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구아 비바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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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生과 타인에게 보내는 러브 레터 - 대답이 돌아 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먼저 고백하는 일에 대하여

당신에게 나의 토대에 대해 말하기 위해, 나는 '지금-순간'들로만 이루어진 말들의 문장을 만든다. 그러니, 읽으라, 내가 지어낸 이야기는 졸졸 흐르는 음절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은 순수한 진동이다. 이걸 읽으라 : "여러 세기가 지나면서 나는 이집트의 비밀을 잃어버렸으니, 그때 나는 말과 그 그림자에 홀린 채, 전자들과 양자들과 중성자들의 힘찬 움직임과 함께, 경도와 위도와 고도 속을 움직여 다녔다." 내가 여기서 당신에게 쓰는 것은 하나의 회로도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 : 그저 지금인 것. 14-15쪽.

내 안 깊숙한 곳에서 들리는 음악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것은 허공에서 교차하는 기하학적인 선들로 이루어졌다. 그건 실내악이다. 실내악에는 멜로디가 없다. 그것은 침묵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나는 당신에게 실내글을 보내고 있다. 75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소설 <아구아 비바 Agua Viva>는 직역하면 '살아 있는 물'이고, 일반적으로 해파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뼈대가 없다는 공통점을 가진 이 둘은 자유로운 세계와 그 세계를 유영하는 자유로운 존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소설과 에세이와 철학서의 경계를 넘어서는 자유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간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그 이야기 안에서 우리가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지금 이 순간' 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는 관념들을 그리지 않고 도달할 수 없는 '영원'을 그린다. 아니면, '무', 영원이나 무나 결국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림 그리기를 그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에게 단단한 글쓰기를 쓴다. 나는 말을 손에 쥐고 싶다. 말은 하나의 물체일까? 나는 순간들로부터 주어진 열매의 즙을 짜낸다. 삶의 핵심에, 삶의 씨앗에 다다르려면 나 자신을 소거해야만 한다. 순간은 살아 있는 씨앗이다. 16쪽.


미래를 맞이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늘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미래가 되고, 모든 것은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된다. (......) 나는 아주 새롭고 참된 단계로 진입하면서 그 단계 자체에 호기심을 느낀다. 그건 그림이나 글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고 직접적이다. 마치 당신과 함께했던 순간들처럼. 내가 당신을 사랑했을 때, 나는 그 순간들 속으로 깊이 내려앉았고, 그랫 그것들을 지나쳐 갈 수 없었다. 그것은 주위를 둘러싼 에너지에 닿은 상태이며 나는 몸서리친다. 어딘가 미친, 미쳐버린 조화. 나도 안다, 내 시선은 세상에 완전히 항복한 원시인의 시선과 같을 것이다. 선이 굵은 선과 악만을 허용하고, 머리카락처럼 악에 뒤엉켜 있는 선에 대해서는, 선이기도 한 악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신들처럼 원시적인 시선. 17-18쪽.

따라서 글쓰기는 말을 미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 말은 말이 아닌 것을 낚는다. 행간에 있는 말 아닌 것이 미끼를 물면 글이 쓰인 것이다. 행간에 있는 것이 잡히고 나면 안심하고 말을 내버릴 수 있다. 바로 여기가 비유가 끝나는 곳이다 : 말이 아닌 것, 미끼를 물기, 말에 통합되기. 그러니 당신을 구원하는 건 넋을 놓은 글쓰기다. 31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소설가 정지돈의 인터뷰에 따르면 글쓰기는 '내가 썼나? 싶은 것, 나를 넘어서는 것, 영향속에 있으며 내것이 아닌것'이라고 한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글쓰기라는 '받아쓰기(넋을 놓은 글쓰기)‘에 대해서 사유를 이어 나간다. 그녀는 초기작 <야생의 심장 가까이>에서부터 유작 <별의 시간>에 이르기까지, 대비되는 이미지를 계속 이용하고 있다. 순간과 영원, 원시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탄생과 죽음, 나와 타인, 인간과 비인간, 과거와 미래 를 교차하며 결국 우리의 지금에 대해서 감각하기를 제안한다.

나는 관념을 추구하지 않고 직관을 이용해 나아간다 : 나는 유기체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에게 동기가 무엇이냐고 묻지 않는다. 나는 거의 고통에 가까운 강렬한 행복감 속으로 뛰어든다 - 그러고는 내 머리칼에서 솟아난 잎사귀들과 가지들로 나를 장식한다. (......)

나는 이 글을 통해 자신을 새로 만든다. 내겐 목소리가 있다. 그림의 선 속으로 뛰어들 때와 마찬가지로, 이 글쓰기 역시 내게는 계획 없는 삶이 펼치는 활동에 속한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질서를 갖고 있지 않으며, 내가 가진 질서라고는 숨 쉬는 순서 뿐이다. 나는 나를 놓아둔다.
35-36쪽.


하지만 언어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두 글자로만 이루어져 있다. 있다. 있다.
나는 그 핵심에 있다.
나는 아직 있다.
나는 살아 있는 부드러운 중심에 있다. 41-42쪽.
지금은 하나의 순간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이 온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의 노력 : 미래를 지금 여기로 데려오기. (......)

나에게 귀 기울이라, 나의 침묵을 들으라. 내가 말하는 건 절대로 내가 말하는 게 아닌 다른 무엇이다. 내가 "풍요로운 물"이라고 말할 때, 내가 말한느 건 세상의 물들 안에 있는 몸의 힘이다. 내가 진짜로 말하고 있는 그 '다른 것'을 붙잡는 게 바로 내가 한 말들이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는 그걸 붙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침묵 속의 에너지를 읽으라. 아, 나는 신과 그의 침묵이 두렵다.

나는 나 자신이다. 45-46쪽.

하지만 그 안에는 개인의 범주를 넘어선 것, 즉 보편적인 '그것'에 관한 수수께끼도 들어 있다 : 내 안에는 보편성이 있으며, 그건 가끔 내 안에서 흘러넘치곤 하는 개인적인 것들에 의해 썩거나 오염되지 않는다 : 45-46쪽.

내가 볼 수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 걸까? 나를 가장 감동체 하는 건 내가 볼 수 없는 것들이 내가 볼 수 없는데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 진실은 어딘가에 있다 : 하지만 생각해 봐야 소용없다. 나는 그걸 발견하지 못하고, 그런데도 나는 그것으로 산다. 48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글쓰기는 즉각적인 대답이나 상응하는 대답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먼저 고백하는 일이다. 상대가 영원히 묵묵부답일 수도 있는 대화, 아니면 긴 시간이 흘러서 글쓴이가 사라진 뒤에야 진행될 수도 있는 대화를 먼저 시작하는 일이다. 하지만 최고의 글은 꼭 저 동물들처럼 나타난다. 갑작스럽게, 태연자약하게, 모든 것을 말하면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 없음에 가까운 말로, 글쓰기는

자기 자신의 사막, 자기 자신의 야생일지도 모른다.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야생의 심장 가까이에서 별의 시간을 향하여

세상 속의 나에 대해, 나를 인도하며 내게 세상 자체를 가져다주는 힘에 대해, 투명한 구조가 지닌 활기찬 관능성에 대해, 다른 굴곡진 형체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굴곡들에 대해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나의 필체와 나의 회전들은 강력하고, 여름에 불어오는 자유는 그 안에 치명성을 지녔다. 살아 있는 모든 것 안에 들어 있는 에로티시즘은 공중에 바다에, 식물들 속에, 우리 안에 흩어져 있고, 또한 내 목소리의 열렬함 속에 흩어져 있어, 나는 목소리로 당신에게 글을 쓴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는 탄탄한 나무의 몸통과 뿌리가 지닌 활력이 있다. 그 뿌리는 수많은 자양분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나무에게 반응하는 땅속에, 살아 있는 땅속에 묻혀 있다. 나는 밤에 그 에너지를 호흡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환상적인 영역에서 일어난다. 환상적인 : 세상이 내 마음이 구하는 모습과 일치하는 한순간. 나는 곧 죽을 것이며 새로운 구성 요소들을 조립해 세울 것이다. 나는 아주 서툴게 자신을 표현하는 중이다. 63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생성하고 원자혁명을 초래한, 단순한 외견들의 이면에 있는 '참된 실재'를 탐색해온 현대적인 방식은 인간을 바로 그 자연세계의 객관성을 상실한 모종의 과학적 상황으로 이끌었다. 그 결과로 '객관적 실재'를 탐색하는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과 홀로 직면하게 된다"라는 사실을 불현듯 발견했다.

