이 정직한 방법으로-떡, 어묵, 대파, 고추장, 간장, 설탕 등을 섞어- 떡볶이를 해주었다. 나는 부른 배를 잡고 노래를 부르며 떡볶이를 먹었다. 남편은 거의 먹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편은 왜 떡볶이를 싫어할까? 남편은 그게 한 끼 식사로는 약간 부족한 것 같으면서, 간식이라고 하기엔 너무 과한 음식이라고 말했다. 단지 그런 이유로 싫어한다고? 원래 떡볶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래서 오후 3시 방과후에 어울리는 음식. 남편의 반박을 들으며 S와 M, 셋이 K중학교 정문을 나와 고개 하나만 넘으면 도착하는 S의 이층집까지 가는 데에 3시간이 걸렸던 날을 생각한다. 팬티 스타킹이 보편적이지 않을 때였다. 끔찍한 하얀 스타킹이 줄줄 내려갈 때마다 10원 짜리 동전을 허벅지와 스타킹 윗부분 사이에 넣어보았다. 그래도 조금 걸으면 줄줄 흘렀다. S의 다리를 보고 배꼽을 잡고 깔깔 웃는다. 우유를 부어도 모를 것 같은 회색 치마가 골반 때문인지 자꾸 돌아간다. 나의 치마 꼴을 보고 S,M이 침까지 튀기며 웃는다. 스타킹 올이 자꾸 풀린다. ‘쪽팔려, 쪽팔려’를 연발하며 올 나간 종아리를 가리고 있으면 남학생들이 지나간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반대 편만 의식하고 있던 우리 셋은 스스로 바보 같다고 푸지게 웃는다. 그렇게 웃다보면 배가 고파진다. S의 집에 떡을 사 들고 간다. 팬에 물을 자작 자작 붓고 고추장, 간장, 설탕 따위 넣고 떡을 씻는다. 대충 끓으면 정신없이 먹으며 또 강타의 열혈 팬이었던 S의 강타 자랑을 한바탕 듣고 온다. 아, 그래? 토니는 미국에서 살다 왔니? 오…그래도 강타가 제일 낫네. 네 말대로. 그런데 어쩌지? 나는 김현철이 좋은데. 그럼 예쁘장한 S가 껄껄 웃으며 말한다. “미쳤나봐!” 흠…그때의 친구는 다 사라지고 지금은 남편과 가장 친한 친구가 된 것 같은데, 친해지면 도원결의 후 먹는 술처럼 입에 들여야 하는 떡볶이를 아직 함께 먹지 못하고 있다. 몹시 안타깝다.

하지만 그래서 내게는 떡볶이를 먹는 것이 매우 특별한 일이 되었다.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은 후, 떡볶이를 먹는다는 것은 비밀스런 제의가 되었달까. 남편은 떡볶이를 좋아하지 않고, 두 아이는 매운 것을 먹지 못하니 어디서, 어느 때나 먹을 수 있는 친근한 음식 리스트에서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이 비밀스런 제의를, 이 책을 다 읽은 월요일 오후에 치르기로 결정했다. 남매가 학교와 태권도 학원을 거쳐 수영까지 마치고 샤워를 완료하는 데다 학원차가 픽업까지 해주는 유일한 날! 나는 무려 18시까지 자유인 것이다. 김겨울 작가의 말을 인용해 보자. ‘하지만 내 마음 속 떡볶이는 판 떡볶이인 것을….’(119쪽) 내 마음도 그렇다네! 나는 판떡볶이 맛을 찾아다니기 위해 우리 동네 일대를 걸어서 다녀본다. 밀키트 상점도 간다. 요새는 마라맛 떡볶이가 유행인가보다. 마라탕후루가 대세라더니 떡볶이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하지만 내 마음 속 떡볶이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300원 내고 6개의 가래떡을 받았던 아주머니 가게의 그 판 떡볶이다. 밀떡은 안 된다. 쫀득쪼온득한 가래떡, 적당한 국물, 떡에 스며들 만큼의 양념, 몇 입 먹고 물을 마실 만큼의 매운 맛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게 은근히 갖추기 어려워졌나보다. 현대사회가 미친듯이 발전하는데 이 맛은 아무도 밀키트로 재현해주지 않고 있다. 찾다가 지쳐 나는 할매 떡볶이 집을 갔다. 놀랍게도 밀떡과 가래떡 중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맵기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매워 보였다. 그러나 할 수 없지. 스트레스 천국인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 정도 맵기로 맵다고 할 수는 없어보인다. 마라맛 떡볶이만 파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좋다.

