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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공의 빛을 따라 암실문고
나탈리 레제 지음, 황은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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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라는 작품을 통해 나탈리 레제라는 작가에게 매료되었다. 그녀의 글은 대상을 집요하게 응시하면서도 끝내 투명한 슬픔을 남기는 묘한 힘이 있다. 그래서 이번 신간 『창공의 빛을 따라』의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막연한 기다림이 있었다. 게다가 황은주의 번역은 최근에 라두 루푸로 맺은 인연과 이어지는 듯한 반가운 소식이었다. 을유문화사 서평단으로 가장 먼저 이 책을 만나게 되어 감사하다.

나탈리 레제의 『창공의 빛을 따라』는 한 사람의 죽음 이후 남겨진 자가 무엇을 쓰고, 또 무엇을 끝내 쓰지 못하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남편 장-루 리베이르의 죽음은 그녀가 평생 다듬어온 문장과 사유의 질서를 단번에 무너뜨리고, 언어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세계를 마주하게 만든다. 이 책은 애도의 감정을 단정하게 정리해 들려주는 추도사가 아니다. 오히려 상실 이후 언어가 어떻게 파편화되고, 문장이 어디까지 부서질 수 있는지 끝까지 따라가는, 어쩌면 운명적으로 생애에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텍스트에 가깝다.

레제가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사실은 글쓰기의 불가피한 불완전성이다. 사고와 감정을 문장으로 옮기는 순간, 진실의 일부는 반드시 누락되고 일그러진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부족함’ 때문에 쓰기를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그 불완전성을 책의 중심 주제로 끌어올린다. 롤랑 바르트가 “문학은 덜 고통받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했듯, 레제에게 글쓰기는 고통을 없애는 행위가 아니라 고통과 문장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는 작업이다. 그 문장들을 읽다보면 말이 닿지 않는 영역, 언어가 침묵으로 밀려나는 경계면을 함께 건너게 된다.

이 책이 가진 독특한 힘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레제는 비탄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기보다, 기존의 문법으로는 말할 수 없는 상실의 경험을 문장 구조 자체의 균열로 드러낸다. 남편을 향해 ‘너’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은 그를 현재형으로 불러내고자 하는 마지막 시도로 보인다. 현재형은 광기로, 과거형은 두 번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모순 속에서 그녀는 결국 말하기의 실패를 인정한다. 그리고 그 실패의 흔적—흩어진 문장, 망설임이 묻은 호명, 시제의 갈등—을 한 번도 숨기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창공의 빛을 따라』를 관통하는 문법적 애도의 형식이다.

책의 구조 역시 그러한 균열을 그대로 반영한다. 마흐말바프의 영화, 아이네아스의 황금 가지 등 서로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파편적인 이미지들이 남편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중력장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소환된다. 아키비스트인 레제는 이제 단순한 문헌 정리자가 아니라, “상실에 괴로워한 사람들의 기록”을 찾아 헤매는 절박한 독자가 된다. 빅토르 위고가 강령회 이후 “가득 찬 공허”라 적어두었을 때, 레제는 그것을 바로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가리키는 정의로 받아들인다. 이 책은 그렇게 상실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텅 비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과잉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모순의 지도처럼 펼쳐 보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수아지크 미슐로의 『바라본 후에 다스리는 마음』에 등장하는 킨츠쿠로이의 비유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미슐로는 금이 간 도자기를 옻칠과 금가루로 봉합해 오히려 더 고유한 형태로 되살리는 킨츠기의 방식을 설명하며, “자기 연민은 갱신의 예술”이라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처를 숨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금이 메운 이음새는 균열을 덮는 장치가 아니라 상처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며, 그 결함을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변환하는 지점이 된다. 상처는 제거해야 할 결점이 아니라, 다른 세상을 여는 새로운 입구이자 변화의 약속이다.

