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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본 후에 다스리는 마음
수아지크 미슐로 지음, 이현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1월
평점 :
최근에 심리, 정신 건강 관련 유튜브 영상에서 자주 들었던 키워드는 '마음 챙김' 이다. 그 영상에서는 두 팔로 자신을 안아주는 제스처를 취하기를 혹은 '감정 일기'를 써보기를 제안하면서 바쁘고 지친 현대인들이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어 스스로 '마음 챙김'을 하도록 독려 한다. 건강한 식단이나, 근력 운동으로 자신을 단련하고 돌보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마음 챙김'을 통해 마음의 근육을 튼튼히 하는 것은 사실 익숙하지가 않다. 특히 명상에 대해서는 종교적 수행 이미지가 강해서 전문가의 가이드 없이 일반인들이 혼자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고 오해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바라본 후에 다스리는 마음>의 저자 수아지크 미슐로(이하 미슐로)는 그림 한점씩을 독자에게 소개하며, 잠시 그림을 바라보며 우리가 명상의 시간을 갖도록 안내한다. 그녀는 그림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학 작품의 구절도 인용을 하며, 예술이 명상이 될 수 있음을 더 나아가 명상이 예술의 경지에 이르기를 기대하게 한다. 그녀는 미술사를 공부하고, 3년간의 안거 수행을 포함, 사찰에서 7년동안 불교를 수행했다고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그녀가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 그녀는 명상에 특별한 수행 방법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명상의 본질은 형식이 아님을 깨닫고 스스로 만든 장벽을 허문다.
< 수년 동안 칩거 명상을 경험하고 나서야 지금의 나는 내 일상의 중심이야말로 진정한 수련 공간이라는 느낌을 종종 받곤 한다. 가장 일상적이면서 반복적인 동작들이 이루어지는 공간. 예를 들면, 가족과 함께 집에 있다는 느낌은 그 어떤 명상 사원에 있는 느낌 못지않게 소중하다. 내 아이들, 남편과 함께 심리적으로, 그리고 행동적으로 자율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 아주 충동적이어도 좋은 공간.
따라서 명상 수련을 위해 구태여 명상의 본고장 인도로 떠날 필요는 없다. 하루 종일 집에 있기.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우리가 있는 바로 이곳에 집중하는 능력, 일상을 만족의 길로 만드는 재능.>
그녀는 명상이 우리가 '존재'라고 부르는 너무나 아름다운 모험과 수많은 인연을 보살피는 하나의 방법이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썼다. 그녀는 명상을 통해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다른 존재도 수용할 수 있음을, 나 자신이 그동안 알던 것보다 훨씬 더 드넓은 정체성에 속해 있다는 깨달음을 주고자 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찾아오는 변화
미슐로는 우리가 명상을 처음 시작할 때 우리는 모종의 혼돈 상태를 맞닥뜨린다고 한다. 이미지, 생각, 감각으로 이루어진 내면의 소란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SNS에서 찾은 명상의 연관 이미지들은 마음의 평온과 위로를 기대하게 만들지만, 결과는 그 반대인 경우가 부지기수다. 생각은 언제나, 어김없이, 무수하게 그 자리에 끈질기게 남아 있다. 명상자를 끝없이 설득하고 유혹하면서. 생각에 관심을 기울일수록 생각은 더욱 도드라진다. 격랑이나 쉴새 없이 돌아가기만 하는 바퀴로 표현된 인간의 정신이야말로 한결 더 현실적일 거라고 질문을 던진다.
< 전통적으로 연꽃이 지혜를 상징한다면, 그것은 이 꽃이 지닌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연꽃은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서식하는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물과 늪이 없다면 연꽃도 존재할 수가 없다. >
우리는 미슐로의 안내대로 욕심, 오만함, 분노 또는 인색함 속으로 과감히 들어가 우리 영혼 깊은 곳에 뭐가 있는지 발견하게 된다. 수치심, 분노 또는 두려움이 더 이상 무시의 대상이 아니라 소중한 경험으로서 환영받는 바로 그 순간. 진정한 수용은 투쟁을 춤으로 변화시킨다. 그러니 잣대를 들이대거나 뿌리치지 말고 고통과 더욱 상냥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한다. 배제하는 대신 수용하고 포용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미슐로는 수용이란 패배나 체념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동작라고 한다. 승리는 부정하고 공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내려놓는데 있다며 미국 심리학자 칼 로저스와 에픽테토스를 인용한다.
<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변화가 찾아온다. 이것이야 말로 삶의 신기한 패러독스가 아닌가!"
"무슨 일이든 너희가 원하는 대로 되게 하려 애쓰지 말고, 그저 일어나는 대로 놓아두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
미술료가 이렇게 인용한 이유는 무엇이든 반대하고 거부하기보다 그것을 이해하고 수용하라는 의미다. 그 어떤 경우에도 명상은 우리에게 고통을 부정하라고, 나이 듦을 거부하라고 요구하는 법이 없다. 명상은 오히려 이런 것들을 오롯이 끌어안으라고 말한다. 오직 이 방법으로만 우리는 더 행복해지고 매시간을 소중히 보듬게 된다.
