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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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민규, 장강명과 또 다른 결을 지닌, '술술 읽히는 마법'을 부릴 줄 아는 작가의 등장. 

박진감 넘치는 서사와 가문-사회-문화로 세계관을 확장하는 솜씨에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이 생각났다. 가볍지 않은 두께임에도 숨가쁘게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이야기는 끝나도 상상은 끝없이 뻗어다간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장인의 일대기와 그 안에 숨겨진 삶의 비밀을 포착한 소설. 마치 영화를 '보듯' '읽는 일'의 경계를 허무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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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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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로 미처 표상되지 못한 감정의 잔해는 사랑의 언어를 거두어들인 후에도 미처 쓸려가지 못한 바닷가의 모래처럼 남는다. 사랑의 의미를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과정을 통해 주고받는 연인간의 사랑해라는 말 또한 정작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것은 사랑이라는 언어 속 전달자의 함의가 아닌, 비언어적 감정의 교감일 뿐이다. 이러한 언어의 불완전성은 우리를 불안에 빠뜨리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언어로 표상할 수 없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직감일 것이다.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는 사랑과 관련한 두 남녀의 이야기다. 그러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두 남녀-필용과 양희-는 연인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사랑의 양상이 대비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단순한 연인 간 연애의 온도차가 아닌, 두 사람에게 직면한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본질적 의미는 소설 속에서 각각 다르게 형상화된다. 특별히 이 소설은 서사의 구성이 화자인 필용의 과거의 경험을 통해 진행되는 그의 소싯적 사랑 이야기라는 점에서,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며 정신분석적으로 필용이라는 남성 화자를 다채롭게 구성하여 읽어 보려고 한다.

 

  1. 필용이라는 남자가 미처 알지 못한 것

필용은 대기업의 회사원이며, 겉으로 드러난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회사에서 소위 좌천되었을 때에도 아들 학교의 학부모회에서 돌릴 명함에 대한 걱정부터 떠올린다. 그에게 있어 눈에 보이는 것- 다시 말해 구체적인 언어로 명명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중요하다. 그의 직함, 부서, 회사명은 모두 그의 존재를 가시화시키는 힘의 구심점으로 작용하며 타인과 마주하는 접촉면으로 기능한다. 그렇기에 그는 좌천되었다는 과정과 사실 그 자체보다, 타인에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전전긍긍하며 속이 뒤집어지는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맥도날드의 피시버거가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기실 눈앞으로 실존하지 않는 것에 대한 미련이 없는 그이기에 다행스러운 일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필용의 태도에서 모든 것을 가시화하는 한낮의 삶을 살고 있다는 은유를 읽어낸다면, 이에 대비되는 은 그가 몰랐던 모든 것을 품고 있다. ‘은 그가 몰랐던 모든 것에 대한 은유이다. 강제로 인사이동을 통보받은 시설관리직은 지하에 사무실이 위치해 있으며, “건물에 있는 178개의 수도관과 4천개의 전기회로의 안녕을 챙기는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회사 건물 내부의 시설들을 대하는 일이다. 자신이 알지 못했던 이러한 밤의 세계에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필용이 과거 속에서 되풀이되었던 전혀 알지 못했던 하나의 세계를 마주한 경험- 양희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과연 우연은 아닐 것이다.

양희는 필용의 허언증을 받아주는 사람이며 필용이 만났던 여자애들 중 그렇게 부끄러워하지도 뭔가를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던사람이다. 필용은 양희가 건넨 돈에 자신의 돈을 조금 보태 양희가 알지 못하는 선의를 베풀며 가깝게 지냈으나 이러한 마음을 사랑이나 그와 비슷한 것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사랑은, 또한 필용에게 있어서 언어로서 충분하게 정의되는 것이다. 필용에게 있어 사랑은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연속선상 위에 놓여 있으며, 출발점 혹은 정거장으로 인식되고 있는 양상을 보인다.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어떻게요?”

양희가 뭐 그런 걸 묻느냐는 듯이 되물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거지.

그런 걸 뭣하러 생각해요.”

 

양희를 만난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가. 그건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연애와 사랑, 연민, 속박, 약속, 의무, 섹스의 시작이었다. 있던 게 없어지는 게 아니라 없던 게 생겨나는 것이었다. 필용은 난생처음 무모함에 대해서 생각했고 이윽고 시동을 걸었다. 가는 동안은 당연히 퀸이었다.”

 

사랑은 필용에게 있어 육체적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정당성을 부여하는 행위, 언어로 공표함으로써 누군가의 남자친구로 자신의 위치를 확립시키려는 행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용은 양희의 고백을 두고 여자친구라고 생각하면 결격사유가 많았다라고 회상한다. 그런 필용에게 언어로 표상된 것이 아닌, 그때그때 언어와 의미 사이의 간극을 통해 존재가 느껴질 뿐인 양희식의 사랑은 그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영역의 것이다.