레제의 글쓰기 역시 킨츠기의 미학을 문학적 방식으로 수행한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매끄러운 서사로 정리하지 않는다. 대신 반복해서 금이 간 자리를 더듬고, 그 틈에 문장을 덧입히며, 부서진 언어를 금빛 이음새처럼 그러모은다. ‘너’와 ‘그’를 오가는 호명은 마치 도자기의 안쪽과 바깥쪽에 서로 다른 표면을 가진 이중 구조처럼 흔들린다. 그 틈에서 레제는 다시금 “네 죽음 안에서 너와 하나가 되어 있다”고 말하며 상처를 숨기지 않고 통과하려는 태도를 드러낸다. 이는 부서진 조각을 원래대로 복원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균열을 품은 채 새로운 형태로 존재하려는 고백이다.

결국 『창공의 빛을 따라』는 상실을 극복하거나 완전히 봉합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상실은 사라지지 않지만, 우리는 그 상실과 함께 다시 걸음걸이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길고 섬세한 증언이다. 미슐로가 인용한 장 주네의 문장처럼, “상처야말로 아름다움의 유일한 기원”이며, 예술은 그 은밀한 상처를 발견하고 빛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레제의 문장은 바로 그 상처의 자리에 금을 얹어 봉합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상실의 무게를 덜어내기보다는, 그 무게 속에서도 여전히 빛을 머금은 세계—창공의 빛을 따라 아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세계—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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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일기
소피 퓌자스.니콜라 말레 지음, 이정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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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내면일기』를 펼쳤을 때, 솔직히 나는 일기장에 담긴 타인의 삶이 얼마나 내게 와닿을 수 있을지 의심했다. 일기는 너무나도 개인적인 장르이며, 누군가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건 언제나 조심스럽고 때로는 낯선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소피 퓌자스와 니콜라 말레가 엮은 이 책은 나의 의심을 천천히 허물며 어느새 친숙한 마음으로 읽게 했다.

이 책은 조르주 상드, 루이스 캐럴, 외젠 들라크루아, 캐서린 맨스필드, 조지 오웰, 조르주 페렉을 포함한 87명의 예술가와 문학가들의 실제 친필 일기를 생생하게 재현하며 독자들을 각자의 내밀한 시간 속으로 초대한다. 특히 마리 퀴리의 일기에서 발견한 눈물 자국 앞에서 나는 글이란 단지 문자의 조합을 넘어 물리적이고도 감정적인 기록임을 새삼 깨달았다. 필체의 떨림과 잉크의 번짐, 삭제된 흔적들이 고스란히 드러난 친필 원고 이미지는 마치 낡은 가죽 커버의 오래된 다이어리를 실제로 손에 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내가 많은 챕터 중에서 ‘일상 예찬’을 집중적으로 읽고 의미 있게 느낀 이유는 일상이야말로 모든 창작의 출발점이며, 우리가 가장 쉽게 지나쳐 버리는 평범함 속에 가장 진실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이 책의 공동 저자 소피 퓌자스는 “일기는 일시 정지, 괄호, 멈춤이다. 자기 시간을 고립시키고 망각에 저항하며 기록하면서 싸우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는 바로 ‘일상 예찬’ 챕터를 읽으면서 내가 느낀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해 주었다.

조르주 상드의 일기는 나를 사로잡은 첫 번째 기록이었다. 그녀의 문장은 과장이나 꾸밈이 없었고, 차라리 무심할 정도로 담백했다. 평온한 하루의 산책이나 소박한 식사 장면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놓치고 사는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했다. 루이스 캐럴의 일기는 반대로 친숙한 일상 속에서 기묘한 상상력을 펼치는 독특한 방식으로 나를 매료시켰다. 그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사소한 일상조차도 환상적인 풍경으로 변했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일기는 내게 그림의 또 다른 형태를 발견하게 했다. 그는 색과 빛이 생활 속에서 어떻게 춤추는지 세심하게 기록하며 보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창조적 행위임을 드러냈다. 그의 기록을 따라가면서, 나 역시 주변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얻었다.

