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시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3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장희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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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번역가의 해설에 따르면 괴테가 <서동시집> 창작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1815년 5월 16일)를 썼다고 한다. "나의 의도는 유쾌한 방식으로 서양과 동양, 과거와 현재, 페르시아적인 것과 독일 적인 것을 서로 연결하고 양쪽의 풍속과 사고방식을 서로 겹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괴테의 이 말을 보고, 갑자기 1834년 파리 살롱에서 전시된 들라크루아의 <알제의 여인들>이 떠올랐다. <알제의 여인들>은 들라크루아가 모로코 여행 중 하렘의 여인들을 슬쩍 들여다 보고, 스케치 한 후 정작 그림속 모로코 여인은 ‘파리의 여인’을 모델로 했다는, 모로코 여인들의 아름다움과 이국적인 풍경을 표현했다고 하지만 왠지 수상한 사연이 있는 작품이다. 들라크루아가 동경했고, 작품으로 구현해낸 동방은 실제일까, 그의 관념일까. 동방의 이국적인 문화를 작품으로 표현하려는 서방 예술가들의 의도를 아무리 '선의'로 해석하려고 해도, 그들이 '세계시민주의'의 관점을 당시에 가질 수 있었을지 계속 의문이 생긴다.

그렇기에 아무리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고 해도, 그런 '동경'이 결국 '제국주의'를 외면하고, '식민주의' 비극의 씨앗이 되기도 했기 때문에 그런 페르시아 시인과 독일 시인간 '화합'의 시도에 대해 자꾸 불편한 마음으로 들여다 보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페르시아 시인은 정작 그런 '만남'과 '화합'을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테니까. 하지만, 오랜 시간을 이어 온 페르시아 시인의 인간과 생과 사랑에 대한 보편적 메세지는 결국 관계의 타자성에 대한 의심을 내려 놓게 하고, 괴테의 진정성을 다시 들여다 보게 한다. 우리의 지난하게 반복되는 삶과 운명의 심판은 결국 같은 삶을 살아간 예술가의 예술로 위안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쓸모 없기 위해' 태어난 예술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렇게 존재의 의미를 찾게 된다.

역시 예술가인 괴테는 <서동시집>에서 '사랑의 모티프'를 중심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책 중에 가장 이상한 책은 / 사랑의 책이라. / 내 그 책 꼼꼼히 읽어 보았더니 / 기쁨일랑 몇 쪽 안 되고, / 책 전체가 고통이로다." 에서 사랑의 본질에 대한 괴테의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얼마전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되새기면서 스완의 사랑과 마르셀의 사랑이 기쁨 보다는 고통이, 이해 보다는 질투로 점철된 것을 어떻게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사랑이 타자에게 가닿아가는 여정이라면 결코 온전히 그에 도달할 수 없을 뿐더러, 사랑에 사로잡힌 나는 '나' 중심적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 마음의 충동과 동요는 오로지 나의 '욕망'에 집중하게 하며, 나는 사랑을 통해 나의 욕망을 욕망하고, 그 욕망이 해결되면 또 다시 다른 욕망을 찾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랑'에 대한 기대는 결국 동방이 안식처이자 도피처가 된다는 괴테의 오리엔탈리즘적 사고와 비슷하며 그 환상을 무너뜨리고 추악한 진실과 마주해야 욕망이 아닌 진정한 사랑에 이르게 될 것이다. 고대 페르시아 종교인 배화교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보여주는 ‘성속일치’의 세계관 속에서.