 

양희가 필용을 사랑한다고 선언한 후, 필용은 양희보다 더 사랑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온 관심사가 양희에게 쏠려 있는 그는 끊임없이 양희에게 자신을 사랑하냐고 물으며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을 전면에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수동적으로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그가 사랑한다는 능동적 행위가 함의하는바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그는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통하여 대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불가해한 기쁨을 느낀다. 자신 이외의 타인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필용 그간 보여주었던 나르시스트적인 태도, 허풍을 비롯해 비대한 자아이상이 현실의 자신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방해하는 나르시스트적인 면모에서 넘어서 리비도가 오로지 자신만을 향해 있던 흐름이 양희의 사랑이라는 새로운 에너지의 유입에 방향이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연다. 그것은 필용이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2. 필용이라는 남자가 끝내 알게 된 것

필용이 양희에게 그토록 사랑에 대해 갈구한 것은 그의 어떠한 욕망과 관계가 깊을까. 우선 소설 텍스트에 나와 있는 단어를 차용하자면 구원에 가까울 것이다. 그는 양희의 사랑이 단순히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점차 자신을 안달 나게 하는, 가치 있는 무언가가 되었음을 인지한다. 그렇기에 양희에게 더 이상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필용은 그 무시무시한 사실에 대항하여 방어기제로 양희를 회유했다가, 그녀에게 폭언을 퍼부음으로써 공격적인 성향을 지니게 된다. 필용에게 있어 사랑받는다는 것은 부풀려진 자아이상이 타인에게도 똑같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오는 위안이며, 존재에 대한 구원에 다름없다. 그렇기에 사랑만이 그가 집착할 수 있는 가장 유일한, 가장 최후의 것이었다.

그런데 필용이 자아이상을 갖게 된 데에는 어머니의 영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필용의 어머니는 존재의 구원에 대하여, 서양 선교사들이 내려준 약을 먹고 병이 나았던 경험과 관련하여 이들을 천사로, 하느님의 구원으로 인지한다. 초자연적인 구원의 계시로 존재를 환원시키는 어머니의 인식은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아들인 필용을 그녀에게 하느님이 준 선물이자 세상에서 가장 잘난 아들로 비치게 한다. 어머니의 어릴 적 경험에 대한 인지적 과장과 자신에 대한 어머니의 과도한 기대는 필용에게 부끄러움을 선사하면서 동시에 괴로움이 된다. 능력을 웃도는 성공에 집착하여 실력이 부족함에도 유학준비를 강행하는 등 그의 모습 속에는 어머니에 의해 공고해진 자아이상과 그 간극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자신을 누군가가 사랑한다고 느꼈을 때 필용은 존재에 대한 확신과 함께 기쁨을 누렸지만, 사랑이 사라져버렸다고 느꼈을 때, 필용은 견딜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후 돌발적으로 찾아간 양희에게서 그는 존재의 부끄러움이라는 자신의 불안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비웃지 않는 나무를 바라보며 그 부끄러움을 어둠 속에서 견딘다.

필용은 사랑을 언어라는 표상으로만, 외부에서 전달되는 확신으로만 인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왜 사랑을 갈구하는지 깨닫지 못하였다. 그에게 있어 사랑은 존재의 확인이자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대상 a. 양희의 안내를 통해 비로소 그는 자신이 욕망하던 것이 양희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깨달음을, 그는 전율하던 사랑은 사라지고 없었음을, “아주 뻥 뚫린 것처럼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으로 인지한다.

그러나 한낮에 보였던 것들이 밤에는 보이지 않게 된다고 해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낮에 충만하게 보였던 것들은 밤에 보이지 않게 되더라도 그 자리에 존재한다. 신체 기관인 눈으로 보았을 때 사라졌다고 할 수 있으나, 사실은 그저 가려져 있을 뿐이며 부재한다는 눈속임으로써 그 자리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필용이 말하는 무언가가 아주 사라져버릴 수 있음에는 (눈 앞에서) 라는 괄호가 생략되어 있다.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하는 것은, 즉 인지의 불가능성을 일컫지만, 인지하지 못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처럼 그것은 우리의 인지 아래, 없음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필용이 또다시 인생의 밤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밤처럼 깜깜한 연극장의 어둠에서 다시 조우한 양희는 어느새 그가 부끄러움을 견딜 수 있었던, 수피가 벗겨질대로 벗겨진 바로 그 나무가 되어 있었다. 비웃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양희의 시선에서 비로소 그는 자신이 없어졌다고 알고 있었던 존재의 부끄러움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음을 확인한다.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으로 무마되었다고 생각했을 자신의 존재의 불안함은, 언어로 표상할 수 있는 것들에 의해 공고히 구축된다고 믿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부끄러웠기 때문에 더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로 위태롭게 증축되어가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때, 필용은 비로소 양희의 사랑을 간절히 바랐던 과거의 자신이 아직도 밤에 파묻힌 채로 그 자리에 있음을 깨닫는다. 동시에 필용은 나무로서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양희 앞에서는 설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자각하게 되어 버렸다. 양희에게 전하고자 했던 말들은 양희의 대본처럼 사라졌지만, 그는 언어로 표상할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제는 경험적으로 알게 된다. 사랑이라는 말로 표상하기에는 부족한 공간들, 흘러 넘치는 감정들, 가시화할 수는 없으나 그 자리에 생장하고 운동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세계 말이다.