캐서린 맨스필드의 일기는 감정의 미묘한 층위를 담담히 기록하면서 내면의 복잡함을 드러냈다. 거울 앞에서 자신을 관찰하듯 기록한 그녀의 글은, 나에게도 나 자신의 내면을 깊이 있게 바라보도록 이끌었다. 조지 오웰의 날카로운 일상 기록은 평범함 속에서 시대적 진실을 드러내며, 일상과 역사의 불가분성을 깨닫게 했다.

조르주 페렉의 목록과 반복의 글쓰기는 일상의 세부를 끈질기게 기록함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가 보여준 일상의 집요한 기록 행위는 나 역시 나의 평범한 하루를 어떻게 기록할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책의 초반에 등장하는 아니 에르노와의 대화는 일기 쓰기의 내밀한 본질과 그 글쓰기가 작품 창작에 미친 영향을 깊이 있게 탐구한다. 그녀가 일기를 창작의 원천으로 활용한다고 밝히는 장면에서, 나의 평범한 일상 역시 글을 통해 특별한 의미와 가치로 탈바꿈할 가능성이 있음을 깨달았다. 또한 일기는 그저 기록의 행위를 넘어, 삶의 속도를 잠시 멈추고 자기만의 시간을 만드는 섬세한 저항일수도, 단순히 경험을 정리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감정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면일기』는 궁극적으로 일기라는 장르가 단순한 개인적 기록을 넘어 삶의 진실한 단면을 포착하고 문학적, 역사적 가치를 지닌 기록으로 거듭날 수 있음을 강력하게 증명한다. 책을 덮은 뒤에도 나는 나의 일상을 조금 더 천천히 바라보게 되었으며, 모든 순간이 기록될 가치가 있다는 믿음을 다시 품게 되었다. 『내면일기』는 단지 읽히는 책이 아니라, 누군가의 일기가 각자의 삶과 내면에 깊숙이 녹아듦을 기대하게 하는- 특별한 문학적 경험이었다.



#내면일기 #일상기록 #을유문화사 #예술가의일기 #도서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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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연구 암실문고
앨 앨버레즈 지음, 최승자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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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사람을 죽였다면 나는 두 사람을 죽인 것.
흡혈귀는 자기가 당신이라고 말하고
나의 피를 일 년 동안 빨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칠 년 동안, 아빠,
당신은 이제 드러누워 계세요
당신의 살찐 검은 심장에는 말뚝이 박혀 있어요.
실비아 플라스, 「아빠」

앨 앨버레즈는 『자살의 연구(The Savage God: A Study of Suicide)』를 통해 자살이라는 주제를 문학적, 철학적, 심리적, 그리고 개인적 관점에서 탐구한다. 이 책은 단순한 학문적 연구를 넘어, 자살에 대한 문화적 서사와 개인적 경험을 교차시키며 독자를 강렬한 성찰로 이끈다. 특히, 실비아 플라스의 자살을 중심으로 서문을 구성하면서, 자살이 단순한 개인의 절망이 아니라 문학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해석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앨버레즈는 자살이 문학에서 어떻게 다뤄져 왔는지를 분석하며, 셰익스피어, 괴테, 도스토옙스키, 카뮈 등의 작품에서 자살이 철학적·미학적 주제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서구 문학에서 자살이 종종 비극적 운명의 귀결로 서사화되었으며, 특히 낭만주의적 사조와 결합하면서 신화적 의미를 획득했음을 지적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살이 단순한 병리적 현상이 아니라, 시대적·문화적 변동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책의 중요한 한 축은 실비아 플라스와의 개인적 관계에 대한 회고다. 앨버레즈는 플라스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그녀의 정신적 고통과 창작의 긴장 사이에서 자살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탐색한다. 그는 플라스의 작품과 삶을 병렬적으로 분석하며, 그녀의 자살이 단순한 심리적 붕괴의 결과가 아니라 창조적 정체성과 깊이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학문적 객관성과 개인적 애도의 경계를 오가며 더욱 몰입도를 높인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이를 출산한 후, 산후 우울증을 겪었다. 정서적 어려움 이전에 이미 체력적으로 한계를 느꼈는데,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할 일들로 채워지는 일상은 나를 소진하게만 했다. 일방적인 돌봄의 과정에서 나는 점점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내가 꿈꿔왔던 삶과는 멀어지는 것이 나를 불안하게 했던 것 같다. ‘엄마’라는 역할을 나의 또 다른 자아로 성숙하게 수용하기 보다, 그에 완전히 잠식당해버렸다. 이런 감정 속에서 실비아 플라스의 삶을 읽는 것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라 체험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은 각자의 결론은 달랐다.