외계로 쏘아 올려져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실제로 물리적인 접촉을 하는 즉시 죽음을 부르게 될지도 모르는, 도구들로 가득 찬 우주선에 갇힌 우주비행사를 하이젠베르크적 인간의 상징적인 화신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 및 인간이 만든 사물과 만나지 않을 가능성이 줄어들수록 점점 더 강렬하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저 비인간적인 세계와의 조우에서 모든 인간 중심적 고려 사항들을 제거하고 싶어하는 인간형이다.
479쪽. 한나 아렌트, <과거와 미래사이 - 우주 정복과 인간의 위상>


혹은, 어쩌면 신을 영접할 자격이 가장 부족한 자들이야말로 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불안하고 거칠며 아무런 가망이 없다. 내 안에는 사랑이 있지만 나는 사랑을 사용할 줄 모른다. 가끔은 사랑이 가시처럼 생채기를 낸다. 내가 너무도 많은 사랑을 받아들였는데도 불안하다면, 그건 신이 나에게 와야만 하기 대문이다. 너무 늦기 전에 오라. 나는 살아 있는 자들이 모두 그렇듯 위험에 처해 있다. 그리고 내가 기대할 수 있는 건 내가 예상할 수 없는 것들뿐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죽기전에 평화를 누릴 것이고 또 언젠가는 삶의 섬세함을 맛보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맛을 알게 될 것이다 -- 우리가 음식의 맛을 먹고 그것을 사는 것처럼. 내 목소리가 당신 침묵의 심연으로 떨어진다. 당신은 침묵 속에서 내 글을 읽는다. 하지만 나는 이 무한한 침묵의 장에서 날개를 펼쳐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최악을 받아들이고 죽음의 핵심으로 들어선다. 그게 내가 살아 있는 이유다. 느낄 수 있는 핵심. 그리고 그것은 나를 전율케 한다. 90쪽.

분명 당신은 내게 세상을 왜 돌보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건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짊어진 의무이기 때문이다. 99쪽.

나는 늘 다가오는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음을 자랑스러워한다. 어떤 기운이 감돌고 -- 내 몸은 새로운 것이 오고 있음을 알려 주고, 나는 온통 곤두선다. (......)

우리는 가까이 앉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갑자기, 꽃들이 천천히 열리며 새 계절에 투항한다. 놀란 우리의 눈앞에서 : 봄이 오고 있다.

하지만 겨울이 오면 나는 주고 주고 또 준다. 옷을 따뜻하게 껴입는다. 그리고 따스한 내 가슴에 사람들을 품어 준다. 당신은 누군가가 따끈한 수프를 먹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지금 나는 비 오는 날들을 산다 : 주어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102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뿌리 뽑힌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해주었을 때 그 대가로 악의적인 태도, 배은망덕, 배신이 돌아올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그들의 불행을 아주 조금 함께 겪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한정된 범위 안에서 그들의 불행을 함께 겪을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럴 힘이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한정된 어떤 사람들의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불행을 감내하듯 감내해야 한다. 그것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결부된 게 아니다. 완전성이 그러하듯 생지옥의 불행에는 어느 정도 비개인적인 것이 있다.

'나'가 죽어버린 사람들에겐 그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그러나 '나'가 완전히 죽었는지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인지는 알 수가 없다. 완전히 죽지 않았다면 주사를 놓아 사람을 살리듯이 사랑으로 다시 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랑이 거만한 호의가 담기지 않은 순수한 사랑이어야 한다.
42-43쪽,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당신은 이 일이 아이가 태어나는 일과 같다는 걸 모르겠는가? 이 일은 아프다. 고통은 악화한 삶이다. 그 과정은 아프다. 존재-되어-가기는 느리고 느리며 선한 아픔이다. 될 수 있는 한 넓게 늘어나는 거니까. 그리고 당신의 피는 당신에게 감사한다. 나는 숨을 쉰다. 숨을 쉰다. (......)

어떤 사람이 숨을 쉬지 못하면 우리는 입과 입을 대고 인공호흡을 한다 : 그 사람의 입에 우리의 입을 대고 숨결을 불어 넣는다. 그러면 그 사람이 숨을 쉬기 시작한다. 이렇게 숨결을 나누는 건 내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들 가운데 하나다. 입과 입을 대는 일의 아름다움에 현기증이 일 것 같다. 102-103쪽.

지금 나는 조금만 죽게 해 달라고 당신에게 부탁해야 할 것 같다. 제발 -- 죽어도 될까?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고맙다. 105쪽.

나를 이끄는 건 하나뿐이다. 발견한다는 느낌. 생각 너머에 있는 것 너머에 있는 것들을.

지금 내가 당신에게 글을 쓰면서 진짜로 하고 있는 건 이런 것이다 : 나 자신을 따라가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스스로를 따라가기. 가끔은 그게 무척 힘들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의 성운에 불과한 것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나는 포기하고 만다.

두려움이 가셨다. 내가 하려던 말 : 나는 불협화음에서 조화를 느낀다. 멜로디는 가끔 신물이 난다. 이른바 라이트모티프(leitmotv, 음악 작품 내에서 특정 인물이나 사물, 감정 등을 상징하는 선율)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음악 소겡서,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쓰는 것 속에서, 그리고 내가 그리는 것 속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원한다. 기하학적인 줄기들이 허공에서 교차하며 서로 부조화를 -내가 이해하는 그것을 - 이루는 것. 순수한 그것. 내 존재는 완전히 열중하고 약간은 도취된다. 106-107쪽.

나는 나 자신을 조직하기에 앞서 내 내부를 와해시켜야 한다. 자유의 원초적인 상태를, 그 최초이자 덧없는 것을 체험하기 위해. 자유, 실수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설 자유.

하지만 만일 내가 세상일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해하기'를 추구하게 된다면 -- 자신을 내맡기는 행위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별안간 뛰어들어야만 하며, 그 뛰어듦은 이해와 몰이해를, 특히 몰이해를 아우를 것이다. 게다가 내가 뭐라고 감히 생각이라는 걸 하겠는가? 내가 할 일은 투항이다. 투항은 어떻게 하는 걸까?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오직 걸어야만 걷는 법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기적 -- 사실을.

근면한 거미처럼 미래를 만들어 가는 나. 내게 최고의 순간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엇이라도 만드는 때이다. 110쪽.

우연의 필연성에 의해 선택된 소수의 사람만이 삶의 초연하고 섬세한 자유를 맛본다. 그건 화병에 꽃을 어떻게 꽂아야 할지 아는 것과 같다 : 거의 쓸모 없는 지식. 그 덧없는 삶의 자유는 결코 잊혀선 안 된다 : 향기처럼 존재해야 한다.

이 삶을 사는 건 직접 살아간다기보다는 간접적으로 기억하는 일에 더 가깝다. 112-113쪽.

그리고 나는 측면에서 산다 -- 중앙의 빛이 나를 태우지 못하는 곳. 114쪽.

하지만 나는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붙잡을 수 있는 법을 거의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방법은 단 하나,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게 무엇이건 살아가는 것이다. (......) 그리고 나에게 일어나는 각각의 일들, 나는 그것들을 여기에 적음으로써 그것들을 산다. 왜냐하면 나는 이 탐색하는 손으로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오늘이 지닌 신경을, 살아서 진동하는 그 신경을. 115쪽.

나는 살아 있다. 하나의 상처럼, 육신 속의 꽃처럼, 슬픈 피의 길이 내 안에 열린다. 올곧게 직진하며, 바로 그 이유로 라고아 산타(브라질 중동부에 위치한 곳으로, 선사 인류 화석이 집중적으로 발견됨) 원주민들의 순수한 에로티시즘을 지닌 길. 나, 폭풍에 노출된 자, 돌의 뒤편에 새겨진 글귀, 나는 선사의 인류로부터 건네 받은 거대한 공간들, 시간순으로 늘어선 그 공간들 속에 있다. 기나긴 천 년 세월의 뜨거운 바람이 불어와 내 표면을 그슬린다. 122쪽.

과거의 순간에 보았던 기억을 통해 보지 않는다. 그 순간은 여기 이것이다. 숨 막히는 절박함을 지닌 순간. 그 자체로 절박한 순간. 나는 그 순간을 살고, 나는 그 순간이 다른 순간으로 넘어가는 과정 속으로 뛰어든다. 이 둘은 동시에 이루어진다. 123쪽.

교회 정문 속에 있는 나의 대칭은 한곳을 향해 모이는 것이며, 이미 완성된 것이며, 그러면서도 독단적이지는 않다. 거기에는 두 비대칭이 대칭 속에서 만나기를 바라는 희망이 담겨 있다. 그것이 제3의 해법이다 : 통합. 그 교회 때문에 아무런 군더더기도 없어 보이는 건 어쩌면 그때문인지도 모른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내보이는 무책임한 대담성이 아닌, 살고 또다시 살았던 그 무언가가 지닌 섬세함. 아니, 당신이 거기서 발견하는 건 고요함은 아니다. 부식되었을지언정 아직 서 있는 그 문은 치열한 싸움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짙은 색깔들 속에는 구부러진 채로도 계속 나아가는 그 무엇 특유의 납빛이 있다. 내 십자가들은 여러 세기에 걸친 고행으로 구부러졌다. 그 문은 애초에 하나의 전조였을까, 제단의 전조? 문의 침묵. 거기에 서린 푸른 녹은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그 무언가의 색을, 그리고 황혼의 강렬함을 지닌다. 124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캠벨 : '되기' 라는 것은 단편적입니다만 '존재하기'는 전체적인 겁니다.

모이어스 : 아름다움은, '살아 있음'의 환희의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캠벨 : 순간 순간의 삶이 그런 체험의 연속이어야 합니다.

'이 순간'이 바로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410쪽, 조셉 캠벨, 빌 마이어스, <신화의 힘>



인간은 자신의 구체적인 '있음'의 온전한 현실태로서 과거와 미래 사이의 간극 속에서 사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지구상에 현존하는 것과 동시에 발생한다. 시간의 심장부에 마련되는 이 작은 비-시공간(non-time-space)은 단지 암시될 수 있을 뿐, 과거로부터 승계하거나 물려줄 수 없다. 새로운 세대는 물론이고 새로 태어난 사람은 실제로 자기 자신을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 사이에 틈입시킴으로써 이 통로를 발견해야만 하고 꾸준히 그것을 새롭게 닦아야 한다.
92-93쪽, 한나 아렌트, <과거와 미래 사이 - 서문 : 과거와 미래 사이의 틈>


은총과 지복아래 -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사라지는

지금 -- 침묵과 약간의 경이.
왜냐하면 7월 25일 오늘 아침 다섯 시, 나는 은총의 상태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그건 갑작스러운 느낌이었지만 너무도 온화했다. 공중에서 광휘가 미소 짓고 있었다 : 정확히 그것이었다. 그건 세상의 한숨이었다.