김겨울 작가는 ‘떡볶이를 먹을 때 가장 좋아하는 곳은 집’(121쪽)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두 아이의 엄마까지 된 나는 생각이 다르다. 왜? 왜? 음식점 가서 굳이 사와? 그 음식값에 설거지와 뒤처리 비용이 다 포함되어 있는데? 그래서 나는 배달은 한 그릇으로만 오는 초밥만 시켜먹고(돈 없는데 잘났다.) 포장은 되도록 하지 않는다. 먹고 일어나기만 하면 다 치워주는 그 매력을 난 뿌리칠 수 없다. 김겨울 작가처럼 나도 ‘혼자 먹는 것이 괜찮다 못해 혼자 먹는 것을 즐기는 적극적 혼밥파’(121쪽)이기까지 하다. 왜 이리 되었을까? 김겨울 작가처럼 미국 교환연수를 다녀와서가 아니다. 그저 지나가던 사람이 뒤돌아볼 만큼 막 되게 인형처럼 생기지 않았고, 남편도 인정할 만큼 여우 파는 아니라서다. 비로소 맛집을 찾아다닐 수 있을 만큼 돈을 벌 때 다른 친구들은 연애로 꽁냥꽁냥 중이었고 나는 혼자였다. 그들을 기다렸다가 함께 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김겨울 작가 말대로 ‘이유가 무엇이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솔로라서 편한데 주변에서 불편하게 해서 맛집 찾기로 스트레스를 풀었던 당시를 떠올려 보기로 했다. 애들한테 “반찬 괜찮니? 당근도 다 먹어.”라고 할 필요 없고,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통 말해주지 않는 남편 때문에 “밥은 먹고 와?”라고 물을 필요 없는, 그의 야근일. 나는 내가 좋아하는 떡볶이의 매콤달달함, 떡의 쫀뜩함, 양념에 푹 절은 튀김옷의 부드러움을 만끽하기로 한다.

‘내가 떡볶이와 함께 먹는 음료는 차가운 탄산수나 두유 정도, 기분을 내고 싶은 말에는 맥주나 와인 정도. 시원한 맥주야 두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 와인이 의외로 떡볶이와 잘 어울리는 주종이다. 가벼운 스파클링 레드 와인은 떡볶이의 무거운 맛을 중화하며 입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고, 푸릇한 향이 있는 화이트 와인도 떡볶이와 붙어서 지지 않는 힘이 있어 잘 어울린다.’(147쪽) 그래? 그렇다면 나는 맥주로 정하겠다. 147쪽에 작가가 쓴 대로 하려고 싫어하는 포장을 했다. 냉장고를 연다. 봄날 지인들소풍에 동참했다가 남은 맥주를 끌어안고 왔는데 아직도 3캔이 남았다. 와인은 남편이 따줘야 먹는 나로서는 남편도 없는데 굳이 미간에 주름을 만들면서 와인을 먹고 싶지는 않다. 나는 땅을 연상하게 하는 이름을 달고 있는 맥주 한 캔을 딴다. 가래떡을 잘라 입에 넣는다. 와…패기롭게 떡을 먹었군…동네 떡볶이 집이 이런 매운 맛을 낸다고? 이게 보통 사람들이 먹는 순한 맛이라고? 믿을 수 없다. 대한민국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거지? 아니, 딸의 이유식기였던 8년 전부터 매운 맛을 거의 입에 대지 않은 습관 때문에 양념이 더 맵게 느껴질 거야. 나는 중학교 과학 시간에 ‘나는 우성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까요?’를 알아보기 위해 했던 혀 말기를 하면서…중학교 때는 안 됐던 것이 요새는 되던데…어쨌든 혀를 말고 그 사이로 숨을 내쉬면서 떡과 튀김옷을 번갈아가며 입에 넣었다. 달달하니 맛있네. 나는 맥주를 꿀꺽꿀꺽 넘기며 생각한다. 튀김옷을 다 먹고 계란을 반토막 내서 노른자를 양념에 비벼 한 숟갈 먹는다. 그 다음 결연하게 다시 떡을 먹는다. 맥주를 삼킨다. 호호…떡을 먹을 수 없을 때까지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가래떡 하나가 남았다. 나는 물끄러미 보다가 남편이 삶아놓은 계란을 하나 가져와서 깠다. 그 계란을 반토막 내서 입에 한 번씩 넣고 맥주를 꼴깍꼴깍 넘긴다. 가래떡 안녕.