'인생이란 얄궂은 장난'이고, '세월이 그대에게서 많은 걸 앗아 갔노라고', 하지만 '내겐 충분이 남아 있어! 이념과 사랑이 그것이지'라며 '다정하기'를, '기억보다는 현재를 어서 즐겁게 택하라'는 괴테의 목소리는 페르시아 시인이 전하는 울림을 넘어 또 몇백년을 뛰어 넘어 이렇게 전해진다. 얄궂음과 아이러니, 그리고 결국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로 점철된 일상 속에서 이런 글귀들을 만나며 결국 페르시아 문명의 흥망성쇠와 서구 세계의 오만함과 반성을 떠올리고 모두의 운명이 같음을 실감한다. 하지만 괴테는 숙연한 사색만을 권유하지는 않는 듯 하다. 그가 편지에 썼듯, '유쾌한' 방식으로 모든 대립된 것을 연결하려고 했듯이, <서동시집> 곳곳에 보이는 괴테의 유연함과 위트에 괴테라는 대문호의 명성에 대한 높은 장벽이 허물어짐을 느낀다. 그는 "우리 모두는 취해 있어야 하느니! 사랑에 넘치는 삶은 근심 걱정 있게 마련, 포도주는 이 근심 걱정을 깨어 버린다네."라고, "술 마실 줄 모르는 자는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너희 술꾼들도 잘난 척 말라. 사랑할 줄 모르면 술도 마시지 말아야 하니까." 라며 취함과 사랑을 권유한다. 술과 사랑에 대해 이런 태도를 가진 그와 함께 술잔을 앞에 놓고 대화하고 싶어진다. ”떫은 포도주로 몸을 망치지 말고, 좋은 술만 마시라“는 그의 말을 순순히 따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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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본 후에 다스리는 마음
수아지크 미슐로 지음, 이현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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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심리, 정신 건강 관련 유튜브 영상에서 자주 들었던 키워드는 '마음 챙김' 이다. 그 영상에서는 두 팔로 자신을 안아주는 제스처를 취하기를 혹은 '감정 일기'를 써보기를 제안하면서 바쁘고 지친 현대인들이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어 스스로 '마음 챙김'을 하도록 독려 한다. 건강한 식단이나, 근력 운동으로 자신을 단련하고 돌보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마음 챙김'을 통해 마음의 근육을 튼튼히 하는 것은 사실 익숙하지가 않다. 특히 명상에 대해서는 종교적 수행 이미지가 강해서 전문가의 가이드 없이 일반인들이 혼자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고 오해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바라본 후에 다스리는 마음>의 저자 수아지크 미슐로(이하 미슐로)는 그림 한점씩을 독자에게 소개하며, 잠시 그림을 바라보며 우리가 명상의 시간을 갖도록 안내한다. 그녀는 그림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학 작품의 구절도 인용을 하며, 예술이 명상이 될 수 있음을 더 나아가 명상이 예술의 경지에 이르기를 기대하게 한다. 그녀는 미술사를 공부하고, 3년간의 안거 수행을 포함, 사찰에서 7년동안 불교를 수행했다고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그녀가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 그녀는 명상에 특별한 수행 방법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명상의 본질은 형식이 아님을 깨닫고 스스로 만든 장벽을 허문다.

< 수년 동안 칩거 명상을 경험하고 나서야 지금의 나는 내 일상의 중심이야말로 진정한 수련 공간이라는 느낌을 종종 받곤 한다. 가장 일상적이면서 반복적인 동작들이 이루어지는 공간. 예를 들면, 가족과 함께 집에 있다는 느낌은 그 어떤 명상 사원에 있는 느낌 못지않게 소중하다. 내 아이들, 남편과 함께 심리적으로, 그리고 행동적으로 자율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 아주 충동적이어도 좋은 공간.
따라서 명상 수련을 위해 구태여 명상의 본고장 인도로 떠날 필요는 없다. 하루 종일 집에 있기.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우리가 있는 바로 이곳에 집중하는 능력, 일상을 만족의 길로 만드는 재능.>

그녀는 명상이 우리가 '존재'라고 부르는 너무나 아름다운 모험과 수많은 인연을 보살피는 하나의 방법이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썼다. 그녀는 명상을 통해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다른 존재도 수용할 수 있음을, 나 자신이 그동안 알던 것보다 훨씬 더 드넓은 정체성에 속해 있다는 깨달음을 주고자 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찾아오는 변화

미슐로는 우리가 명상을 처음 시작할 때 우리는 모종의 혼돈 상태를 맞닥뜨린다고 한다. 이미지, 생각, 감각으로 이루어진 내면의 소란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SNS에서 찾은 명상의 연관 이미지들은 마음의 평온과 위로를 기대하게 만들지만, 결과는 그 반대인 경우가 부지기수다. 생각은 언제나, 어김없이, 무수하게 그 자리에 끈질기게 남아 있다. 명상자를 끝없이 설득하고 유혹하면서. 생각에 관심을 기울일수록 생각은 더욱 도드라진다. 격랑이나 쉴새 없이 돌아가기만 하는 바퀴로 표현된 인간의 정신이야말로 한결 더 현실적일 거라고 질문을 던진다.

< 전통적으로 연꽃이 지혜를 상징한다면, 그것은 이 꽃이 지닌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연꽃은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서식하는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물과 늪이 없다면 연꽃도 존재할 수가 없다. >

우리는 미슐로의 안내대로 욕심, 오만함, 분노 또는 인색함 속으로 과감히 들어가 우리 영혼 깊은 곳에 뭐가 있는지 발견하게 된다. 수치심, 분노 또는 두려움이 더 이상 무시의 대상이 아니라 소중한 경험으로서 환영받는 바로 그 순간. 진정한 수용은 투쟁을 춤으로 변화시킨다. 그러니 잣대를 들이대거나 뿌리치지 말고 고통과 더욱 상냥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한다. 배제하는 대신 수용하고 포용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미슐로는 수용이란 패배나 체념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동작라고 한다. 승리는 부정하고 공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내려놓는데 있다며 미국 심리학자 칼 로저스와 에픽테토스를 인용한다.

<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변화가 찾아온다. 이것이야 말로 삶의 신기한 패러독스가 아닌가!"