내가 말하고 있는 은총의 상태는 어디에도 쓰이지 않는다. 그 상태는 마치 우리로 하여금 그저 우리 자신이 정말로 존재하고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게 해 주려고 찾아오는 듯하다. 이 상태, 사람들과 사물들이 발산하는 평온한 행복감 너머에 있는 상태, 거기에는 맑음이 있고, 나는 그 맑음을 무중력이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은총 안에서는 모든 게 너무도 가볍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게 선물임을 느낀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체험하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고 의심할 수 없는 현재를, 기적적이면서 물질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지금을.

이 은총은 그와 다른 것, 그저 평범한 자가 얻는 은총이다. 이 은총은 불현듯 실재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는 평범하며, 인간이며, 알아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식의 명상도 하고 있지 않았으며, 아무런 종교적 독실함도 갖고 있지 않았다. 나는 아침을 먹을 후, 재떨이 위에서 타들어 가는 담배와 함께, 그저 앉아서 살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약을 한 게 아니었으며 환각을 느끼지도 않았다. 나는 내가 누구고 다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았다.

'자유'라고 불리는 생각은 생각하는 행위 가운데 자유로운 것이다. 너무도 자유로워서 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조차 생각의 작자가 없는 것처럼 느낄 정도다.

진정한 생각은 작자를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지복도 그와 똑같은 특성을 지녔다. 지복은 생각이라는 행위가 형태의 필요성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순간 시작된다. 지복은 '생각하기 -느끼기'가 생각을 필요로 하는 마음을 뛰어넘을 때,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 그가 '무'의 장엄함에 가까워진 자신을 발견할 때 시작된다. 나는 '무'가 아니라 '모든 것'이라도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양이고 양은 처음부터 한계를 지닌다. 진정한 한량없음은 '무'이다. 아무런 경계도 없이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 - 느낌을 흩뿌릴 수 있는.

이 지복 자체는 종교적이지도 세속적이지도 않다. (......) 내 말은, 어떤 사람이 머리로 하는 생각과 이 '생각 - 느낌' 은 서로 극도의 불통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아무런 궤변이나 역설 없이 말하건데, 그 불통 지점은 그에게 있어 가장 훌륭한 소통을 제공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 자신과 소통한 것이다.

우리를 이 비어 있으면서도 충만한 생각 가까이로 데려가는 건 바로 잠이다. 나는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이 경우, 꿈은 일차적인 사고에 해당할 것이다. 나는 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잠은 당신 자신을 추상화한 다음 '무' 속으로 흩뿌린다.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은총의 상태가 주는 자유 다음에는 상상의 자유가 올 수 있다. 정확히 이 순간 나는 자유롭다.
그리고 자유 너머에서, 그 공허 너머에서, 나는 반복되는 음악적 파동 가운데 가장 고요한 것을 만들어 낸다. 그 광기, 자유로운 창작의 광기.
141-148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캠벨 : 그러면 누가 나에게, "그럼 당신은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오?"라고 묻겠지요. 내 대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 입니다. 412쪽.

캠벨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227쪽.
조셉 캠벨, 빌 마이어스, <신화의 힘>


일차적인 사고는 말로 이루어진다. '자유'는 말의 속박으로부터 스스로를 자유케 한다. 150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415쪽, 조셉 캠벨, <신화의 힘>

이 순간 나는 무엇인가? 어둡고 습한 새벽에 건조하게 메아리치는 타자기다. (......) 나는 생각 - 느낌 너머의 너머에 있는 물체 안에 있는 것의 이름으로 저항한다. 나는 절박한 물체다. 141쪽.

나는 인간의 조건에 신물이 난 자다. 나는 거역한다 : 더 이상 인간이고 싶지 않다. 누구일까? 내가 몹시도 부러워하는 동물들- (......) 내가 갖지 못한 건 우리가 아는 그 진실을 말할 용기다. 151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우리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 하고 통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형이상학적 진실일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211쪽, 조셉 캠벨, 빌 마이어스, <신화의 힘>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때로는 눈물이 났다. 알 수 없는 주문 같은 말들을 따라 읽어가며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는데, 그것은 작가의 말을 이해하려는 시도 보다, 그저 그 순간을 감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척 급해지기도 했는데, 그 순간에 떠오르는 것들을 붙잡고 싶고, 감정은 밀려오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내가 읽었던 책들이 밀려오고, 그 책의 저자들을 모두를 불러내 대화를 하고 싶고, 더 나아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를 불러내 내가 이해한게 맞는지 확인 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왜 쓰냐"고 물으면 "당신은 왜 물을 마시냐"고 되묻는 사람이다. 그래서 확신이 없는 불안한 마음을 내려놓고, 나에게 자유를 주었다. 내가 떠오른 대로, 오로지 지금에 의지해서 적어나가는 것. 끊임없이 그저 받아쓰기를 해 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첫 작품, <야생의 심장 가까이>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으리라 짐작되는 그녀의 작품 세계는 <별의 시간>에서 결국 마무리 되지만, 이 <아구아 비바>가 그 '메탁시(사이)'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대립되는 개념과 이미지를 꺼내 보이면서도 역설적이면서 포용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영역을 보여주는 그녀의 글쓰기는 신화, 종교, 양자 역학을 넘어 인간과 비인간의 영역까지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이어나가는 힘은 바로 '사랑'에 있다. 누군가에게 계속 말을 거는 형식의 이 소설은 앞에서 말했듯이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걸 알면서도 보내는 러브레터 같다.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 과거와 미래 보다 '있음'에 집중함으로써 '말을 거는 것'이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는 듯 하기도 하다. 두 비대칭이 대칭속에서 만나기를 희망하며, 불협 화음에서 조화를 느끼고, 우리의 입에 그녀의 입을 대고 숨결을 불어 넣는 인공 호흡을 해주며, 지복을 좇기를 바라는 그녀의 이야기가 내가 '살아 있음 viva’을 느끼게 해준다.



모든 건 끝나지만 내가 당신에게 쓰고 있는 것은 계속 된다. 그것은 좋다, 아주 좋다. 가장 좋은 건 아직 쓰이지 않은 것이다. 행간에 있는 것. 155쪽
내가 당신에게 쓰는 이것은 계속되며 나는 홀려 있다. 156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참고 문헌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조셉 캠벨, 빌 모이어스, <신화의 힘>
한나 아렌트, <과거와 미래사이>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야생의 심장 가까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별의 시간>


#도서협찬 #도서제공  #소설책추천 #소설추천 #암실문고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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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 바우쉬 - 끝나지 않을 몸짓 현대 예술의 거장
마리온 마이어 지음, 이준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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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 정신을 중력과 화해시키고 건축의 사유를 무게에 주고 있다면, 무용은 몸을 가벼움과 화해 시키고 몸에게 우아함을 부여한다. "무용은 날개다" 라고 말라르메는 말한다. 순수 예술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무용보다 더 완벽한 미적 공존관계를 구현하는 몸과 정신의 지성을 더 잘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무용은 살이 정신이 되는 순간, 몸이 자신의 타자로 변형되고 몸이 자신의 놀라운 역량을 폭발시키는 순간이다. 샹탈 자케, <몸>

샹탈 자케의 글을 보면 무용은 단순히 이야기나 신체의 아름다움을 전시하는 행위가 아니라, '몸이 자신의 타자로 변형되고, 몸이 자신의 놀라운 역량을 폭발시키는 순간'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우리의 인식의 지평을 넘어선 작품을 만든 무용가들 중 하나가 피나 바우쉬이다. 피나 바우쉬는 어린시절부터 사람을 관찰하는걸 좋아했고, 우연히 어린이 발레단을 시작으로 무용 영재로서 엘리트 코스만 밝았으며, 뉴욕 줄리어드 음악 학교에서 2년여간 공부하고 부퍼탈시에 돌아와 무용 단장이 되고, 탄츠테아터를 만들게 된다. 탄츠테아터는 무용과 연극의 합성어이며, 연극과 춤을 구별할 수 없는 개념으로 관객의 거부와 저항을 감내하고서도 완전히 새로운 장르를 창조함으로써, 피나 바우쉬는 탄츠테아터 부퍼탈을 이끌며 다시 독일 땅에서 모던 댄스를 부활시켰다. 계속 논란을 일으키고, 늘 새로운 도전을 하며 작품 세계를 확장했던 그녀는 암 선고를 받은지 5일뒤에 죽었으나, 그녀의 정신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넬켄 라인Nelken line> 이라는 퍼포먼스를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녀는 작품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소소한 에피소드에 일상을 반영했다. 에피소드들은 때로 공격적이고 난폭하다가 다시 부드럽고 시적이며 항상 마음을 움직이고, 절대로 감동은 주지 못하는 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누구나 알아채는 너무나도 많은 인간적인 것과 참된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군무가 독무와 교대되고, 작은 연극 장면이 춤과 번갈아 나타난다. 까다로운 초기 작품들의 고통스럽고 당혹스러운 측면은 1990년대 이후로는 유쾌함과 생의 기쁨을 발산하고 무용수들이 마법 같은 독무로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 작품들로 바뀌었다.