앨버레즈는 이러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고뇌에 대하여 특히 4장 ‘자살과 문학’에서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이 장에서 앨버레즈는 자살이 문학적 상상력 속에서 어떠한 철학적, 미학적 기능을 해왔는지를 탐구한다. 특히, 존 던에 대한 예시가 인상적이었다. 존 던은 ‘비아타나토스’에서 당시 금기시되던 자살에 대한 신학적·도덕적 재해석을 시도하는데, 자살이 무조건 죄악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는 정당화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존 던은 “무언가를 하기로 결심하는 일은 하나의 행위에 해당하지만, 어떤 전체로부터, 어떤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존재는 애초에 아무것도 행할 수 없는 공허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며 존 던은 잉여의 존재로서의 소외를 사유한다. 그리고 존 던은 유명한 구절, "그 누구도 섬이 될 수는 없다(No man is an island)"라는 말을 남겼다. 존 던을 통해 앨버레즈는 자살이 단순한 절망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필연적 질문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앨버레즈는 괴테의 『젊은 베르터의 고통』을 통해서 자살의 윤리적 문제를 짚기도 한다. 『젊은 베르터의 고통』은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자살을 낭만적 열정의 표현으로 부각시킨 대표적인 작품이다. 앨버레즈는 이 소설이 단순한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감정적 고양과 실존적 고립이 결합된 낭만주의적 자살 서사의 원형임을 지적한다. 베르터의 자살은 비극적 결말이지만, 동시에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완성하는 과정으로 묘사된다. 실제로 이 작품은 유럽 전역에서 ‘베르터 효과(Werther Effect)’라는 사회적 현상을 일으키며, 문학이 자살을 어떻게 신화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그리고 앨버레즈는 이렇게 문학이 자살을 숭고한 행위로 포장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다.

책의 원제에 나오는 ‘The Savage God’은 W. B. 예이츠(W. B. Yeats)가 비평가 아서 크롬튼 릭스(Arthur Crompton Rickson)에게 보낸 편지에서 차용한 표현이다. 예이츠는 낭만주의적 열정을 신격화했던 19세기의 시인들과 비교하며, 현대 예술가들이 ‘야만적인 신(savage god)’을 섬긴다고 표현했다. 알바레즈는 이 표현을 빌려, 자살이 우리 사회에서 금기시되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예술과 철학의 중심 주제로 소환되는 역설적 존재임을 드러낸다. 자살은 문학과 예술에서 신화화될 때는 숭고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고통과 혼란, 그리고 비극을 남긴다. 한편 알바레즈가 말하는 ‘야만적인 신(savage god)’은, 어쩌면 우리를 집어삼키는 사회적 역할과 기대의 무게일 수도 있다.

이 책의 초반에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알바레즈가 문화적 세련됨과 자살 사이의 연관성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그는 자살이 종종 고도의 지적·예술적 감수성과 연결되며, 사회적으로 교양 있고 창의적인 계층에서 자살률이 더 높게 나타날 가능성을 시사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실증적 근거가 부족하지만,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문학과 예술 속 자살 서사가 주로 엘리트 지식인들의 경험과 맞닿아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는 자살이 단순한 심리적 질병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앨 앨버레즈는 『자살의 연구』에서 사유를 시적 산문으로 전개하며 삶과 죽음에 대해 명징한 답을 찾기 보다 삶의 난제들과 그저 마주하기를 제안하는 듯 하다. 시가 모호한 언어와 운율 속에서 의미를 생성하듯, 삶 또한 그와 닮아 있는게 아닐까? 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부정할 수 없듯, 삶도 마찬가지라고.