"무슨 일이든 너희가 원하는 대로 되게 하려 애쓰지 말고, 그저 일어나는 대로 놓아두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


미술료가 이렇게 인용한 이유는 무엇이든 반대하고 거부하기보다 그것을 이해하고 수용하라는 의미다. 그 어떤 경우에도 명상은 우리에게 고통을 부정하라고, 나이 듦을 거부하라고 요구하는 법이 없다. 명상은 오히려 이런 것들을 오롯이 끌어안으라고 말한다. 오직 이 방법으로만 우리는 더 행복해지고 매시간을 소중히 보듬게 된다.

세상 모든 것을 연결해 주는 거대한 심장

포스트 휴머니즘에 대해 논의 하는 지금 시대에 이 책에서 소개하는 명상은 더욱 의미가 있다. 포스트 휴머니즘 시대에는 나와 다른 개체 심지어 보이지 않는 존재까지 이해하는 감수성과 그들과 나누는 우애가 중요하다고 한다. 명상을 통해 우리는 고요한 내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결코 음소거 되지 않는 소리들로 가득한 외부를 향헤 감각을 열 수 있다. 내부와 외부, 너와 나의 경계가 없고 단절되지 않음을 통해 마음의 추악도, 삶의 희노애락도 음양의 조화 임을, 그리고 그것이 공존해야 오히려 진정한 '나'를 이해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명상 경험과 유사하게, 우리가 이 책에서 만나는 화가의 작품들은 현실의 경계선들을 조금 더 유순하게 만들어 주고 형태와 비형태 사이,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이원성에 마침표를 찍게 한다. 미슐로는 사물들 사이의 경계란 썩 명확하지만은 않으며, 산이나 우리 자신이나 모두 같은 원료로 이루어졌으므로 자기 자신과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가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은 인식의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명상의 길은 우리가 가진 성격과 인격을 있는 그대로 오롯이 받아들이도록 도와준다. 누구도 우리의 고유성을 판단하거나 억압할 수 없는 것이다. 작가는 우리 마음의 서사가 만든 정체성이 일상생활에 장애를 초래하거나 마음속 생각들이 고통의 근원이 될 때는, 우리가 하는 경험이란 게 사실은 얼마나 몰개성적인가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타인과 동일한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되는 커트라인." 연민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살아 있는 모든 것과의 다정한 다공성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일본의 모노노아와레, 또는 '경이로운 세계에 대한 공감' 개념을 제안한다.​

숱한 약점들 너머로 빛이 오솔길을 열 수 있게 하는 것

< "상처야 말로 아름다움의 유일한 기원이다. (...) 나는 예술이 모든 존재, 심지어 모든 것의 이 은밀한 상처를 발견하고 빛나게 해 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장 주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

미슐로는 명상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의 나약한 모습과도 최대한 친하게 지내 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한때는 고통, 치욕, 죄의식의 근원이었던 것들이 받아들여지고 변화되며, 나아가 금이 갔기 때문에 더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인류에게 유용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우리가 가진 유약함에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 이유가 있으며 이를 학대하지 말고 나와 함께 먼 길을 떠나는 길동무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한다.​ 자기 연민은 자기만족이라기 보다는 정신적 용기에 더 가깝다는데, 연민은 우리가 지닌 결점에 더 이상 지지 않는 마음을 갖게 하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고 요구하는 듯 하다.

< ​
"균열, 모든 사물에는 균열이 있다. 바로 이 균열을 통해서 빛이 들어온다." Leonard Cohen, <Anthem>(1992) >


자기 연민이 우리를 둘러싼 세계로 확장되면, 이 훈련은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 갈까. 이미 수많은 고통을 겪고 난 후라, 우리의 거울 신경 세포는 타인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고통에 더 민감해질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여기에 인간의 균열된 심장을 금으로 이어붙인, 심장에 '킨츠쿠로이' 작업을 한 작품이 있다. '황금 이음새'를 뜻하는 킨츠쿠로이, 이 예술은 우리를 우리의 상처를 향해 상징적으로 회귀시킨다는 점에서 자기 연민 수행과 유사하다. 이 접근 방식은 우리가 스스로의 약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취약한 부분을 정성껏 바라보다가, 마음의 갈라진 곳을 연민으로 섬세하게 다시 봉합하라고 권한다. 내면 어딘가 상처를 입거나 금이 간 것을 부정하거나, 결점을 숨기거나, 두려운 것들을 깊숙이 묻어 두지 말라고.

미슐로는 '완벽한 자아를 추구하는 것'을 경계한다. '완벽한 사람 만들기'가 명상의 목적은 아니며, 우리가 세상에 무해하게 헌신하기, 자기 계발의 개념에서 자기 수용의 개념쪽으로 이동하기를 권유 한다. 수행자는 완전 무결한 존재일까? 수행자는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를 품은 존재가 아니라, 햇살 아래 온화함과 폭풍우와 혼돈이 뒤섞인, 그 모든걸 안고 가는 존재일 것이다.

