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 (출간 15주년 기념 백일홍 에디션)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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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박완서 작가가 일흔이 넘어 쓴 산문집으로 15년 만에 분홍색 옷을 입고 재출간된 것이다. <노란 집>을 몇 년 전에 읽고 그동안 작가님의 글을 접하지 못했던지라 푸근하고 편안한 작가의 산문집을 읽는 시간은 내겐 휴식 같은 시간이 되어주었다. <호미>에서의 작가는 촌철살인도 예리함도 없는 그저 이웃 할머니요, 내 엄마, 이모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작가의 하루하루는 따스한 활자가 되어 내 어린 시절을 꺼내고 엄마들의 고단했던 삶을 엿보게 했다. 그 시대는 다 그렇게 살았어... 하는.


'이슬에 젖은 풋풋한 풀과 흙냄새를 맡으며 흙을 주무르고 있으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과 평화를 맛보게 된다.' p21
소련군을 피해 개성을 탈출한 이야기, 손주들을 위해 구정이 아닌 신정을 고집하셨던 할아버님에 대한 추억, 서울대에 입학하자마자 터진 한국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맑은 청계천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회 등 평범한 우리네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에 빠져들게 한다.



'그까짓 맛이라는 것, 고작 혀끝에 불과한 것이 이리도 집요한 그리움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p185
26년 5개월을 시어머님을 모시고 산 이야기와 시어머님에 대한 애정과 가톨릭에 귀의하게 된 이야기, 고향에서 먹던 거친 음식 한 그릇에 진한 그리움, 식민지 시절 학창 시절 이야기 등은 작가의 과거를 아련하게 느끼며 함께 울먹이게 한다.

'만약 엄마가 더 늙어 살짝 노망이 든 후에도 알량한 명예욕을 버리지 못하고 괴발개발되지 않은 글을 쓰고 싶어 한다면 그건 사회적인 노망이 될 테니 그 지경까지 가지 않도록 미리 네가 모질게 제제해 주기를 바란다. 엄마가 말년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다오.' p260
책의 말미는 이이화 선생, 조각가 이영학 선생, 박수근 화가, 김상옥 선생님 등 작가님이 존경하셨던 분들에게 바치는 글들과 딸에게 당부하는 그들로 채워져있다.





'돌이켜보니 김매듯이 살아왔다. 때로는 호미 자루 내던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후비적후비적 김매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거둔 게 아무리 보잘것없다고 해도 늘 내 안팎에는 김맬 터전이 있어왔다는 걸 큰 복으로 알고 있다.' p262
밥하고 반찬을 하는 건 손에 익으면 쉬워지지만 글 쓰는 일은 생전해도 숙련이 안된다는 박완서 작가님. 난 촌철살인의 글보다 우리 엄마 같고 내 할머니 같고 내 이웃 같은 작가의 노년 글이 더 할 수 없이 좋았다.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이 혹은 누군가가 거두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던 작가님의 문장은 이만큼의 삶은 살아온 나를 멈춰 서서 뒤돌아보게 만들었다. 이렇게 작가님처럼 다 받아들이면서 나이 들어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마치 작가님이 정성 들여 만든 꽃밭에서 노니는 기분이었다. 그 시간은 편안하고 따스하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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