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
설재인 지음 / 밝은세상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엄마, 그거 알아? 나는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걸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


등산 후 엄마와 마주 앉아 현실로 이뤄질 가능성 없는 만약에~를 늘어놓으며 후루룩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전완근이 멋진 여자 엄주영. 그는 연달아 막걸리와 흑미밥을 품고 무거워진 속을 비우기 위해 화장실에 갔다가 자신이 생각했던 만약에가 이뤄진 평행 세계에 들어가게 되고 남자로 태어난 엄주영을 마주한다. 그리고 남자 엄주영 앞에 앉아있는, 원래 세계에서도, 평행 세계에서도 여전히 똑같은 엄마와 아빠, 또 다른 문제로 마음 졸이고 있는 여자들을 만나게 된다.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은 평행 세계에 들어간 엄주영이 그 안에서도 여전히 고통 받는 여자들을 도우면서 원래 세계에서 저지른 실수를 인지하고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과 차후엔 포기했던 꿈을 향해 다시 한 걸음 내딛게 되는 과정을 담은 엄주영의 성장물이자 여자들의 든든한 연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너를 위해서라면 노브라의 머쓱함 따위도 별거 아니라는 듯 당당하게 속옷을 벗어재끼는 그들의 단단하고 숙성된 우정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여자들은 자연스럽게 집안에 머물며 조용한 피해자가 되길 바라는 세상에서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의 여자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용기를 낸다. 때로는 강력한 전사의 모습을, 때로는 부드러운 손길로 등을 토닥이는 옆집 언니 같은 모습을 보여주며 같은 문제로 아파하는 나와 같은 여자들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나의 마음과 시간을 투자한다.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의 주인공 엄주영이 살아온 세계와 평행 세계에서 남자란, 아버지란 항상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거나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인물이다. 엄마는 엄마라 부르고 아빠는 아버지라 부르는 주영의 말버릇에서 아빠에 대한 거리감과 그가 은연중에 주장해왔을 권위가 느껴진다.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집안의 가장 엄용민씨 밑에서 엄마 배중숙씨는 딸과 가정을 위해 옷 한벌 맘대로 사 입지 못했고, 남편이 어떤 잘못을 해도 아빠니까, 가장이니까라는 말로 그를 감싸기 급급하다. 딸 엄주영은 아빠의 폭력적인 연습 강요에 질려 좋아하던 탁구를 포기하고 어른이 된 후 유도를 배운다. 꾸준한 운동 덕에 아름답게 발달한 전완근을 그는 아빠의 폭력성을 그대로 물려받지 않은 딸이라, 남자에 비해 선천적으로 힘이 약한 여자라 (힘이 강한 남자인 아빠처럼) 사람들을 괴롭힐 수 없어 다행이라며 농담 몇 마디를 던진다. 뼈가 든 농담이지만.

 

농담 아닌 농담이 한바탕 지나가고 여자 엄주영이 했던 남자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정말 다행이다 싶은 느낌이 확 드는 평행 세계가 등장한다. 같은 아빠, 엄마 밑에서 남자로 태어나 자라온 평행 세계의 엄주영은 여자 엄주영이 농담 삼아 던졌던 내가 남자였으면 큰일 났을일들을 그대로 행하고 있다. 엄주영은 남자 엄주영의 비뚤어진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다. 같은 환경에서 자랐고, 가정 폭력이라는 같은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인데 성별만 다르단 이유로, 잘못된 친구를 만났단 이유로 이리도 다른 사람이 되다니. 남자 엄주영은 학창 시절부터 동창생들을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하며,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을 모아 불법적인 일에 투입시키는. 그야말로 동네 최고 양아치, 범법자, 망나니 그 자체다.

 

차라리 그냥 평행 세계에 사는 쓰레기 엄주영이었으면 크게 상관을 안 할 텐데, 남자 엄주영 옆엔 집을 벗어나겠다는 목표로 결혼을 외치는 어린 여자아이 연재와 여기서도 여전히 집안 남자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엄마 배중숙씨가 있었고, 남자 엄주영과 이창민 패거리에게 괴롭힘당하고 아빠의 인생까지 빼앗겨버린 베스트 프렌드 은빈도 있었다.


 

엄주영은 내가 살아온 세계와 비슷한 아픔을 안고 있는 이 여자들을 구하리라! 다짐한다. 본인도 똑같이 힘들어봐서 얼마나 아픈지 아는데, 내 세계와 이 세계의 여자들 모두가 아프고 힘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엄주영은 지키고 싶은, 아끼는 인물들에게 튼튼한 전완근을 내보이며 묻는다. “제 전완근 한번 눌러보실래요?”, 마치 너 내 동료가 돼라.”는 말처럼 어색함과 거리감을 순식간에 없애버리는 마법의 주문 같은 한마디에 여자들은 함께 꺄르르 웃으며 동료가 된다.