김겨울 작가도 172쪽부터 얘기하는 것처럼, 떡볶이도 먹을 수 있는 나이라는 게 있다. ‘소화가 잘 안 된다든지 좀 찌뿌둥하다든지 하는 느낌은 누구나 나이를 먹으며 조금씩 더 실감하게 되는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불편함이었다.’(173쪽) 이것을 두려워하니 호승심으로 한 접시를 다 먹는 패기를 부릴 수가 없게 된다. 가래떡을 음쓰봉투에 넣고 진공냉장고에 밀폐시킨다. 노른자를 양념에 더 비벼먹을 수 있지만 참기로 한다. 그냥 노른자를 입에 쏙 넣고 계란 껍질을 조심스럽게 버린다. 튀김옷 나머지는 휴지로 모아 버린다. 그러면서 ‘내 인생에 남은 떡볶이는 몇 번일까.’ 나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맥주도 1/3이나 남겼지만 개수대에 버리며 안녕을 고한다. 내 상태를 잘 살피고 제일 즐거운 시간을 즐긴 뒤 행복하게 남은 시간을 가족과 보내는 것. 지금의 나에게는 그것이 가장 소중하다. 떡볶이는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고, 변치않을 마음 속 1순위 음식이고, 배고플 때마다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이다. 그래서 이렇게 고요의 시간, 나만의 시간이 날 때 떡볶이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나는 떡볶이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 그냥 이대로 신나게 그 자리에 있어주었으면, 지금처럼 계속 몸을 바꾸며 새로웠으면, 누구에게나 추억의 맛으로 여전했으면, 오랫동안 그렇게 있어준다면 충분하다. 차라리 바라는 게 하나 있다면 떡볶이 이모지가 하루빨리 등록되어서 친구에게 이모지 하나로 “떡볶이 고?”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오는 것이다.(184쪽)

나는 진짜 바라는 게 없다. 이모지도 바라지 않는다. 며칠 뒤면 나는 또 월요일에 나와 함께 할 떡볶이 집을 티맵에서 검색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나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식당과 밀키트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 여정은 다소 험난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개의치 않는다. 나도 손맛도 제법 갖추고 있는데다(요리책 봤다, 싱크대 봤다 이러는 거 졸업한 듯합니다. 으쓱-)없으면 계속 탐험하는 게 인간의 본성 아닌가? 앞으로 오랫동안 내 취향에 맞는 떡볶이를 찾을 생각만 하면 둘째가 레고 상자를 열 떄만큼 나는 펄쩍 뛰면서 환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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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발명 - 당신은 어떤 이야기의 일부가 되겠습니까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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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9일은 이태원 참사 1주기다. 백화점이 붕괴되지도, 다리가 끊긴 것도 아닌데 일상을 살던 시민들이 이태원 길에서 죽어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사과를 한 적이 없다. 용산구청과 용산 경찰서는 질서 유지와 치안의 책임을 서로에게 돌리며 1년을 때워왔다. 한 사람도 처벌 받지 않고 1년이 흘렀다. 믿을 수 없게도 용산구청장과 전 용산경찰서장에 대한 1심 결과는 올해에 나오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한다. 국민의힘 국회의원이 전부 퇴장한 가운데서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내년 2월에나 표결에 부쳐질 수 있을 것이다. 특별법에 명시된 조사 주체의 권한이라는 것도 대폭 축소되었다. 조사에 불응하는 자에게는 고작 벌금형 정도로 수정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놀다가 죽은 사람까지 애도해야 하냐.”라며 굳이 현수막까지 서울시청 옆 상가 가로수에 걸고 유족을 조롱하고 있다. (그걸 본 내 눈을 빨리 씻어내지 못해 안타까웠다.) 단지 참사 현장에 있지 않았다거나 빨리 빠져나왔다는 이유로 우리 모두 살아있을 뿐. 그런데 유족이 된 평범한 가족에게 막말이 돌아가고 있다.