존 케이지의 작품(<4분 33초>)은 언뜻 조용하게 느껴지겠지만, 실제로 이 조용함에는 온갖 종류의 소리가 깃들어 있다. 명상은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 내는 소음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명상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이분법적 사고를 불이원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세상에 모두가 각자 존재하지만 사실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공존의 아이러니는 우리를 사회로부터의 분리 불안과 사회적 압력의 강박에서 벗어나게 한다. 미슐로는 명상을 통해, 우리가 사회에 적응하려 애쓰지 않는 주체로서 살아가도록, 성취와 매뉴얼을 강박적으로 추구하지 말고 내버려 두도록 독려한다. 명상으로 깊숙한 내면을 바라 보는 것과 예술 작품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은 우리를 잠시 일상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하고 시간에 쫓기는 자가 아니라, '시간 향유자'가 되도록 한다. 수아지크 미슐로는 <바라본 후에 다스리는 마음>을 통해, 명상과 예술 작품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공통의 선물을 기꺼이 열어보기를 권하며, 결국 우리로부터 모든 것을 수용하는 용기를 이끌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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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마거릿 렌클 지음, 최정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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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들- 어머니와 아버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하얀 후광 속에 온전히 차분하게 잠겨 있는 외외증조할머니- 이 모두 내 주위에 모여 있다. 너무 일찍, 작고 허약하게 태어난 나는 모든 사진 속에서 잠을 자고 있으며, 그들은 모든 사진 속에서 내 주위에 모여 머리를 기울인 채 내 입술이 또 다시 파래지지 않기를 바라며 각자 너무도 얕게 숨을 쉬며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나는 너무 작고 항상 추위를 탄다. 하지만 친족들은 마치 태양인 양 나를 보고 있다. 내 부모님과 외조부모님 그리고 외외증조할머니, 그분들 모두가 나를 지켜보기 위해 모였다. 그분들은 내가 태양인 양, 그분들이 그때껏 평생 추위를 탓던 양 나를 보고 있다.
나는 태양이다. 하지만 그분들은 행성이 아니다.
그분들은 우주다.
31쪽. 당신들이 나를 바라보던 방식

✏️ 얼마전 누군가가 자신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자신을 비롯한 형제자매와 사촌들이 모두, 그 외할머니가 각자 자기 자신, ‘본인’을 가장 좋아했다고 기억해서 놀랐다는 글을 보았다. 보통 “너는 우리들 중 좀 더 특별했지”, 라는 말을 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 그런 공평한 사랑이 가능하게 한 그분의 외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분이 아닐까 싶다. 나같은 경우에는 다른 친척들은 잘 모르겠지만, 외할머니와 고모의 '최애'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게 그분들과 깊고 친밀하게 교감한 기억이 부모님과의 애착 보다도 더 나에게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주고 있다. 어렵고 좌절할 때마다 항상 나의 자존감을 끌어 올려 주는. 나에게 그런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과하게 의미 부여를 하거나 우월감을 가지면 안되겠지만, 누군가의 돌봄을 받는 다는 감각은 외로움과 불안을 잠재워 준다. 그리고 그것이 삶에 주어진 과업들을 견뎌내게 해준다. 황당한, 일어나서는 안될 것 같은, 수치스러운 일 등을 겪는 사람들은 "내가 뭐라고", 혹은 "그럴 수도 있지" 라는 말로 그 일들을 겪어 낸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마거릿 렌클의 글처럼 나를 태양처럼 바라보지만, 사실은 결국 나라는 생명체를 있게 한, 태고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 이어온 우주 같은 존재들이 보내오는, 다른 차원을 넘나드는 신호들을 포착하며 어려운 일들을 결국 받아들이고, 나의 생을 이어간다.