안무가는 주연과 조연을 구분하지 않았다. 모두 똑같이 중요했다. 초기 작품에서는 항상 앙상블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했다. 나중에는 무용수들의 선별된 작품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활용되지 않아 남겨지는 일은 없었다. 피나 바우쉬는 정기적으로 옛 작품들을 레퍼토리에 다시 넣었는데, 이는 공이 많이 드는 공연 연습과 때로 배역 교체와 연관되었다.

피나 바우쉬는 공연 연습 중에 "아름다운 것들은 뭔가 움직임과 연관되어 있다니, 희한하죠."라고 말한 적이 있다. 춤은 그녀에게 폭넓은 개념이었다. "그것은 거의 모든 것일 수 있답니다. 특정한 의식, 특정한 내면적, 신체적 태도, 매우 높은 정확성과 관련 되어 있어요. 앎, 호흡, 디테일 하나하나와 말이예요. 언제나 '어떻게'와 관련되어 있지요. 춤인 게 너무 많아요. 완전히 반대되는 것들도요." 그녀가 흔치 않은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말이다. 49-50쪽.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많은 강한 여성 등장인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페미니즘이라,- 어쩌면 일종의 유행어가 되어서요- 그러면 나는 언제나 도로 내 달팽이 집으로 들어가 버리거든요. 또, 거기에서 종종 내가 원래 좋게 여기지 않는 구분이 이루어지기 때문일 수도 있고요. 그건 이따금 함께하기 대신 대척하기 처럼 들려요." 50-51쪽.


그녀는 어린 시절, 삼남매의 막내로 많은 자유를 누렸고, 부모님이 운영하는 여관에서 늦게까지 깨어있을 수 있었다. 덕분에 여관 테이블 밑에 숨어 많은 손님들을 관찰하며 연구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손님들의 권유로 어린이 발레단을 접하고 발레에 입문하게 된다. 그녀는 일찍부터 재능을 인정 받아 장학생으로 폴크방슐레(오늘날 폴크방예술대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그녀에게는 모든 무용 스타일을 가르치는 교육이 지닌 폭넓은 토대뿐만 아니라 곧 자신이 춤꾼으로서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지를 알아낸 것도 중요했다. 내가 할 말이 무엇이고, 나를 어떤 방향으로 나를 발전시켜 나가야 할지를 늘 고민했다.
그녀는 독일고등교육진흥원의 장학금 받아 뉴욕의 줄리아드스쿨에 진학해 뉴욕에 머무르게 된다. 뉴욕 생활은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쳐, 그녀는 모든게 뒤섞이는 사람들과 도시의 모든 문화적 영향을 빨아들였다. 낯선 것은 매우 매력적이었고, 다양성과 문화의 공존에 대한 동경은 평생동안 그녀를 특징지었다. 그녀는 나중에 자신의 무용단에서도 다문화적인 영향들을 높이 평가하게 된다.
그녀는 고전 발레와 반대로 좀 더 현실에 가까운 표현을 선호했다. 우리가 왜 무엇인가를 하는지, 동기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무용수로서의 자기 이해가 중요했다. "나에게 춤은 나를 가장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형식이에요. 나에게 가장 가까운 언어예요." 라고 말한다.
그녀는 1973년 이후 탄츠테아터라는 새로운 개념을 내세우고 탄츠테아터 단장이 된다. 그녀는 쏟아지는 일과 기대에 대한 부담 속에서 자신의 창의적인 직감을 따라야 하고 사전에 구상들로 스스로를 너무 확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계획된 작업 도중에 완전히 다른 것들에도 갑자기 흥미가 생겼습니다. 그것들은 계획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는 점을 점차 알게 되었지요. 계획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어디로 데려갈지 전혀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에 끼어들 것이냐."
이러한 개방성은 그녀의 성공 비결 중 하나가 된다. 그녀의 작업은 틀도 없고 확정된 음악도 없고 무대디자인도 없으며 이야기도 없고, 오로지 모호한 주제만 있었는데, 그녀는 무용수들에게 질문하는 것으로 모호한 주제에 접근했다. 이런 열린 태도 덕분에 무용수들은 무대에 대해 주인 의식을 갖게 되고, 예측할 수 없는 각자의 생명력 있는 아이디어들이 난무하며, 모호함은 미완 보다 확장의 창작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그녀는 감정이 자신에게 하는 말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이로써 대부분 옳은 쪽을 택했다. 당시 그녀는 공연 시즌당 두 작품을 만들었다. 그것은 이 초창기에 자신의 엄청난 창조성을 역설하는, 그리고 어쩌면 또한 자신을 의심하는 모든 이에게 이를 보여 주려는 야심을 역설하는 고된 일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기치로 <일곱 대죄>(1976)의 2부인 <두려워하지 말라>에서 피나 바우쉬는 더욱 분명하게 탄츠테아터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일곱 대죄>에서 남성들은 여성으로 분장한 채 등장한다. 무용수들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고, 자신들이 관객인양 행동하기도 한다. 바우쉬는 연기자들을 역할에서 반어적으로 벗어나게 만든다.

양성구유에 대해 침묵하기를 강요당하던 그리스, 로마 시대에 이어 17세기 초까지 양성구유는 화형대에 처해야 할 악마적 현상처럼 간주되었다.
인간 종은 엄격하게 둘로 나뉘지 않으며, 이원성으로 환원이 불가능한 다양성을 인정한다. 우리가 양성구유라고 부르는 것은 드문 경우들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범례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젠더의 성별적 구분을 다시금 문제시 하고, 남성과 여성의 전통적 이분법 바깥에서 인간성을 보다 넓게 사유할 것을 권하기 때문이다. 샹탈 자케, <몸>

그녀의 작품에서 부조리한 무대장치와 이를 동반하는 인물들의 과장된 표현은 작품의 희극성에 종종 이바지한다. 예컨데 <일곱 대죄>나 <카네이션>, <대나무 블루스>에서 여성복을 입은 남자들과 역할 교환은 낯설게 하는 효과를 만들어 내고, 역할에 대한 상투적인 표상들의 배경에 의문을 제기한다. 마리온 치토(의상 담당자) 는 "나는 드레스를 입은 남자들을 좋아해요", "그럴 때면 언제나 의상 셀렉션이 준비되어 있지요"라고 털어놓는다. 피나 바우쉬의 작품의 '드레스를 입은 남자들'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양성구유성'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분법 바깥에서 인간성을 보다 넓게 사유하기를 권하는 피나 바우쉬의 예술 철학을 반영하는 듯 하다.
피나 바우쉬의 호기심은 그녀를 항상 더 멀리 이끌었다. 그녀는 탐구욕에서 무엇이 가능한지를 시험해 보고 배우고 발전하고자 했다. 그녀는 "자신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표현하고자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반드시 말해야만 하는 것을 말이에요. 하지만 말로 말고요.- 나는 결코 답을 가지고 있었던 적이 없답니다." 이로부터 그녀의 질문하는 기술이 개발되었고, 이는 그녀의 열린 작업 방식에 불을 붙였다. 이렇게 그녀는 작품이 어느 방향으로 전개되는지 정확히 알 때까지 우선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이때 질문은 그녀가 적절한 표현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78년에 초연된 <콘탁트호프>는 피나바우쉬의 작품에서 특별한 위상을 차지한다. 왜냐하면 2000년에 <'65세' 이상 신사 숙녀>버전이 나오고, 2008년에 <'14세' 이상 십 대> 버전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부퍼탈 주민, 연기자도 아니고 무용수도 아닌 그냥 부퍼탈 주민들에게 역할을 맡겼다. 이 작품은 미학이 얼마나 시대 초월적인지, 피나 바우쉬가 커플, 인간관계, 공동체에 관해 전한 메시지가 얼마나 보편타당한지, 어떻게 모든 세대가 그 작품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이 작품은 앙상블 작품에 가깝고 독무가 많지 않기 때문에 비전문가에게 특히 적합하기도 했다.
피나 바우쉬는 모든 것에 확실함이란 없다고 말한다. "나는 무엇인가를 시작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전혀 몰라요. 그것은 그저 두려움만은 아니에요. 뭔가 아주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지 모른다는 희망이기도 하답니다."

나는 사람들이 희망하기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라고 피나 바우쉬가 밝힌 바 있다. 작품들에서 희극성이 비극성과 번갈아 나오며, 그럴 때면 유머가 종종 고통스럽고 잔혹한 장면들을 비로소 견딜 만하게 해 준다. 그녀에게는 항상 정서성이 매우 중요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면 지루해지죠. (...) 명랑성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인생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작품에는 언제나 그 반대도 있답니다. 그것은 조화를 추구하는 것과도 약간 연관이 있어요. 그러나 희극성은 그녀에게 무조건 필수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우울한 단계가 오히려 명랑한 작품들을 낳고, 평온한 시기는 되레 절망과 슬픔을 강화하더라고요. 원한다면, 일종의 균형이라고 해도 좋겠네요." 136쪽.