세상 모든 것을 연결해 주는 거대한 심장
포스트 휴머니즘에 대해 논의 하는 지금 시대에 이 책에서 소개하는 명상은 더욱 의미가 있다. 포스트 휴머니즘 시대에는 나와 다른 개체 심지어 보이지 않는 존재까지 이해하는 감수성과 그들과 나누는 우애가 중요하다고 한다. 명상을 통해 우리는 고요한 내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결코 음소거 되지 않는 소리들로 가득한 외부를 향헤 감각을 열 수 있다. 내부와 외부, 너와 나의 경계가 없고 단절되지 않음을 통해 마음의 추악도, 삶의 희노애락도 음양의 조화 임을, 그리고 그것이 공존해야 오히려 진정한 '나'를 이해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명상 경험과 유사하게, 우리가 이 책에서 만나는 화가의 작품들은 현실의 경계선들을 조금 더 유순하게 만들어 주고 형태와 비형태 사이,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이원성에 마침표를 찍게 한다. 미슐로는 사물들 사이의 경계란 썩 명확하지만은 않으며, 산이나 우리 자신이나 모두 같은 원료로 이루어졌으므로 자기 자신과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가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은 인식의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명상의 길은 우리가 가진 성격과 인격을 있는 그대로 오롯이 받아들이도록 도와준다. 누구도 우리의 고유성을 판단하거나 억압할 수 없는 것이다. 작가는 우리 마음의 서사가 만든 정체성이 일상생활에 장애를 초래하거나 마음속 생각들이 고통의 근원이 될 때는, 우리가 하는 경험이란 게 사실은 얼마나 몰개성적인가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타인과 동일한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되는 커트라인." 연민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살아 있는 모든 것과의 다정한 다공성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일본의 모노노아와레, 또는 '경이로운 세계에 대한 공감' 개념을 제안한다.
숱한 약점들 너머로 빛이 오솔길을 열 수 있게 하는 것
< "상처야 말로 아름다움의 유일한 기원이다. (...) 나는 예술이 모든 존재, 심지어 모든 것의 이 은밀한 상처를 발견하고 빛나게 해 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장 주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
미슐로는 명상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의 나약한 모습과도 최대한 친하게 지내 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한때는 고통, 치욕, 죄의식의 근원이었던 것들이 받아들여지고 변화되며, 나아가 금이 갔기 때문에 더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인류에게 유용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우리가 가진 유약함에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 이유가 있으며 이를 학대하지 말고 나와 함께 먼 길을 떠나는 길동무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한다. 자기 연민은 자기만족이라기 보다는 정신적 용기에 더 가깝다는데, 연민은 우리가 지닌 결점에 더 이상 지지 않는 마음을 갖게 하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고 요구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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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 모든 사물에는 균열이 있다. 바로 이 균열을 통해서 빛이 들어온다." Leonard Cohen, <Anthem>(1992) >
자기 연민이 우리를 둘러싼 세계로 확장되면, 이 훈련은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 갈까. 이미 수많은 고통을 겪고 난 후라, 우리의 거울 신경 세포는 타인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고통에 더 민감해질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여기에 인간의 균열된 심장을 금으로 이어붙인, 심장에 '킨츠쿠로이' 작업을 한 작품이 있다. '황금 이음새'를 뜻하는 킨츠쿠로이, 이 예술은 우리를 우리의 상처를 향해 상징적으로 회귀시킨다는 점에서 자기 연민 수행과 유사하다. 이 접근 방식은 우리가 스스로의 약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취약한 부분을 정성껏 바라보다가, 마음의 갈라진 곳을 연민으로 섬세하게 다시 봉합하라고 권한다. 내면 어딘가 상처를 입거나 금이 간 것을 부정하거나, 결점을 숨기거나, 두려운 것들을 깊숙이 묻어 두지 말라고.
미슐로는 '완벽한 자아를 추구하는 것'을 경계한다. '완벽한 사람 만들기'가 명상의 목적은 아니며, 우리가 세상에 무해하게 헌신하기, 자기 계발의 개념에서 자기 수용의 개념쪽으로 이동하기를 권유 한다. 수행자는 완전 무결한 존재일까? 수행자는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를 품은 존재가 아니라, 햇살 아래 온화함과 폭풍우와 혼돈이 뒤섞인, 그 모든걸 안고 가는 존재일 것이다.
존 케이지의 작품(<4분 33초>)은 언뜻 조용하게 느껴지겠지만, 실제로 이 조용함에는 온갖 종류의 소리가 깃들어 있다. 명상은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 내는 소음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명상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이분법적 사고를 불이원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세상에 모두가 각자 존재하지만 사실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공존의 아이러니는 우리를 사회로부터의 분리 불안과 사회적 압력의 강박에서 벗어나게 한다. 미슐로는 명상을 통해, 우리가 사회에 적응하려 애쓰지 않는 주체로서 살아가도록, 성취와 매뉴얼을 강박적으로 추구하지 말고 내버려 두도록 독려한다. 명상으로 깊숙한 내면을 바라 보는 것과 예술 작품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은 우리를 잠시 일상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하고 시간에 쫓기는 자가 아니라, '시간 향유자'가 되도록 한다. 수아지크 미슐로는 <바라본 후에 다스리는 마음>을 통해, 명상과 예술 작품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공통의 선물을 기꺼이 열어보기를 권하며, 결국 우리로부터 모든 것을 수용하는 용기를 이끌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