1973년, 버밍햄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죽어가요." 별 다를 것 없는 화요일 오후, 부모님이 엘라 피츠제럴드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어머니는 맨발이다. 아버지가 작업화를 신었지만, 어머니의 발가락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 그 댄스 스텝은 그들 자신의 심장박동만큼이나 익숙하다. 이 노래 가사만큼이나 익숙하다.
나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뭔가에 당황한 채 복도에 서서 지켜본다. 아버지의 팔이 어머니의 허리에 둘려 있다. 어머니는 발끝으로 서 있다. 어머니의 팔이 아버지의 어깨에 얹히고 머리는 아버지의 광대뼈 밑에 기대어 있다. 그들의 다른 쪽 손이 서로 얽혀 그들의 심장 사이에서 마주 잡고 있다. 그들의 스텝은 너무나 잘 훈련되어 있고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그들이 회전할 때 그들 사이에는 단 1센티미터의 빈 공간도 없다.
110쪽.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 어린 시절의 기억, 부모님들과 함께한 기억은 잠깐씩 섬광처럼 스쳐간다. 하지만 그것은 날카롭거나 나를 화들짝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섬광의 끝자락 처럼, 온화한 공기와 은은한 노란빛으로 감싸져 있다. 안개 필터를 낀 듯한 아련함이 깃든. 그 기억속 풍경은 느리게 흘러간다. 그리고 나는 말이 없고 관찰자처럼 앉아 있다. 나는 그들을 지켜 본다. 그들은 내가 없는 듯, 내가 앞에 있어도 사랑하거나 싸우는데 몰두한다. 꿈에 들어간 것처럼 화면이 펼쳐지면 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연기한다. 나는 그들이 나의 엄마, 아빠인 것 외에는 그들을 잘 모르고, 그들이 나의 엄마, 아빠라는 것이 너무나 낯설다. 그들에 대한 기억은 꿈속처럼 나의 발은 무겁고 그들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들이 나와 같은 순간을 공유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같은 순간에 대한 다른 기억들은 실재했음을 비현실적으로 감각하게 한다. 나는 그동안 내가 관찰한 엄마, 아빠에 대한 모든 것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모르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문득 문득 나의 머리와 가슴을 찌르는 그 풍경들을 떠올리면 우리의 너무 많은 우리가 그 시간속에 존재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너무 많은 우리가 얽혀 있었고, 하나 하나 알아가고 싶은, 그 우리의 너무 많은 우리와 우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마음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파온다. 우리는 함께 거기에 있었다.

내 꿈속에 나올 때 엄마는 저승의 유령 혹은 나 자신이 느끼는 비통함을 반영하는 표정이 아니라, 항상 가슴아파하는 모습이다. 꿈에 엄마가 나올 때마다 나의 첫 반응은 항상 안도감이다. 오 감사합니다, 하느님 제가 착각했어요. 당신은 살아 계십니다. 꿈속에서 내가 엄마를 붙잡고 꼭 껴안으며 몇 번이고 "엄마가 왔네요. 엄마가 돌아왔어요. 하느님,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면 어머니는 항상 놀라고 어리둥절해한다.

내가 사랑하는 그 고인들은 자기들이 죽었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어떤 꿈에서 어머니는 우리 집 현관문 옆 옷장 안에서 자신의 옷걸이를 발견하고 짜증을 냈다. "왜 내 훌륭한 나무 옷걸이들을 전부 가져갔니?" 엄마가 물었다.
"엄마가 돌아가셨으니까요." 내가 대답했다. "엄만 돌아가셨어요."
"오." 엄마가 말했다. "그럼 됐다."
250-252쪽. 꿈속에서 어머니가 내게 돌아왔을 때


✏️ "엄마가 왔네요. 엄마가 돌아왔어요. 하느님, 고맙습니다." 이런 꿈을 꾸는 사람이 나말고도 또 있었다니.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꿈으로라도 실현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몸부림을 치는 걸까. 실제로 나도 그랬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꿈속에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면서 전화로 아빠가 사실은 살아 있다는걸 연락을 받게 된 후, "하느님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또한 아빠가 사실은 돌아가셨음을 꿈속의 모두가 알면서도 사후세계에서 돌아온 아빠와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는 꿈마저 꾸었다. 한편 공교롭게도 아빠가 돌아가시고 처음 맞은 나의 생일날, 아빠는 또 꿈에 나왔다. 꿈 속에서 아빠는 내 생일 선물을 꼭 사줘야 한다며 한참 여기저기 옷가게를 돌아다니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빠는 초조했고, 나는 그 동행이 그저 너무 즐거웠는데, 그날 나는 결국 체크무늬 미니 스커트를 선물로 받았다. 나는 그날 잠에서 깨자마자 엄마한테, "엄마, 아빠가 내 생일 선물 주고 갔어."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꿈속에서 아빠를 그저 반겼을 뿐, "아빤 돌아가셨어요."란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는 못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이 순간의 행복이 깨질 것 같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꿈이 무의식의 반영이고, 죽은자와 교감하는 것이 망상이라고 할 지언정, 사랑했지만, 지금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보내는 신비한 신호에 대한 경험을 전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너무나 반갑다. 망자들은 꿈 속에서 거의 웃지 않는다. 꿈 속에서 그들은 항상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닿을 수 없듯이 그들도 우리에게 닿을 수 없으므로. 하지만 가끔 그들은 우리보다 더 어마어마하게 애를 쓰는 것 같기는 하다. 우리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그들은 기적적으로 결국 무언가를 이루어 내므로.