1980년 남미 순회 공연중에 그녀는 남편을 만나고 1981년에 아들을 낳는다. 그리고 1983년에는 에센 폴크방 대학교의 무용과 학과장 직위를 넘겨받게 된다. 어머니와 교수로서의 추가적인 부담에도 불구하고 피나 바우쉬는 놀랍도록 창조적이고 생산적이었다. 1980년대 전반부터 탄생한 작품들을 탄츠테아터의 가장 특징적인 작품에 속한다. <넬켄Nelken(이하 카네이션)>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자주 상연되었으며, <1980>과 <산에서 통곡소리 들리라니>는 탄츠테아터 장르를 명료하게 보여 주는 모범 사례다.

<카네이션>은 1982년 말에 부퍼탈 오페라 하우스에서 초연되는데, 남미 순회공연 중에 칠레에서 보았던 카네이션 들판이 피나 바우쉬에게 종이 카네이션으로 이루어진 무대디자인에 대한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꿈속 풍경 같은 효과를 낸다. 이 작품은 탄츠테아터의 첫번째 전성기에서 가장 밀도 높고 감동적인 작품에 속하며, 따라서 레퍼토리에서 자주 발견된다.

<카네이션>에서도 여성복을 입은 남성 무용수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거듭 여성 옷차림으로 춤을 춰 보이면서 테이블 위 노출된 여성들을 자리에서 밀어낸다. 그러자 여성들은 테이블 밑에서 계속 춤을 출 수 밖에 없다. 억압을 말없이 작동한다. 단정했던 카네이션 들판은 쑥대밭이 되고 무용수들은 만신창이가 된다. 보이지 않는 억압 앞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무너진다. 한편 자극 적인 볼거리를 끝없이 요구하는 관객은 무대 위 공연자의 존엄에 상처를 입힌다. 그리고 그 상황을 관객에게 친절히 일깨워 줌으로써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 이 아름다운 낙원에서는 사랑은 커녕 소통조차 어렵다. 바우슈의 작품은 무용이지만 춤이 별로 없다는 아이러니와 더불어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카네이션>은 통속 드라마에서 클리셰를 모두 걷어낸 후의 잔해라고 할 수 있다. 사랑받고 싶은 욕구, 두려움과 외로움, 남녀 간의 폭력, 인간에 대한 억압, 소통의 어려움 등은 피나 바우쉬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로서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을 건드린다. 이 작품은 무용수가 아니라 인간을, 동작이 아니라 삶을 보여준다. <카네이션>의 마지막 장면에서 무용수들을 무대 앞으로 나와 한 줄로 서서 자신이 왜 무용수가 되었는지 말한다. 공연하는 국가마다 그 나라의 언어로 더듬더듬 건네는 말에서 관객들은 캐릭터가 아닌 인간을 바라보게 된다.

신체가 하는 것의 일부는 다른 사람, 혹은 한 무리의 타자들의 신체로 스스로를 열어젖히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이유에서 신체는 스스로 닫혀 있는 실체가 아니다. 신체는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자기 자신 밖에 있고, 자신의 환경을 탐험하거나 항해하면서, 감각을 통해 확장되거나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감각을 통해 박탈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이와의 관계 속에서 상실될 수 있는 존재라면, 혹은 우리의 촉감, 운동성, 촉각, 시각, 후각, 청각 능력이 우리를 넘어서는 행동을 하도록 만든다면, 이는 신체가 자기 자리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고 이런식의 박탈이 더 일반적인 신체적 감각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사회 운동에 결집한 신체들이 신체의 사회적 연대를 단언하고 있음은 전혀 놀랍지 않은, 당연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보고자 하는 세계를 실행하거나 우리를 죽이고 있는 세계들을 거부하는 사소한 방식일 수 있다. 이것이 의도적 노출과 집요한 존속의 형태, 즉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는 동시에 행위하고 있다는 동시성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살 만한 삶에 대한 신체적 차원의 요구인 것은 아닐까? 주디스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2009년, 피나 바우쉬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한동안의 혼란과 애도 후 바우쉬의 아들인 롤프 살로몬이 피나 바우쉬 재단을 설립하고 그녀를 기리는 프로젝트인 <넬켄 라인>을 시작하게 된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작품, <카네이션>의 마지막에 나오는 '사계 행진'을 모티프로 한다. 넬켄라인 프로젝트는 모든 이를 행진에 초대한다. 제스처를 자세하게 설명한 동영상의 링크가 재단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고, 이를 보고 스스로 만든 동영상을 보내면 재단 계정에 공개된다. 우리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행진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들은 모두 다른 상황에서 모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거장에게 압도되지 않고, 누구나 춤에 합류할 수 있다는 메시지, 그녀를 애도하며 우리의 삶도 돌보는 방식이 아닐까. 우리는 넬켄라인에 함께하는 신체들의 사회적 연대로 우리를 죽이고 있는 세계들을 거부하는 동시에 헤테로토피아의 공간-카네이션밭-을 넘나들며 몸에 갇힌 자아를 해방시켜 깊숙한 내면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피나 바우쉬는 참여를 통해서만 찾아갈 수 있는,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며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지만 두려움을 넘어선 뭔가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기대하면서.

#도서협찬 #을유문화사 #피나바우쉬 #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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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암실문고
브라이언 무어 지음, 고유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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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망상 이후 광막한 광야에서의 추락, 그리고 돌아온 탕아처럼

이 소설은 주인공 주디스 헌이 아일랜드 벨파스트 지역 대학가의 하숙집에 거주하게 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녀의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그 후 이모가 그녀를 데려와 이 지역에서 계속 살아왔는데, 소설은 이모의 죽음 후부터 보여진다. 그녀는 당시 결혼 적령기의 나이를 넘어선 독신녀이자, 피아노 선생님, 카톨릭 신자, 그리고 알콜 중독자이다. 이 소설에서 술에 대한 묘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꽤 큰 편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술 중독자로서의 그녀의 기행의 나열들이 아니라, 그녀의 외로움, 현실의 벽, 열정, 혼란 등이 그 이면에 깔려있는 듯 보인다.

그녀의 생활은 애처롭고 궁핍하다. 뱃속이 너덜거릴 정도로 절식을 해야했다. (결국 오후 세시 무렵에 무너지기는 했지만.) 피아노 선생님인 그녀는 재능이 없는 학생에게마저도 인정을 받지 못한다. 친구 부부네 아이들은 그녀가 집에 찾아 오면, “피난 준비 하세요.”를 외치고, 무엇보다 그녀는 하숙집 주인의 오빠이자, 뉴욕에서 온 구원자(?), 제임스 매든이 청혼할거라는 망상에 빠져 허우적거리기까지 한다.

나는 그녀의 삶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오즈의 마법사>가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도로시에 대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녀가 늘 침대 머리맡에 두는 사진과 그림에 있다. 사진은 그녀가 어릴 때 부모를 잃자 그녀를 돌보아 준 이모의 사진이다. 그리고 그림은 예수의 그림이다. 그녀는 “두 분이 나와 함께 있고, 날 지켜 주고 있다면, 새로운 곳도 집이 되는 거야.”라고 읊조린다. 그 말은 새로운 시작이자, 저주 같은 주문이기도 했다. 이 소설 속에서 ‘집’은 이중적 의미를 가져온다. 그녀가 주체적으로 삶을 시작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녀를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족쇄 같은 공간이기도 하다. 도로시가 모험을 떠나고 와서 “There’s no place like home” 이라는 것이 언젠가부터 자조적인 체념으로 들리는데, 그 말은 주디스의 집에 대한 독백에도 적용 되는 것 같다. 유일신과 가족이 없는 세계가 그녀의 진정한 장소임을 모른채, 방랑하기 보다 다시 익숙한 곳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주디스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이모와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 벨파스트에서 살았다. 그녀는 어느덧 나이가 들어 정신이 온전치 않은 이모를 부양하다가 의사의 조언에 따라 이모를 요양원에 보내기로 한다. 그러나 이모는 “난 네가 시설에 갇히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널 거뒀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날 정신병원에 가둘 줄은 꿈에도 몰랐지.” 라며 주디스의 결정을 되돌리게 한다. 그 후 주디스는 화를 내고 악을 쓰는 이모를 5년여를 더 돌보아야 했고, 돌아가신 후 장례식을 치르지만, 주디스에게 남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하숙집을 구해, 그곳에서 만난 하숙집 주인의 오빠이자, 뉴욕에서 온, 그녀에게 유일하게 친절하게 말을 걸어 준, 제임스 매든에게 푹 빠져 뉴욕에 가는 꿈을 꾸게 된다. 뉴욕은 그녀의 에메랄드 시티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에메랄드 시티로 향하는 티켓을 준비하는 대신, 마녀의 유혹 처럼 술의 유혹에 자꾸만 빠지게 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무안한 일이 생길때마다 마치 위기에 빠진 도로시가 구두로 발을 굴러 장면 전환을 하듯, 뾰족한 신발의 눈(단추)을 바라본다. 그럼에도 그녀는 위기에서 탈출 하지 못하고 끔찍하고 고약한 사람들에 대한 실망감과 자신에 대한 패배감으로 더욱 술에 빠져든다. 술은 치명적 유혹이자 그녀의 즐거움이기도 했다. 사실 그녀는 술을 마시고 시끄럽게 노래를 했을 뿐 이었는데 그녀를 향한 세상의 잣대는 너무도 엄격했다. 게다가 그녀를 뉴욕으로 데려다 줄 수 있을 것 같았던 남자, 제임스 매든은 오즈의 마법사 처럼 가짜-돈도 많지 않고, 그녀와 결혼할 생각은 더더욱 없는-임이 드러났기에 그녀는 더욱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녀가 술로 인해 고통 받고 주변 사람들과 불화를 일으키며 일을 벌리지만, 그것이 그녀의 삶에서 생동하는 에너지일 수도 있을 텐데, 그 에너지는 더 나아가지 못했고, 주변의 공감과 지지를 전혀 얻지 못했다. 그녀는 카톨릭 신자이지만, 감실에 있는 예수님의 성체를 ‘빵 쪼가리’라고도 내뱉을 만큼 자신의 길들여진 생각을 바꿀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친구의 요양원에 무단 침입 하는 소동을 벌이고, 친한 친구 부부 집에 가서 In vino veritas를 핑계 삼아 돌이킬 수 없는 말을 하고, 술에 취한채 성당을 찾아가 제단을 무너뜨린다. 그녀는 결국 신부님과 수녀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돌아온 탕아처럼 요양원에 안착한다. 그리고 눈같은 작은 단추가 달린 신발과 눈을 마주치자, 익숙한 것들에 안도 한다. 신발은 그녀를 더 멀리 데려가지 못했다. “두 분이 나와 함께 있고, 날 지켜 주고 있다면, 새로운 곳도 집이 되는 거야.” 라는 그녀의 마지막 말은 자족과 체념, 신념과 순응사이에서 질문을 던지게 한다. Mea culpa, Mea máxima culpa (제 탓이오, 저의 큰 탓이옵니다.) 로 귀결되기에는 너무나 억울한, 그녀가 느꼈을 사회적 압력도 너무나 안타깝다.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은 저자 브라이언 무어가 몇번의 미국 출판사로부터 출판을 거절당한 뒤에 영국에서 비로소 출간될 수 있었던 소설이라고 한다. 그 후에 그는 부커상 후보에 여러 번 오를 뿐 아니라 20세기의 위대한 작가로도 칭송 받게 된다. 그리고 그의 소설들은 영화로도 제작 되었는데, 특히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은 매기 스미스가 주디스 헌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거의 70여년전 이야기지만, 지금 보기에 그녀의 삶은 오히려 파격적으로 보이고, 한편 그녀 같은 삶을 사는 여성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보니 최근 영화 <소공녀>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녀는 가난했고 집이 없었고, 환대 받지 못했지만, 친절했고, 친구와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했고, 그 사이엔 술이 있었다. 가진 돈을 다 털어서라도 빵보다 더 사고 싶었던, 주디스의 말에 따르면, “나를 위로해 줄 무언가” 혹은 “이 모든 시련을 좀 더 철학적으로 바라보고 더욱 꼼꼼히 따져 보기 위한, 이성을 거절하는 힘이 있는 각성제”, 위스키 한잔이.