#을유문화사 #암실문고 #을유문화사_서평단 #자살의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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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 - 숭배와 혐오, 우리 모두의 딜레마
클레어 데더러 지음, 노지양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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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을 읽기 전에 목차를 살펴보며, 가장 눈에 들어왔던 챕터는 작가가 자신도 괴물인지 질문하는 '9. 나도 괴물일까'와 '10. 자녀를 유기한 엄마들, 도리스 레싱, 조니 미첼'이었다. 나도 엄마이자 창작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늘 엄마의 역할과 한계에 대해 질문을 거듭할 수 밖에 없는데, '아이를 유기한 엄마'는 일단 '괴물'로 분류되는구나 싶어서 아찔했다. 이 책은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예술가들의 '괴물성'에 대하여 다루는데, 우선 페미니즘 리부트와 미투 운동 전까지는 숭배의 대상이었던, '차별과 혐오의 가치관을 자신의 작품에 반영하거나 범죄에 가까운 일을 저지르고도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고 재능을 인정 받은 남성 예술가들' 에 대한 논란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남성 예술가에 대한 신화 허물기 뿐만 아니라 크게 주목 받지 않았던 버지니아 울프의 '유대인 혐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들에게 예술과 예술가의 삶의 분리는 늘 어려운 숙제이다. 예술가들도 물론 자신의 예술과 삶의 불일치와 늘 대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든 예술가는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gifted' 이고 그 재능의 결과물은 인류의 공동 유산이 되기에 어쩌면 도덕적 기준과 법적 제재로부터 조금은 더 자유로운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되어 왔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신화에서 벗어나 '예술가의 괴물성'에 대한 고민은 '그들에 대한 숭배'에 잠식당했을 때보다 오히려 우리가 더 성숙하게 예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리라 생각된다. 엄격한 예술가의 삶과 작품에 대해 '분리'가 아닌 '떠안고가기'는 불안하지만, 그 '멜랑콜릭'한 상태가 결국 예술이 존재하는 의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수많은 예술가들에 대한 '신화 깨기' 사례가 나오지만 저자가 결국 자신의 삶과 감정에 기반하여 이 책을 서술했듯이 나도 최근의 경험과 감정에 충실하여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그리하여 다시 챕터 9,10으로 돌아가보면 무척 재밌고도 공감가는 문장들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아는 여성 예술가들과 작가들은 지금보다 더 괴물처럼 되기를 소망한다. 은근슬쩍 농담조로 말한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 말이 무슨 뜻일까? 돌봄의 의무는 모두 저버리고 예술가로서의 이기적인 의식만을 수행하고 싶다는 뜻이다. [...]

알고보니 그들(남성 작가들)은 자신의 생활을 관리하지 않았다. 핵심은 그 안에 있었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 그 일을 해 줄 아내가 있었다. 그것도 도맡아서 해 줄 사람.
211쪽.