안경 없이도 잘 보는 내 예쁜 조카는 오솔길 아래쪽 옷솔버섯으로 뒤덮인 쓰러진 나무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조카가 나무의 움푹 들어간 곳에 거의 숨겨져 있는 무당벌레 한 마리를 가리켰다. "콜로라도에서 하이킹을 하다가 무당벌레 한 떼를 본 적이 있어요. 그래서 한 곳에 모이는 그 무당벌레 무리를 부르는 명칭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구글을 검색해 봤죠." 조카가 말했다. "그런데 그 명칭이 '사랑스러움(loveliness)이더라고요."
149-152쪽. 보기

애벌레가 약간 움직이고, 마침내 나는 깨닫는다. 이것은 죽음이 아니라 웃자란 피부를 찢고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으로부터 기어서 달아나는, 삶의 다음 단계에 도달하기 전의 휴지 상태일 뿐임을.
그것은 새로운 생물이다.
심지어 그것은 다시 시작하기 전에 다시 시작한다.

✏️ 마거릿 렌클은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에서 자연의 순환과 생의 주기에서 무수히 발생하는 순간들을 포착하고 아름답게 묘사한다. 더불어 대를 이어서 연결되는 대가족 구성원들의 서사는, 그들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고, 나의 이야기가 그들의 이야기가 되는 것을 보여 준다. 나는 자연이나 이전 세대와 분리된,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는 인간과 비인간 모두가 공존하는 삶의 풍경을 때로는 시간과 장소를 넘나들며, 때로는 오로지 지금 여기에 집중하며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돌보는 그녀의 시선은 살아 있음의 경이를 전할 뿐만이 아니라, 때로는 죽음과 상실이 아픔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삶에 가져오는 의미들을 여러 관점에서 살펴보게 해준다. 덕분에 그녀의 글이 나를 돌보는 실마리가 되어 주었다. 나는 이제 세상에 뿌려진 사랑을 더욱 열심히 찾아야 함을, 이 초록색의 세계에서 아직 할 일이 너무 많음을,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도서협찬 #도서제공 #을유문화사 #우리가작별인사를할때마다 #마거릿렌클 #에세이 #칼럼 #에세이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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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연극 을유세계문학전집 130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이 지음, 홍재웅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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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줄리 : ”떠날 수 없어! 머물수도 없어! 날 좀 도와줘! 너무 피곤해, 정말 끔찍하게 피곤해! 나한테 명령을 내려! 아무 생각도 못 하겠고 행동할 수도 없어. 내가 움직일 수 있게 해줘!“