-2017. 5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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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고독
권성우 지음 / 소명출판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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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뭄 속 오래 기다렸던 반가운 빗소리처럼, 비평의 고독은 충만하고 깊은 사유와 현 시대 한국문학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품고 있어 수준 높은 비평 서적의 묵은 갈증을 단번에 해소한다. 소제목들을 따라 전개되는 사유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몇 지점에서 마주하고 갈라지기를 반복하는데, 이 교차로마다 읽을 수 있던 작가의 한국문학에 대한 애정과 우려에 감탄과 더불어 깊은 공감을 느꼈던 것은 오로지 이 책 읽는 독자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일 것이다. 또한 당연하게도 이처럼 작가와 공명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지점에 대하여 짚어보고자 하는 열망 또한 생겨나게 되었는데, 좋은 글이 창작에 대한 열망을 자극해 또 다른 글을 양산시킨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 책이 가지는 커다란 장점 중 하나로 감상문을 쓰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평의 고독에서 울림을 느꼈던 지점에 대하여 첫째로는, 결국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일관되고 뿌리 깊은 관념을 마주하게 되는 그 지점을 짚을 수 있을 것이다. 소제목 문학의 운명, 혹은 패배한 자의 아름다움’, ‘진보적 지식인의 자기 성찰과 타자의 상처에 대한 깊은 공감-허준론’, ‘상처받은 시인의 순정-이재무론’, ‘자기모멸의 시학-허연론을 비롯한 글들에서 오롯이 느껴졌던 문학과 상처, 고독, 자기모멸과 같은 키워드는 작가의 문학 세계를 상징하는 단어들이다. 진정한 문학이 점차 소외되고 다수의 문학이 자본과 결탁하여 이데올로기의 앞잡이가 될 때, 과연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 하는 질문들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저자의 단단한 문학 세계를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스스로 상처가 되는 문학은 마치 타들어가는 촛불처럼 이제 빼앗길 것이 없다. 그 자체가 그대로 존재의 근원이자 본질이므로. 그러나 문학이 세상과 맞서 스스로 곡진한 슬픔이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문학을 배태한 사회의 그늘과 주름, 역사적 굴곡과 윤리적 지평, 타인의 상처와 절망을 투시해야 한다. / 스스로 슬픔이 되어, 상처가 되어 세상과 대면하는 문학은 곧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문학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존재 그 자체의 상처와 자존을 연료로 삼기에 그들은 상대적인 문단시스템과 출판자본과 거리를 둘 수 있고, 대중성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57)” 이와 같은 작가의 통찰력과 사유는 이 시대 진정한 문학은 문학이 상처받는 자리에 있을 때, 인간과 사회가 지니는 결여에 주목하고 그것을 품을 때 진정한 빛을 낸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값싼 위로로 긍정하지 않고 정직하게 직시하는 문학, 한계를 포장하지 않고 인정하며 고통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문학,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불의를 고발하는 문학은 그 자체로 저항의 장이 되며 존재가치를 획득하게 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작가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문학들의 비평 기준에 대한 것이다. 소제목 문학과 정치 사이의 팽팽한 지적 긴장’, ‘정치적 올바름은 미학적 품격과 만날 수 있는가’, ‘소설, 미학, 정치’, ‘세월호의 슬픔 속에서등을 보면 작가가 비평 기준으로 문학에 있어 엄정한 사회 비판적 기능의 역할과 미학적 구성을 기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깊이 공감하는 바인데, 정치적 목소리를 잃은 문학은 그 깊이를 획득할 수 없고 수준 높은 미학적 구성에 실패한 문학은 문학으로서의 매력을 가질 수 없다. 앞서 문학이 획득한 자리에서 문학이 기능을 하려면, 문학이 속한 사회를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하고 비판을 수행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말이 미시적 개인적 관심의 부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작가도 짚어냈듯, 문학은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는 그늘과 정념, 감성, 욕망, 비합리성, 심성을 어떤 예술보다도 섬세하게 포착하는 문학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374)”. 그러나 문학은 인간에 주목하면서도 사회를 배재할 수 없고, 비판적 임무를 망각해서는 안된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가 소개한 김석범의 화산도, 서경식의 시의 힘같은 책은 이러한 균형을 고루 갖춘 보물과도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개인적인 사견을 덧붙이자면 작가가 반복하여 언급하는 아름다운 문학에 대한 기준을 이 책이 비평으로써 도달했다고 느껴진다. 작가의 아름다운 문체와 날카로운 비판적 사유, 그리고 문학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은 사유의 깊이와 미학적 아름다움을 고루 지녔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시한번 반복하건대, 단비같은 책이다.


 -2016. 08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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