얼마전에 나는 대지미술의 한 갈래인 '개간미술' 작업을 했던 여성 작가들- 아그네스 디네스, 낸시 홀트, 패트리샤 요한슨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대지 미술은 장르 특성상 제작 비용이 많이 요구되어 후원자의 경제적인 지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디네스, 홀트, 요한슨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후원에서 소외되었고, 그나마 어렵게 이루어낸 작업도 주목을 많이 받지 못하였다. 특히 낸시 홀트가 대지미술의 선구자인 로버트 스미스슨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마음이 더욱 착잡해졌다. 홀트에게도 적극적인 후원자와 모든걸 도맡아서 해 줄 아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한편 며칠전 작가 오를랑과 zoom으로 하는 라운드 테이블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여기서 나는 '페미니즘' 토픽을 선택해 오를랑에게 '여성 작가로서 직면한 편견과 재정적 어려움'에 대해 질문했는데, 오를랑도 여성작가로서 남성 작가들에 비해 자본의 지원으로부터 소외 되는 경우가 많아서 자신이 구현하고 싶은 예술을 예산의 한계로 포기해야 할 때가 많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 갤러리와 시장도 남성 작가의 작품을 여전히 선호하니, 여성 작가의 작품은 가치가 저평가 되어 여성 작가로서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많다고 하였다. 오를랑은 더 나아가 남성을 양육하는 여성이라면 남성을 정말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여성은 자신과 지구를 위해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마치 이 책의 저자가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라고 했던 것 만큼이나 공감과 해방감을 불러일으키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아내'는 없고, 나는 이미 아이를 낳은 여성이다. 저자는 "여자들은 글을 쓰거나 예술을 하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하면서 때때로 나쁜 엄마가 된 기분을 느낀다"고 하며, "남자의 범죄가 강간이라면 여자의 범죄는 양육의 실패"라고도 한다. 그리고 자신도 괴물인지 질문하며 자녀를 유기한 여성 예술가들의 사례를 제시한다. 나는 책에 등장하는 '자녀를 유기한 엄마 예술가들'을 보면서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확실히 억울한 건 '서재나 작업실의 문을 닫고 아이를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거나, '아이를 조부모나 유모나 베이비시터에게 맡긴다'거나 '한 번에 며칠, 몇 주 혹은 몇 달 동안 출장을 간다'거나 '집을 나간다' 등의 행동을 엄마가 하면 자녀를 유기한 것이지만, 남자가 할 경우에는 유기 행위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나의 결론은 내가 스스로 '엄마'라는 역할을 선택했기에 그것을 수행하는 것은 어떤 불공평한 상황이라도 마땅히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을 정리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양육 실패자'가 될 수 있음을 늘 염두에 두며 느슨한 유기를 하고자 한다. 비난을 감수하면서 나를 위해 (공부, 글쓰기, 집 비우기 등) 필요한 일들은 꼭 해나가는 것이다.
'괴물들'의 실체에 대해 이야기하던 이 책의 저자는 마지막 챕터에서 '끔찍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사랑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영국 철학자 질리언 로즈의 말을 인용한다. "어떤 사랑의 관계에서든 민주주의란 없다. 자비만 있을 뿐이다." 결점투성이의 불완전한 인간인 '괴물들'을 타자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도 '괴물'이 있음을 바라보며, 완전무결함을 기대하고 인간을 바라보는 것을 중단하고, 사랑하기를 제안하는 저자는 신나게 괴물들을 조롱하던 나를 멈칫하게 하였다. 이 책을 읽어나가며 나는 '좋은 엄마'와 '나쁜 엄마'를 가르듯 '좋은 예술가'와 '나쁜 예술가'를 나누고, 남성과 여성을 대립시켰다. 하지만 괴물들의 명백한 잘못을 결코 '사랑은 불완전함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얼버무리고 싶지는 않다. 대신 나는 이 책을 통해 예술가라는 신화를 걷어낸 인간을, 예술 너머의 삶을 다층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괴물들의(나의) 끔찍함을 떠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인문 #문학 #예술 #페미니즘 #을유문화사 #괴물들 #클레어데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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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E. 커밍스 시 선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34
E. E. 커밍스 지음, 박선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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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 커밍스는 난해한 실험성과 특유의 형식미로 유명한 시인이라고 한다.나는 <커밍스 시 선집>에서 커밍스의 '사랑과 사랑의 신비'에 대해 이야기한 시 모음이 특히 인상 깊었다. 그의 시는 전위적이라 평가 받지만 그는 결국 사랑과 인간 경험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삼고 그들의 일상성을 넘어서 신비로운 본질에 대해 사색하고 탐구한다.