어젯밤, 선명한 주황색 달이 떴다. 나는 달이 뜬 걸 의식하지 못했는데, 친구가 지금 하늘 좀 보라며 알려 주었다. 친구와 송년회 겸 친구의 생일 파티 겸, 와인을 마시러 나가던 길에 만난, 딱 그 무드에 어울리는 달이었다. 달의 색깔과 닮은 오렌지 와인을 마실까, 잠시 생각했다. 친구와 만나기 전에 나는 밥과 반찬을 만들어 식탁에 내어 놓고, 아이들을 학원에 데려다 주었다. 내가 '놀 자격'을 얻기 위해서. 이렇게 왠지 모르게 눈치-괜히 내가 의식하는 사회적 압력-가 보이면서, 아무튼 대단한 건 하지 않아도 역할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최근에 읽은 희곡, <미스 줄리>는 스웨덴의 미드 솜마-하지절이 배경이다. 일년 중 낮이 가장 긴 날, 북유럽 지역에서는 연인을 찾거나, 에로틱한 의식을 행하기도 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축제를 벌인다. 주인공 미스 줄리는 이 하지절에 흥분된 상태로 사회적 관습을 무시하며, 무척 대담한 일을 벌인다. 계급을 뛰어 넘은 사랑을 적극적으로 갈구한다. <미스 줄리>의 배경과는 반대로 나와 친구는 밤이 가장 긴 날, 동지에 동네 단골 카페 파티에 참석하여 술을 마셨고, 동지가 갓 지나 해가 조금씩 길어지는 중인 어제도 또 술을 마셨다. 하지절이 아닌, 동지를 전후하여 우리는 그와 비슷한 의식을 치른 것이다. 평소의 나의 주량은 와인 반병이라 보통 친구와 둘이 마시면 한병으로 충분한데, 주황색 달이 뜬 밤에 우리는 와인을 두병이나 마셨다. 다섯시간 넘게 쉬지않고 이야기하는 것도 가능하게 하는 술의 힘. 미스 줄리 처럼 ‘포도주’의 힘을 빌어 나는 안해본 일, 어쩌면 후회할 일을 저지르기도 했다. 술의 힘을 빌어서 낸 용기, 용기라기엔 부끄러운 충동에 가까운 일이다. 술이 점점 나를 이기기 시작하는 중이라 요즘 술이 깬 후, 아침에 곱씹을 일이 많아지는데, 한편 그 충동의 결과가 너무 궁금하기도 하다. 설사 누군가에게는 조금 갸우뚱 한 일일지라도, 나는 더이상 지나친 자기 검열을 하고 싶지 않다. 무결함을 나에게도, 남에게도 기대하고 싶지 않다. 어제 슬픈 뉴스를 보고 나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삶의 리듬을 만들어 가는 중에 리듬이 박자가 어긋날 수도, 잠시 멈출 수도 있는게 아닌가 싶은데. 나는 무언가 에로틱한 긴장감을 주던 주황색 달을 떠올리며, 달처럼 둥근 술잔 속 깊은 붉은색 와인을 바라보며, 문득 '미스 줄리'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계급이 다른 사람에게 갑자기 고백을 하며 사랑을 나누려던 그녀의 충동, 아버지라는 권위의 억압으로 인한 혼란과 분노, 하지만 스스로 도망갈 용기가 없어 누군가 명령을 내려주길 바라는 취약함. 그녀의 '급발진'들이 뜬금없고, 당황스러웠지만 하지절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자기 마음의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는 것도 어쩐지 부러웠다. 나도 밤의 거리의 어느 장소에서 술을 마시며 '마음을 풀어헤쳐' 버렸지만, 다음날 찜찜함에 하루종일 기분이 불편한데, 그 불편함이 더욱 나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저 자유롭게, 미스 줄리의 광기에 휩싸여 나도 함께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는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 것인, 정체 불명의 불편함에서 홀홀 벗어나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 구분 없이 '자연아'로 키워진 미스 줄리의 정체성은 어쩌면 제3의성, 혹은 퀴어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원하지만, 결혼이나 남자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는 것, 아버지라는 권위에 억눌린 감정을 느끼는 것, 등은 그녀가 전형적인 그 시대 관습에 따르는 여성으로 살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가 아버지에 저항하고자 하지만, '외출했던 아버지가 집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날카로운 종소리'에 불안해함과 그녀가 마음을 연 남자가 결국 그녀와 도망가지 않고, 사회적 계급에 다시 복종하는 모습은 서로의 장벽을 무너뜨리며 다가가던 두 남녀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보여준다. 미스 줄리가 마지막에 한 선택은 정말 죽음일까, 이전의 구속된 자아를 죽이고 다시 태어남일까. 입센의 희곡 <헤다 가블레르>의 헤다도 미스 줄리와 비슷한 캐릭터이다. 19세기 말, 비슷한 시기에 북유럽에서 이런 여성 캐릭터들이 나온 것은 참 공교로우면서 반갑다. 두 이야기 모두 비극적으로 끝을 맺기는 하지만, 그녀들은 자신들만의 목소리를 분명히 내고 있다. 21세기를 사는 나도 아직 제대로 내지 못하는 목소리를. 특히 <헤다 가블레르>에서 집을 나와 헤다의 집을 찾은 헤다의 동창 엘브스테드 부인의 목소리가 반갑다.


엘브스테드 부인 : 글쎄, 간단히 하자. 남편은 내가 여기 온 거 전혀 몰라.
헤다 : 세상에! 네 남편이 몰라?
엘브스테드 부인: 당연히 몰라. 집에 없었거든. 여행 중이었어. 오, 난 그냥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어. 헤다! 정말이야! 거기서 너무나 끔찍하게 외로웠거든.
헤다: 그래? 그래서?
엘브스테드 부인 : 내 물건을 몇 가지 쌌어. 꼭 필요한 것 말이야. 몰래. 그리곤 집에서 빠져나왔어.
헤다 : 그냥 그렇게?
엘브스테드 부인 : 응. 그리고선 기차를 타고 이리로 왔어.
헤다 : 세상에, 사랑하는 테아. - 너 정말 용감무쌍이다!
엘브스테드 부인 : 그래, 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난 절대 다시 돌아가지 않아.
수군대라면 대라지. (우울해지고 피곤하여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난 해야할 일을 했을 뿐야.
헨리크 입센, <헤다 가블레르>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인 그녀들이 사회적 지탄을 받거나, 자립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로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다. 그것이 그저 자살을 가장한 '사회적 타살'이 아닌, 이전의 자신에서 벗어나는 암시라면 얼마나 좋을까. '광기'로 나타나는 그녀들의 말과 행위들은 사실 위축됨과 취약함의 절박한 표현이다. 타협할 여지가 없는, 어찌할 수 없는 압력들 때문에 결국 폭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가 비극적이라 하더라도, 그녀들이 보여준 이 극단적 의지가 어쩌면 내면의 언어의 응축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독자적인 심리적 공간을 주장하자/ 사회의 제한으로부터 자유롭자/ 폭력과 고루함을 극복하자/ 독립적이고 소망에 따라 행동하자/
관습에 저항하자/ 자기 존중감을 견지하자/ 두려움을 억누르자/ 약점을 극복하자/ 자유롭자
사라 케인 <4.48 사이코시스>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지배할 수 없다. 우리는 말하자면 부조리 속에 있다. 자살은 부조리에 대항한 최후의 수단으로 보였다.
싸움의 무용성을 깨달은 순간에도, 절망적이면서도 눈을 부릅뜨고 싸운 맥베스의 행위도 넓은 의미로는 자살의 범주 안에 포함된다.
자살 가능성을 통해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야 말로
끊임없이 비극의 자료가 된다.
엠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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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밍거스 - 소리와 분노 현대 예술의 거장
진 샌토로 지음, 황덕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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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ne>에 대하여-다이앤은 다이앤 도어 도리넥