 


저희 엄마가 가족 빼고 친한 사람들이라고는 탁구장 회원들밖에 없는데.. 내가 모자란 죄를 엄마한테 뒤집어씌우는 거니까. 지금도 엄마는 모를걸요, 쟤네 패거리가 저 괴롭힌 거.”

 

엄주영은 적어도 나 자신은 지킬 수 있을 만큼 단단하게 자라온 여자다. 다부진 체구와 숯검정 눈썹을 가진 딱딱하고 폭력적인 아빠와 거리를 두는 법을 알고, 그를 피해 자리를 뜨는 방법도 안다. 아빠에 대한 트라우마를 떠올리곤 하지만, 그래도 그로 인해 그 자리에 주저앉거나 남자들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이진 않는다. 나름 할 말은 다 한다.

 

그에 반해 평행 세계의 여자들은 가부장적인 남자들의 영향력과 사회적 시선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은빈은 이창민 패거리에게 괴롭힘당하고, 자신의 아빠가 이창민에게 폭행 당한 걸 알면서도 엄마의 사회생활, 자신의 경찰 생활을 위해 모든 일을 모르는척한다. 이런 일을 공론화했을 때 가해자를 벌하기보단 피해자에 대해 수군거리는 사회적 분위기와 결국은 장난을 괴롭힘으로 받아들인 예민한 여자가 되어버리는 이상한 공식 아래, 은빈은 모든 죄책감을 묻고 살아간다.


 

난 내가 여경이 되어서 막 대단한 일을 해내고 싶은 건 아니었어. 그냥, 그런 일을 쪽팔린다고 아무 데서나 말하지 못할 세상은 안 되기를. 용기 냈더니 뭐 이런 작은 걸 가지고 유난이야, 그냥 네가 운이 좀 나빴네, 너무 예민하면 삶이 피곤해, 하는 말을 듣는 세상은 안 되기를 바라서. 사람들이 흘려 넘기는 것들이 내 안엔 고여 있으니까.”

 

이 세계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고 어디까지 손을 대야 하는 걸까. 여기도 저기도 똑같이 문제가 되는 사안들. 그리고 평행 세계에서 더욱 강하게 엉켜버린 인연. 집안에 틀어박혀 자연스레 사회에서 사라져가는 여자들과 줄어들고 있는 그들의 목소리. 엄주영과 친구들은 그들을 대신해 커다란 권력자인 이창민 패거리를 끌어내리기 위해 준비한다.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의 여자들은 오래된 과거와 그때의 상처를 이유로 웅크리고 있는 수동적인 피해자의 모습을 벗고 가해자 앞에서도 당당한 여자의 모습으로 서로를 도우며 잘못된 세계를 풀어간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포기했던 나의 모습을 되찾는다.

 

사건이 해결된 후 엄주영은 연재와 평행 세계의 배중숙씨가 골라준 탁구채와 탁구화를 신고 다시 탁구를 시작했고, 이창민의 직접 피해자인 은빈과 다정은 이창민 패거리 앞에서 당당히 고개를 들고 맞선다. 그리고 그저 왜 이러나-싶어 걱정되기만 했던 연재는 언니들의 첨삭을 받은 결혼 서약서를 작성해 현명한 결혼생활을 이어나간다. 각 인물들은 서로의 곁을 지키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앞에 놓인 문제들을 차근차근 극복하고 더욱 강해진다.


 

이렇게 배불리 먹이면 막막할 때 이 집 생각이 나겠지.”

평행 세계로 뚝- 떨어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엄주영에게 은빈과 은빈의 엄마 효길은 한줄기 빛, 구세주였다. 매일 든든하게 차려지는 밥상, 아늑하고 안전한 방. 그리고 갈 곳 없는 엄주영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 품어낸 효길의 따뜻한 마음이 들어찬 이 집. 가끔 막막해질 때면 여자의 의리와 사람의 온정이 가득했던 이 집이, 거실에 함께 머리를 싸매고 앉아있었던 동료들이, 같은 아픔을 가졌던 그들이 생각날 것 같다. 같은 결의 아픔을 가진 이들이라면, 언제든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고 위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이들과 함께 막걸리 한 사바리를 비운다면 언젠가 다시 닥쳐올 아픔도 가볍게 털어낼 용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막막하고 힘이 들 때면 여자들의 의리와 연대가 가진 힘이 철철 넘쳐흐르는 이 책이, 주영 엄마 은빈 엄마가 아닌 중숙씨와 효길씨, 주영과 은빈, 연재, 다정이 기다리고 있는 이 책이 이 생각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