#도서협찬 #을유문화사 #암실문고 #브라이언무어 #주디스헌의외로운열정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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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원 을유세계문학전집 125
버나드 맬러머드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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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기억하며, 미래를 기억하기 - 선의로 비롯된 공동의 기억을 향하여

<점원>에서 배경이 되는 식료품 가게의 주인인 모리스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려고 하지만, 엄격하게 규율을 지키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스스로. 유대인임을 잊지 않으면서도, 인종과 계급에 상관없이 타인에게 나름대로 매일의 선의를 베풀며 살아간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3센트어치씩 빵을 사가는 폴란드 여인을 위해 새벽 6시에 가게 문을 열고(7-8쪽.), “술주정뱅이 여자”의 딸에게는 외상으로 주고, 없었던 셈 치고(8-9쪽.), 다른 가게에 간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단골 손님에게는 햄을 한 조각 더 준다(38쪽.).
어느날 강도 2인조가 가게에 침입해 모리스는 강도가 휘두른 총에 머리를 맞게 된다. 그때 강도가 한 말은 “넌 거짓말쟁이 유대인이야.”(39쪽.)이다. 모리스 외에 다른 유대인들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다른 인종과 그들을 구별짓지만, 한편 그런 구별짓기 때문에 이렇게 구별짓기를 당하기도 한다. 그는 가게 문을 열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그 강도 중 한명이었던 프랭크를 점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프랭크는 비록 강도짓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가난함을 즐기고 선행을 베푼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이야기를 떠올리며, “이분 같은 사람에 대한 글을 읽을 때마다 가슴속에 어떤 감정이 생기는데, 울지 않으려고 그걸 참아 내곤 해요.”(47쪽.) 라고 말할 줄 안다. 그는 비록 나쁜 짓을 했을지언정, 도덕성이나 공감 능력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프랭크에게 모리스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현현이다. 성 프란체스코의 새들에게 설교하는 용기’는 모리스가 다쳐서 쉬어야 하는 와중에도 매일 아침 일찍 빵을 사러오는 ‘유대인 혐오자’ 폴란드인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에 견줄 수 있다. 또 가진걸 다 주고 가난함을 즐기던, 선하게 태어나는 재능을 지닌 성 프란체스코는, ‘가난함을 알아볼 줄 아는 모리스(52쪽.)’와 무척 닮았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선의를 배워가며 자신의 삶의 적용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반성하는 일이 과거를 기억하는 행위라면 프랭크가 계속 배움과 뉴욕대에 대해 상기하는 대목은 결국 미래를 기억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프랭크는 “나 처럼 되지 말게나.” (124쪽.)라고 말하는 모리스로부터 한발 짝 더 성장한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삶의 윤리적 지침을 마련해 간다. 자기 반성과 자아 실현 이라는, ‘제대로 된 삶’을 향한 끊임 없는 추구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나 이탈리아인의 기질과는 상관 없이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의 행동을 모방하고 행동을 부추김으로써 새로운 공동의 기억을 만들어 가게 된다.

정체성과 인격에 대한 고찰 - 우리는 한 사람에 대해 단 한번의 행동으로 그 사람에 대해 쉽게 판단할 수 있는가

모리스는 유대인으로서의 전형적인 삶을 살지 않고, 프랭크는 모범시민으로서의 전형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 우리는 이야기를 읽으며, 모리스가 완벽하게 율법을 지키며 사는 유대인이라거나, 프랭크는 범법 행위를 절대로 저지르지 않는 무결한 시민이라고 바라보기 힘들다. 하지만 모리스는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믿으며 프랭크는 자신의 소소한 일탈 행위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인격을 다 설명해줄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 아버지는 유대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건 단지 선한 마음이라고 말씀하시곤 했지.”
“나한테는 돼지를 먹는지 아닌지가 중요하지는 않아. 어떤 유대인에게는 중요하지만 나한테는 아니지. 가끔 배고플 때 햄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고, 그 누구도 나를 유대인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어. 하지만 만일 내가 율법을 잊는다면, 그들은 내가 유대인이 아니라고 할 거고, 난 그들 말을 믿겠지. 그게 의미하는 바는 옳은 일을 하고, 정직하고, 선하게 사는 거야. 그게 의미하는 바는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는 말이지. 우리 삶은 충분히 힘들어. 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혀야만 하지? 자네나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잘돼야 하잖아(……).” (184-185쪽.)

랍비는 기도서를 내려다 봤고, 그리고 다시 눈을 들었다.
“유대인이 죽을 때, 누가 그 사람이 유대인인지 묻습니까? 그는 유대인 입니다. 우리는 묻지 않습니다. 유대인이 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저한테 와서 ‘랍비, 만약에 비유대인들하고 같이 살고 일하며 그들에게 우리는 먹지 않는 돼지고기와 트레이페를 팔고, 20년 동안 한 번도 회당에 오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 유대인인가요? 라고 묻는다면 그에게 저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렇지, 모리스 보버는 내게 진정한 유대인이네. 왜냐하면 그가 유대인의 경험을 기억하며, 그 안에 살았기 때문이지. 그리고 유대진의 심장을 지니고 살았기 때문이야.’ (……) 그는 고통받았고, 참아냈고, 그러면서도 희망을 가졌습니다. 누가 저한테 말했을까요? 저는 그냥 압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그는 아주 조금만 원했습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죠. 하지만 사랑하는 아이는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길 원했죠. 그러한 이유로 그는 유대인이었습니다(……).” (338-339쪽.)

하지만 “자네나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잘 돼야 하잖아.” 라고 말하던 모리스는 프랭크가 저지른 실수들을 견디지 못하고, 그를 배제하기 시작한다. 프랭크는 솔직해지려고 했으나, 계속 망설이다가 진솔한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스스로 더 나쁜 결과를 만드는 선택들을 하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의지는 굳건했고, 그것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 증명할 기회를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만일 사람들이 이제 나를 체포하면 어떡하지?(예전에 모리스에게 강도짓한 이유로) 내가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됐는데도? (212쪽.)
프랭크는 생각했다.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 수는 없어. (매상에서 1달러를 훔쳤다가 다시 갚아 나가려던 중에 모리스에게 들켰을 때) 난 이제 다른 사람이잖아. (241쪽.)

프랭크는 계속 내적 갈등을 겪으며 스스로에게서도 자유롭지 못하고, 관계에서 오해의 벽을 쌓아간다.

백만 가지 말들이, 그중 일부는 엄청난 말들이, 가슴속에서 올라와 목이 메었다. 매일 그 말들이 죽어 갔다. 그는 끊임없이 탈출을 생각했지만, 그건 그가 언제나 했던 거였다.- 도망치는 일.
이번에는 떠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가 죽어야 끌어낼 수 있을 터였다. 벽이 안으로 무너지면 삽으로 그를 파내야 했을 것이다. (285쪽.)