이뿐인가. 자고 일어나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지구촌 여기저기서 펼쳐진다. 무려 21세기에 재래식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러시아가 일으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과 러시아 두 강국의 냉전 시대를 연장한 듯한 기시감을 일으킨다. 지치지 않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영토에 정착촌을 계속 만들어왔던 이스라엘은 확전을 선언하며 미국의 지원까지 받고 있다. 편안히 레트로 팝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는 지금, 나는 단지 그곳에 있지 않기 때문에 죽음을 피한 것뿐이다. 지구촌에서 오늘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그저 운이 좋을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근처에 도사린 죽음이, 혐오가 자신과 아예 상관없는 것처럼 죽음과 혐오의 대상자들을 끊임없이 조롱한다. ‘당할 만한’ 이유를 찾고 ‘왜 거기 있었는지’를 묻는다. 생명과 인격의 상실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 것이 쿨한 태도인 것처럼 보인다.

정혜윤이 신작 <<삶의 발명>>(초판 1쇄, 2023년 10월 23일, 위고 출판사)을 펴냈다. 내가 사랑하는 그의 전작처럼, 그는 비극만이 넘치는 지구에서 희망과 마음에 아로새길 별빛을 쓰고 있다. 그가 인간과 이 지구에 거는 희망, 그가 지구로부터 받았던 위안과 기쁨이 아주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서 읽을 때마다 ‘이것이 진짜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가?’를 질문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1944년 일본 정부가 동남아시아에 억류 중인 포로들을 감시하는 관리원들을 조선인으로 뽑아 노구치 부대 소속으로 콰이 강의 다리 등에 보낸다. 그들에게 포로 존중 의무가 담긴 제네바 협약을 알려줬을 리 없다.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냅다 사람의 뺨부터 갈기는 법을 배웠다. 그들 역시 죽지 않을 만큼 모이 수준의 식사를 하며 생활했다. 1945년 8월, 그들은 독립한 조국에 버젓이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전범 재판이었다. 삭발되고 온 몸이 벗겨진 전신 사진은 포로들에게 보내졌고 그들의 회상에 따라 포로감시원들의 생사가 결정되었다. 경성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해 포로감시원으로 콰이강의 다리에서 포로들을 대했던 조문상은 싱가포르에서 사형을 당했다. 그가 남긴 유서의 일부를 정혜윤은 집중해서 보여준다.

역시 정말로 죽고 싶지 않다. 이런 세상에 미련이 없다는 말은 본심이 아니었다. 역시 이 세상이 그립다. 이제 와서 아무 소용이 없다면 영혼만이라도 이 세상 어딘가를 떠돌고 싶다. 가능하다면 누군가의 기억 속에라도 남고 싶다. 26년이 거의 꿈에 지나지 않았다. 지극히 짧은 시간이라고 할 만하다. 이 짧은 일생 동안 무엇을 했는가. 완전히 나를 잊고 있었다. 모든 것이 흉내와 허망. 왜 좀 더 잘 살지 않았던가? 자신의 것이라고 할 만한 삶을 살았다면 좋았을 것을. 친구야! 아우야! 자신의 지혜와 사상을 가져라. 나는 지금 죽음을 앞에 두고 나의 것이 거의 없다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 유서는 조문상을 비롯한 전범 3400여 명의 명예를 위해 전범 재판과 여러 기자 회견 등을 다니면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물었던 이학래 씨가 갖고 있었다. 조문상, 감형되어 살아남은 이학래는 자신이 전범의 수치심만 안고 사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자신이 왜 감옥에 왔는지를 자문했다. 살아남은 이학래는 자신의 살아남음을 그저 수치나 행운으로 여기지 않았다. 조문상의 유서를 품고 거리에서 보는 일본인들에게 말을 걸며 도의심을 깨웠다. 조문상이 자신의 죽음이 어디서 왔는지를 통렬하게 성찰했다면 이학래는 자신이 살아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외면하지 않았다. 정혜윤은 자신의 역사를 남들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써내려가는 용감한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죽음 앞에서야 정직해지는 인간, 죽을 때에야 알게 되는 소중한 것을 지금 생각해 보자고 나를 자꾸 흔들었다. 그들을 타자로 보지 말자고, 그 시대에 살았고 그 공간에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할 수 있는 결정을 했던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나를 이해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내리는 결정이 진정 자신의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그것이 지혜와 사상이라고 준엄하게 말하고 있었다.