커밍스의 형식은 전통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있다. 기존의 구조화 된 시에 비해 자유시 구조, 구두점, 대문자 사용등은 단어와 문장들이 작가의 손을 넘어 스스로 말하는 듯 자발적으로 느껴진다. 그 낯설음은 시어의 모호함을 더욱 해석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리듬에 몸을 맡길 때 읽는이는 오히려 사랑의 예측 불가능함과 운명의 불확실성 그리고 자연의 변화, 우주의 광활함을 어느새 감각하고 수용하게 된다. 무지하고 나약한 개체가 커밍스의 주문 같은 말들을 읊조릴 때, 어느새 내가 닿고자 하는 무언가와 합일화 되는 경지에 이르름을 실감한다.

커밍스의 사랑의 신비를 노래한 시들에서, 사랑으로 시작하여 결국 생과 영원을 노래함이 경이로움과 숭고함 사이를 오가는 기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늘 기도에 응답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커밍스는 연인과의 마법 같은 꿈의 완성을 기대하며 읽는이를 추상의 세계로 초대했다가, 결국 꽃, 나무, 하늘, 계절과 같은, 사그러 들지만 다시 부활하는 자연의 순환 속으로 안내하는 듯 하다. 읽는이는 응답 받지 못한 기도는 상실이 아니라 추구임을, 나를 환상이 아니라 현실에 몸을 맡길 때 내재한 힘과 생이 완성됨을 깨닫는다.

입체주의 화가이기도 했던 커밍스는 주제를 기하학적 형태로 분해하는 훈련을 했을 것이다. 입체주의 그림은 분해된 파편들의 조합은 보는 이로 하여금 혼란과 불쾌를 불러 일으키지만, 결국 그 의도는 작가가 가장 드러내고자 하는 본질에 가까운 것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시 마저도 단어와 부호를 분해하여 입체주의 그림처럼 그려내는데, 그 행위는 시의 경계를 무너 뜨리며 결국 우리가 보는 것과 읽는 것이 과연 진실인지 되묻고 있는 것만 같다. 무엇이든 새롭게 보아야 비로소 제대로 보인다. 다면적 관점에서 커밍스의 시들을 들여다 볼 때면 우리는 사랑이 언어로만 말해질 수 없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커밍스는 형식을 파괴하며 우리가 단지 시어에만 집중하지 않기를, 그저 느끼기를 그리하여 나만의 느낌을 따르며 스스로의 만든 행로에 따라 정수에 가닿기를 원한 것만 같다. 결코 한 방향으로만 보아서 알 수 없는 커밍스의 시들은 그렇기에 맨 첫 행부터 순차적으로 읽을 필요조차 없을지 모른다.

확신할 수 없는 사랑 속에서 구애하고, 소망하는 커밍스 시의 끝단락 마다 만나는 증류된 한 문장은, 사랑과 그 대상을 해,달, 별, 새, 비, 장미 등의 자연에 은유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한 존재의 사랑이 더 넓은 세계로 확장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연약하지만 확실한 노래를 택하고 그리하여 우리는 함께 볼 수 있다"고 쓴 커밍스는 삶의 아이러니 속에서 두 존재가 연결됨의 의미를 보여주는 듯 하다. "나 자신으로 보이는 것들을 당신을 통해 잃으면서 나는 믿기 어려운 정도로 내 것인 자신들을 발견한다. 슬픔 자체의 기쁨을 넘어 희망하는 일의 바로 그 두려움을 넘어"라는 커밍스의 말은 결국 모든 것의 양면성과 극단의 조화를 암시하고 있다. 커밍스의 시의 실험에 기꺼이 동참한다면, 우리는 커밍스의 시의 무질서함 속에서 당황하고 혼란스러워 하다가도 그 파괴적인 자유로움을 나와 본질을 재발견하는 방향으로 이끌수 있게 된다. 빛 속에서도 달과 별을 보고, 어둠 속에서도 태양을 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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