프랭크는 모리스가 폐렴으로 입원하고 모리스의 가족이 파산하는 걸 막기 위해, 이전의 불안하고 충동적인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 ‘버티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마음 먹은 그는 송판에 장미를 새겨 헬렌에게 건네지만, 호의는 거절 당하고 장미는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그래도 그는 모리스가 죽은 후, 무덤에서 모리스의 삶을 온전히 이어 받게 된다. 마치 빙의한 것 처럼. 혹은 부활하듯이.

그러자 무덤 파는 사람들이 무덤 주위의 무른 흙을 밀어 넣기 시작했고, 흙이 관에 떨어지자 조문객들이 큰 소리로 울었다.
헬렌이 장미를 던졌다.
프랭크는 무덤가에 가까이 서 있다가, 꽃이 어디에 떨어지는지 보려고 몸을 숙였다. 균형을 잃었고, 팔을 휘둘렀지만 결국 떨어져 관 위에 섰다. (341쪽.)

힘겹게 계단을 올라가면서 두 사람은 가게 안에서 등록기의 둔탁한 벨 소리를 들었고, 식료품점 주인의 관에서 춤을 췄던 사람임을 알았다. (342쪽.)

모리스의 장례식 이후로 프랭크는 가게 뒤편에서 살며 다시 버틴다.

옷이 다 해졌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생필품만 샀다.(……) 그렇게 그는 버텼다. 하지만 그는 이다에게 방값 주는 건 절대로 거르지 않았다. 헬렌이 가을에 야간 대학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돈을 주는 것이 중요했다. 만일 그가 이다에게 90달러를 주지 않으면, 헬렌은 자신이 필요한 걸 살 돈이 충분하지 않을 터였다. (355쪽.)

이제 그곳에서 과로로 힘이 없고, 마르고, 불행한 그를 보았기에 그녀에게 짐이 생겼다. 누구를 위해 그가 일하는지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던 거였다. 그 덕분에 그녀가 밤에 학교 다니기에 충분한 돈이 있었던 거다. (358쪽.)

이렇게 버텨가던 프랭크는 마침내 헬렌에게 모리스가 자신을 오해할 수 밖에 없었던, 미루었던 자신의 잘못들을 진정성 있게 고백했고, 헬렌은 이렇게 어느날 문득 그가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이야기의 초반에는 모리스의 은유처럼 등장하였다가, 이야기의 후반에는 모리스가 된 프랭크를 상징하는 듯 등장하여, 헬렌이 쓰레기통에 버렸던 목각 장미를 진짜 장미로 변화시키고 사랑하는 이에게 대신 장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에 프랭크는 예전에 힘겹게 읽던 책을 기분 좋게 읽으며 어떤 부분은 자신이 쓸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 들은 성 프란체스코의 일화를 들은 그대로 읊조리며 살던 그는 이제는 조금씩 그 이야기를 변형할 줄 알게 되며, 그렇게 그는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찾게 된다.
그는 보편적 윤리적 삶에 가까워지면서, 사랑도 이루게 된다.

“어린 소녀여, 여기 어린 소녀를 위한 장미를 받으세요.” 그녀는 장미를, 프랭크 알파인의 사랑과 기원이 담긴 장미였음에도 받았다. (362쪽.)

<점원>에서 성 프란체스코 이야기는 스쳐가듯 등장하지만, 프랭크라는 인물에게 여러가지 의미를 준다. 결국 프랭크는 자신의 수많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삶을 사는 것'을 추구하며 동경하던 성 프란체스코와 모리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고, 인격을 고양한다.

헬렌의 희망 - 미래에 열린 가능성들을 잊지 않으려는 삶의 태도 그리고 사랑

이 책의 주요 화자는 모리스와 프랭크이고, 그들의 관계와 대립이 이야기의 큰 축을 이룬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계속 언급되는, 헬렌의 삶에 대한 고민과 태도에서 나오는 그녀의 메세지를 보며 작가는 다음 세대와 미래의 희망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었을거라 생각된다. 그녀는 “지갑을 열고, 봉급을 꺼내 아버지에게 건네며”(29쪽.) 모리스를 구원하고, 대학 졸업까지 프랭크를 부양할 계획을 세우거나 그의 선물까지 학비에 보태라고 거절하며 구원할 의지를 보였던 헬렌은 꿈꾸던대로 미래에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걸으며 스스로를 구원해내기 때문이다.
헬렌은 누구와의 대화에서도 늘 한발 더 나아가 더 나은 미래를 기억하려고 애쓴다.

모리스는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한테 무얼 준 게 있지? 심지어 대학 교육도 내가 뺏어 갔잖아.”
“그건 제가 결정한 거잖아요. 하지만 어쩌면 갈지 몰라요. 누가 알겠어요.”
(……)
“저 스스로 저한테 줄 거예요.”, “그런 희망이 있죠.” (32-33쪽.)

“난 좀 더 크고 나은 삶을 원해. 내 가능성을 되찾고 싶다고.”
“교육, 장래, 내가 원했지만 한 번도 갖지 못한 것들.”
“남자도.” (65쪽.)

그녀는 먼 곳에 대해 열심히 읽었지만 삶은 집 근처에 머물렀다. 찰스턴, 뉴올리언스, 샌프란시스코와 같이 자신이 들어 봤던 도시에 갈 수만 있다면, 많은 걸 포기했을 거다. 하지만 맨해튼 지역을 벗어나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 광활한 세계에서 그만큼만 갔고, 그 이상은 가지 않았다. 평생을 살아온 곳에 그렇게 머물러 있는 건 범죄나 다름없었다. 그의 이야기로 인해 그녀는 조급해졌다. 여행을 하고, 경험을 하고, 제대로 삶을 살고 싶었다. (156쪽.)

헬렌은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프랭크를 위해서도 막연한 계획을 세워보게 된다.

프랭크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자신을 실현하고자, 좀 더 가치 있는 야망을 실현하려고 애썼다. (……) 프랭크는 인생에 대해 더 많이 알았고, 좀 더 심오한 잠재력이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그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이 되길 바랐고, 대학 졸업까지 그를 부양할 계획을 세웠다. (198쪽.)

이렇게 주체적인 여성인 헬렌이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계속 부모로부터 결혼의 압박을 받으며, 연애도 잘 되지 않고, 뉴욕대 야간반이라도 진학하길 꿈을 꾸며, <돈키호테>와 <백치>를 읽기만 한다. 그래도 그녀는 남자친구 였던 냇과 점점 사랑을 느껴가던 프랭크 사이에서 남자들에게 선택권을 넘기지 않고, 신중하게 자신의 삶을 지켜낸다. 좋은 문학을 가까이한 덕분에 생긴 분별력일까.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지 결심해야 할 때, 그러지 못하기에 갑자기 인생이 엉망이 된다는’(160쪽.) 이 모든 인간의 절망에 대한 이야기를 가까이했던 그녀이므로 그렇게 계속 읽어가며, 제대로 삶을 사는 길에 점점 더 다가갈 수 있게 되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그녀는 '사랑을 결심해야 할 때, 그러지 못하면 갑자기 인생이 엉망이 된다는' 것도 잘 알았기에 끝내 사랑도 지켜낼 수 있었다.

<점원>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선의와 공동의 기억을 통해 서로의 정체성을 무너뜨리지만, 그 후에 비로소 자신만의 고유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 정체성에는 완전무결하지 않은, 불순물이 있을 수 있으며, 우리는 한 사람의 과오가 스스로 성장하려는 의지를 뛰어넘을 수는 없음을 이야기를 통해서 느끼게 된다. 그리고 서로에게 희망을 건네며, 그 희망을 때론 대신 짊어지려는 행동이 얼마나 숭고한지도 깨닫게 된다. 그 숭고함은 희생으로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하고, 삶의 주도권을 되찾게 해주기 때문이다.

#도서협찬
#문학 #소설 #을유문화사 #고전문학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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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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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사람을 사랑하는 태도- 영원을 생각하며 순간에 몰입하기

그녀는 비명을 지르는 법을 몰랐다. 누군가 안타까워 하며 그녀 대신 비명을 질러 주고 싶어했던 연약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녀는 죽음을 통해 '삶의 선고'를 받았다.
목소리 없는 그녀는 사라지고, 말을 하고 행위를 하는 그녀로 탄생하였다.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고집스러운 난쟁이 족, 그러니까 언젠가 비명을 지를 권리를 되찾게 될 족속의 일원' 임을 알아차렸다.
월급을 타면 장미를 사는 그녀는 삶을 사랑하지만 삶을 제대로 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애인도 빼앗기며 수동적으로,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누군가의 선택의 결과만 누리는 삶이었다. 그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카프카의 영향을 받기도 했고, 같은 유대인이기도 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어쩌면 책 제목으로도 고려했던 ‘비명’이라는 말에서 카프카의 ‘투쟁’을 연상시키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월급을 타면 장미를 사는 마카베아- ‘월급’과 ‘글쓰기’ 사이의 균형을 잡으며 그 사이의 갈등을 견뎠던 카프카처럼 주인공 마카베아도 사실은 투쟁중이기는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언어’가 되지 못했기에 그 비명은 외침이 되려다 말았다. 소리없는 절규, 들리지 않는 통곡으로. '삶의 선고'를 받기 전까지는.

“무덤 잔디 밑에는 가엾은 마리아네가 잠들어 있네. 소녀들아, 와서 가엾은 마리아네를 위해 울어 주렴. 헤르만 방, <길가에서> (토베 티들라우센, <어린 시절> 중)”

무덤속에 있는 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살아 있었던 존재이기에 흔적으로 말을 한다.