정혜윤 피디는 여행을 많이 다녔다. 그때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여기서도 한 보따리 풀어놓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내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미얀마의 탄바우자야트에 묻힌 상자 이야기다. 콰이 강의 다리를 달려 어린아이를 환호하게 했던 그 기차에는 일본의 패망 직후 엄청난 상자들이 실려 미얀마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보물이라고 전해졌다. 미얀마인들은 그 상자만 파묻고 사라진 일본인들을 보며 일확천금을 꿈꾸었다. 그러나 꿈을 품고 산으로 들어간 미얀마인들은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고 한다.(심심하다고? 책을 보라. 정혜윤 피디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자연이 아니고 돈이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장은 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윤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이 이야기속에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일부 인간만이 남는다. (중략) 우리가 다른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이유? 하나의 이야기밖에 모른다면 하나의 삶밖에 살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세계가 다른 삶이 가능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휴직을 하고 사두기만 하고 읽지 못했던 책을 펼쳤다. 여성-장애인-흑인-레즈비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 샌드위치 소스를 젓다가 기계에 끼어 죽은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 뉴욕 할렘가에서 어머니와 살면서 반목했다가 애정을 느끼기도 하는 여성의 이야기, 미국 사회 보장 제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몽 족의 방식을 고수하며 장애아를 키웠던 한 가족의 이야기, 이태원 참사 때 딸을 잃어 딸이 묻힌 묘에 한 달 안에 합장돼서 딸을 껴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한 어머니의 이야기 등을 읽었다. 나는 매일 커피를 마시고 쿠키를 한 입 물 때마다 이들의 얼굴을 한 번씩이나마 떠올리게 된다. 내가 힘들다고 생각했던 일들 -주력 부서 소속이 아니라고 후배들에게 (속칭) 까이던 경험-이 너무 가소롭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혜윤 피디는 내게 ‘나-나-나-나’로 이어지는 사슬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실감하게 해 주었다. 직장이나 집, 흔한 모임에서 나는 사람이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언급하지 않는다. 냉소하는 것이 똘똘해 보이기 때문이다. 냉소가 희망보다는 현실적으로 보이기에, ‘남을 생각하고 그를 위해 헌신하는 일’은 이윤이 따르지 않으므로 바보 같은 짓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가족을 의지하고 각자 도생을 위해 재테크에 헌신하는 것이 현명하다. 정혜윤은 질색한다. ‘미래는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머릿속 생각이고 꿈이다. 세상은 우리의 상상과 꿈과 생각대로 만들어지고, 상상하고 꿈꾸지 않으면 영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미래를 믿지 않으면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이 이야기꾼의 능력이다.’(219쪽)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현명하다고 믿는 지금의 사고 결과, 메인 서사를 의심하라고 한다. 삶을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구성하려면 다르게 생각하라고 한다.

나는 가소로운 절망으로부터 벗어난다. 내가 하는 일이 미래를 구성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다. 세상이 얼마나 걍팍한지 강조하는 일을 멈추기로 한다. 성공해서 경쟁자를 따돌려 좋은 직장을 얻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꾸리자는 서사를 거부하기로 한다. 지금부터는 동물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우연히 어떤 곳, 어느 시간 대에 있었기에 학살과 죽음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조롱하는 목소리를 차단하겠다. 나 그리고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은 그들과 생명이라는 연대성을 붙들고 지구에 죽음 대신 탄생을, 성공 대신 성장을, 인스타 그램 대신 책을 말하는 꿈을 꿀 것이다. 아픔을 보더라도 그것에 매몰되지 않을 것이다. 똑똑해 보이기 위해 쉽게 냉소하지 않을 테다. 당장 피우지는 못하더라도 작은 씨앗을 땅에 뿌리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다만 끊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매일 작은 씨앗을 땅에 뿌리는 것이다. 사소한 방식으로나마 지구에 희망을 길어올렸는지, 하루를 그렇게 살았는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나는 내가 몹시 좋아하는 이야기의 일부에 편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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