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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공의 빛을 따라 ㅣ 암실문고
나탈리 레제 지음, 황은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11월
평점 :

『전시』라는 작품을 통해 나탈리 레제라는 작가에게 매료되었다. 그녀의 글은 대상을 집요하게 응시하면서도 끝내 투명한 슬픔을 남기는 묘한 힘이 있다. 그래서 이번 신간 『창공의 빛을 따라』의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막연한 기다림이 있었다. 게다가 황은주의 번역은 최근에 라두 루푸로 맺은 인연과 이어지는 듯한 반가운 소식이었다. 을유문화사 서평단으로 가장 먼저 이 책을 만나게 되어 감사하다.
나탈리 레제의 『창공의 빛을 따라』는 한 사람의 죽음 이후 남겨진 자가 무엇을 쓰고, 또 무엇을 끝내 쓰지 못하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남편 장-루 리베이르의 죽음은 그녀가 평생 다듬어온 문장과 사유의 질서를 단번에 무너뜨리고, 언어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세계를 마주하게 만든다. 이 책은 애도의 감정을 단정하게 정리해 들려주는 추도사가 아니다. 오히려 상실 이후 언어가 어떻게 파편화되고, 문장이 어디까지 부서질 수 있는지 끝까지 따라가는, 어쩌면 운명적으로 생애에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텍스트에 가깝다.
레제가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사실은 글쓰기의 불가피한 불완전성이다. 사고와 감정을 문장으로 옮기는 순간, 진실의 일부는 반드시 누락되고 일그러진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부족함’ 때문에 쓰기를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그 불완전성을 책의 중심 주제로 끌어올린다. 롤랑 바르트가 “문학은 덜 고통받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했듯, 레제에게 글쓰기는 고통을 없애는 행위가 아니라 고통과 문장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는 작업이다. 그 문장들을 읽다보면 말이 닿지 않는 영역, 언어가 침묵으로 밀려나는 경계면을 함께 건너게 된다.
이 책이 가진 독특한 힘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레제는 비탄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기보다, 기존의 문법으로는 말할 수 없는 상실의 경험을 문장 구조 자체의 균열로 드러낸다. 남편을 향해 ‘너’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은 그를 현재형으로 불러내고자 하는 마지막 시도로 보인다. 현재형은 광기로, 과거형은 두 번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모순 속에서 그녀는 결국 말하기의 실패를 인정한다. 그리고 그 실패의 흔적—흩어진 문장, 망설임이 묻은 호명, 시제의 갈등—을 한 번도 숨기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창공의 빛을 따라』를 관통하는 문법적 애도의 형식이다.
책의 구조 역시 그러한 균열을 그대로 반영한다. 마흐말바프의 영화, 아이네아스의 황금 가지 등 서로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파편적인 이미지들이 남편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중력장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소환된다. 아키비스트인 레제는 이제 단순한 문헌 정리자가 아니라, “상실에 괴로워한 사람들의 기록”을 찾아 헤매는 절박한 독자가 된다. 빅토르 위고가 강령회 이후 “가득 찬 공허”라 적어두었을 때, 레제는 그것을 바로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가리키는 정의로 받아들인다. 이 책은 그렇게 상실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텅 비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과잉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모순의 지도처럼 펼쳐 보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수아지크 미슐로의 『바라본 후에 다스리는 마음』에 등장하는 킨츠쿠로이의 비유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미슐로는 금이 간 도자기를 옻칠과 금가루로 봉합해 오히려 더 고유한 형태로 되살리는 킨츠기의 방식을 설명하며, “자기 연민은 갱신의 예술”이라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처를 숨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금이 메운 이음새는 균열을 덮는 장치가 아니라 상처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며, 그 결함을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변환하는 지점이 된다. 상처는 제거해야 할 결점이 아니라, 다른 세상을 여는 새로운 입구이자 변화의 약속이다.
레제의 글쓰기 역시 킨츠기의 미학을 문학적 방식으로 수행한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매끄러운 서사로 정리하지 않는다. 대신 반복해서 금이 간 자리를 더듬고, 그 틈에 문장을 덧입히며, 부서진 언어를 금빛 이음새처럼 그러모은다. ‘너’와 ‘그’를 오가는 호명은 마치 도자기의 안쪽과 바깥쪽에 서로 다른 표면을 가진 이중 구조처럼 흔들린다. 그 틈에서 레제는 다시금 “네 죽음 안에서 너와 하나가 되어 있다”고 말하며 상처를 숨기지 않고 통과하려는 태도를 드러낸다. 이는 부서진 조각을 원래대로 복원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균열을 품은 채 새로운 형태로 존재하려는 고백이다.
결국 『창공의 빛을 따라』는 상실을 극복하거나 완전히 봉합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상실은 사라지지 않지만, 우리는 그 상실과 함께 다시 걸음걸이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길고 섬세한 증언이다. 미슐로가 인용한 장 주네의 문장처럼, “상처야말로 아름다움의 유일한 기원”이며, 예술은 그 은밀한 상처를 발견하고 빛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레제의 문장은 바로 그 상처의 자리에 금을 얹어 봉합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상실의 무게를 덜어내기보다는, 그 무게 속에서도 여전히 빛을 머금은 세계—창공의 빛을 따라 아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세계—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믿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