“영원은 단순히 시간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그건 그녀가 자신의 몸에 담을 수 없는- 왜냐하면 그녀는 죽을 것이므로- 어떤 뿌리 깊은 확신이었다. 영원을 넘어서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영원이었다. 또한 어떤 절대적인 느낌, 거의 추상적인 순수함 역시 영원이었다. 그녀에게 진정으로 영원성을 느끼게 한 생각이 있었는데, 그건 훗날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그녀의 육신을 계승하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언젠가 현재로부터 유성의 속도로 멀어져 갈 그 육신을.
(……) 영원은 무한히 큰- 그리고 천천히 소멸해 가는- 양이 아니었다. 영원은 연속이었다. 62-63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야생의 심장 가까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초기작, <야생의 심장 가까이>에서 여주인공 주아나는 스스로 시를 쓴다. 모든 '아니'를 깨부수며 스스로에게 아무것도 두려워할게 없음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리고 주아나의 육신은 <별의 시간>의 마카베아 에게로 계승된다.

“어쨌거나 그녀는 자신에겐 저주였던 그 이상한 자유, 그녀를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연결시켜 준 적이 없었던 그 자유야말로 자신의 본질을 밝혀 주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영광의 순간들이 거기에서 나오고, 미래의 모든 순간들 역시 거기에서 창조된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316쪽. <야생의 심장 가까이>”

이 책은 언뜻 연약한 존재에 대한 누군가의 애정어린 관찰기 같다. 삶과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주고, 비명을 질러주고 있다. 그것은 그 존재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그 누구도, 자신 조차도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 구원자 같은 존재로서의 행위였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책의 화자가 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alter ego)임을 부인할 수도 없다. 여주인공의 목소리를 대신 내어주면서 삶의 방향은 여주인공과 대척점에 있으며, 그렇게 대칭 구조를 만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관찰자는 여주인공이 입을 열고 말을 하기를 바라지만 관찰자는 오히려 침묵하고 싶어하고, 관찰자는 월급을 타면 각종 공과금을 내지만 여주인공은 장미를 산다. 한편 그 또 다른 자아는 우리가 신을 믿듯이, 삶과 사람에게 다가가기 어려울 때 의식에서 떠오르는 단 하나의 존재, 실체가 없는, 뇌에서 만들어낸 생명을 이어가려는 몸부림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라도, 태어난 이상 살고, 견디게 해주는 존재일 것이다. 그리고 그 또 다른 자아 혹은 신은 관찰자의 모습으로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신이 관찰하는 여자는 믿음 자체로 족한 믿음을 잃은 적이 없었다. 그로 인해 그녀는 가끔씩 은총 안에 머물 수 있었다.

재채기가 나오면 감기에 걸렸나 보다 하고, 배가 고프면 먹고, 누군가가 자꾸 생각나고 가슴이 두근 거리면 사랑에 빠졌나보다, 하는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우리가 우리를 돌보는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스스로 돌봄을 하지 못해도 그것을 해내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 사람이 스스로를 돌볼 수 없음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인식이 자신에 대한 인식보다 더 크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또 타인은 그 존재에게 기꺼이 다가가 대신 돌보아 줄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이 자아의 위안을 넘어서는 모두의 위안의 행위가 아닐까.

‘그래’로 시작하는 이 책은 ‘그래’로 끝나지만, 중간 중간 ‘아니’의 저항에 부딪힌다. ‘좋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 맛없음을 맛보고, 편안한 느낌을 포기하는 행위로. 행복? 그보다 멍청하다고 여기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며. 삶에 대해 추구하는
‘그래’의 가치들은 ‘나’로 향하게 된다면, ‘아니’의 가치들은 타인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그것을 ‘용기’라고 말한다. 특정 사회 계층에 속하지 않은 열외자로서.

삶은 버튼만 누르면 삶에 불이 환하게 들어오는 것인데, 화자는 어떤 버튼을 눌러야 할지 모르는 그녀에 대해 글을 쓴다. 이미 나에게 업힌 이상 나의 어깨에서 내려오고 싶어 하지 않는 타인의 존재감을 그렇게 감당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하지만 아무리 상황이 나빠진다 해도 자신을 빼앗기고 싶지 않고 자신이고 싶었던 그녀였다. 그녀가 목적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화자는 월급날에 각종 고지서를 처리하기보다 장미를 사는 그녀의 행위를 칭송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겁에 질리고, ‘나는 나다’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지만, 꽃을 사는 것으로 자신의 삶의 순간에 응답하는 그녀를.

그러나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자기 삶이 원래부터 그런거라고 받아들여 왔었다. 사랑에 빠지고 음악을 알게 된 그녀는, 다른 방식으로 다가오는 감성들과 더욱 섬세하고 우아한 삶들, 심지어 영혼의 사치라 부를만한 것들마져도, 그렇게 그녀는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 광활한 음악의 세계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였던 그녀는 이렇게 갑자기 용기가 솟아서 자신의 밝혀지지 않은 부분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그녀의 대화는 늘 비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진정한 말(=비명?)을 사용한 적이 없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사랑‘ 조차도 ‘나는-뭔지-모르겠는-것’이라고 부르는.

비록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지만, 그녀 역시 자살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삶이란 버터도 바르지 않은 오래된 빵보다 더 맛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화자는 그녀에게 목욕을 시켜주고, 따끈한 수프를 먹이고 이마에 키스를 해주고 싶어 한다. 삶이 라는 커다란 사치를 발견할 수 있도록. 사랑하는 연인 올림피쿠가 마카베아 에게 해준 일은 “그녀가 해고 당하면 금속 공장에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고 한 것”일 뿐. 결국 자신이 원하는 걸 무엇인지 잘 아는 올림피쿠는 일등품 글로리아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하며 결별을 선언한다. 우는 법 조차 잊은 마카베아는 웃음을 터뜨리고야 만다. 그러가 세상을 연결하는 끈인 올림피쿠와 그의 새애인 글로리아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결국 올림피쿠를 용서한다. 그도 오지 출신의 수난자였기에.

또한 자신도 수난의 연속인 삶을 살던 마카베아는 저주도 풀어 준다는 마담 카를로타를 찾아가게 되고, 그녀로부터 '삶의 선고'를 받는다.

“이제 세상으로 나가서 멋진 운을 따라가봐.”

마카베아는 마담 카를로타가 그녀의 삶에 대한 모든 걸 알아맞힌 뒤-마치 죽기전 삶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시간이 아니었을까-열정이라고 불리는 걸 갖게 되었다. 그리고 갑자기 거센 충동에 휩싸여 마담 카를로타의 뺨에 입을 맞춘다. 마카베아는 비로소 자신의 삶이 비참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울고 싶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늘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진실하게 직면하며.

“‘말’이 그녀의 삶을 바꾸어 놓아,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이제 더 이상 그녀 자신이 아니게 된다면, 그건 이득이 되는 상실이었다. 그녀는 사형 선고를 받듯 점쟁이로부터 삶의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원양 여객선만큼 거대한 메르세데스 벤츠 차가 그녀를 치고, 아이러니하게도 붉고 진한 피를 흘려가던 그 순간, 그녀는 새로 태어난다.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집스런 난쟁이 족, 그러니까 언젠가 비명을 지를 권리를 되찾게 될 그 족속의 일원이었기에. 그녀는 오늘이 내 인생의 첫날이라고 생각한다. 136쪽.<별의 시간>“

죽음에 이르러 미래를 이야기하는,
나와 타인뿐 아니라 내가 온 세상과 연결된, 공기에 마저도 나의 흔적이 어린,
다시 태어남과, 돌봄, 순환,

그렇게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이야기는 야생의 심장(중심)가까이 에서 별의 시간으로-
첫 소설과 구조가 대칭적으로 닮아 있으면서도, 마지막 소설에서는 나에서 타인으로, 중심에서 우주로, 현재와 영원에 대해 이야기하며 더욱 세계관을 확장한다.

“ 한 순간과 다음 순간 사이, 과거와 미래 사이, 그 틈새의 하얀 모호함. 원을 그리며 도는 시계의 분 표시 사이에 있는 공간처럼 비어 있는 것. 조용히 죽은 채로 드러나는 삶의 본질, 한 조각의 영원.
어쩌면 삶의 한 시기를 다른 시기와 가르는 건 고요한 찰나인지도 모른다. 250쪽, <야생의 심장 가까이>

나 역시 이런 저런 실패 끝에 나 자신으로 축소되었으나, 적어도 나는 세상과 신을 만나고 싶어한다.
그 젊은 여자와 나 자신에 대한 정보를 하나 덧붙이자면 우리는 오직 현재 속에서만 산다. 그건 언제나 영원히 오늘이기 때문이고, 내일이 오늘이 될 것이며, 영원은 바로 이 순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29-30쪽. <별의 시간>”

영혼의 사치를 누리며 삶의 사치를 발견해가며,
삶은 영원으로 남을 순간의 연속이기에.
'아니'를 해도, 결국 '그래'로 남기에.
'그래'는 '아니'를 넘어선 용기이기에.
그 용기는 한나 아렌트의 표현대로 카프카가 찾기를 원했던 힘의 평행사변형을 구성하는 두 힘의 작동으로 생긴, 제 3의 힘, 대각선의 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딸기철에는 피로로 소진되지 말고, 딸기를 사먹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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