"이 곡은 지금껏 내가 작곡한 곡 가운데 가장 예쁜 곡일 것이다 - 나처럼 거대하고 거친 세계 속에서 무엇인가를 해내려고 노력하는 여자를 그린 곡이다. 난 그녀의 슬픔 (이 부분은 맨 위의 알토 색소폰으로 그렸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인생이 혹독하고 잘 풀리지 않아도 그녀가 가진 예술적 힘과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한 신념의 힘(이 부분은 밑에 깔린 테너 색소폰으로 그렸다)을 보여 주려고 했다. 그녀는 내가 아는 화가다. 난 이곡을 그녀를 위해 작곡했는데 한동안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364쪽.

<Tijuana Mooda>가 녹음된지 5년만에 찬사를 받고, 모린 멜로이에게 음반 한 장을 선물로 보내면서 남긴 메모

"친애하는 친구에게. 정신이 또렷해서 잠들지 못할 때 나타나는 악몽의 환상이나 밤낮없이 잠들 때 나타나는 또 다른 환상처럼 자주 나타나는 이들 꿈과 희망은 진실로 우리가 누군가를 무의식 속에 찾아 나섰던 연습들이었다는 것을 언젠가 보여 줬으면 좋겠어. (...) 우린 모두 지속되는 아름다움을 알아.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진실이나 사랑 혹은 무엇이든 시장 가격이 없는 것을 담기엔 너무 작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세상의 방식은 진실, 사랑으로부터 멀다는 것이야. 하지만 진실하게 그것을 스스로 찾으려는 마음은 신성하고 다른 것으로는 대체할 수 없어.
추신. 사랑과 함께 채즈가", 448쪽.







약 1000여 페이지 분량의 이 책을 반 정도 읽으면서 이 두 편지를 읽는 순간 그의 삶과 철학이 이 안에 다 압축되어 있다고 느꼈다. 폭력적이고 과격하다는 그에 대한 평가는 그의 복잡한 내면을 이해하지 못하고 캐릭터화한 것일뿐, 그는 그런 오해들과 비난, 좌절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스트라빈스키, 드뷔시, 라벨의 음악을 참고하고, 주변인들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들의 역할을 스스로 믿도록 무의식 속의 잠재력을 끌어내려고 한 예술가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잭 케루악과 앨런 긴즈버그의 비트 제너레이션의 태동, 프란츠 클라인과 잭슨 폴록 등 뉴욕 화단의 등장 , 'LSD를 이용한 영적인 모임' (찰스 밍거스는 그들과 친분은 있었으나, LSD는 거부했다.), 로자 파크스의 반인종주의 운동 촉발,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비폭력적 시민권 운동, 케네디 대통령의 당선 등 지금도 알만한 그 시대 문화적 기후를 바뀌게 한 유명한 사건들 한 가운데 찰스 밍거스가 있었던게 놀라웠다. 한편 지금도 여전히 유명하거나 사라진, 당시에 막 문을 연 뉴욕 클럽들의 목록을 보면서 클럽의 상세한 주소 덕분에 나도 마치 뉴욕 거리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빌리지 뱅가드, 파이브 스팟, 덴, 쇼플레이스 등등. 그곳에는 뉴욕주의 사립인문예술대학인 바너드 칼리지Barnard College의 여학생들이 와서 밤을 새고, 뮤지션들과 대화를 나누고 했다는데, 그런 젊은날을 보낸 여학생들은 어떤 할머니가 되었을지 너무 궁금하다. 책의 묘사가 너무 생생해서 1950년대 전후가 배경이라는 것을 자꾸 잊어버리게 되는데, 지금 우리가 익숙한 재즈의 원형과 전형성이 이미 그때 다 완성되어 있으며 우리가 이름을 알만한 재즈 뮤지션들이 그때가 전성기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비트 문인들과 뉴욕 화단의 화가들은 자신들이 '무의식'을 파고 든다고 보았는데, 그들과 교류한 찰스 밍거스도 자신의 삶과 음악은 '자전적인 충동' 에 따라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가 주변인들에게 편지로 전해주려고 했던, '자전적인 충동'을 신뢰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음악 등의 예술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호소하는 것이고, 또 우리가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는 혹은 스스로 지켜내야 할 마음이 아닐까.

#도서협찬 #도서제공 #을유문화사 #찰스밍거스 #재즈 #재즈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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