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러 : 인문주의 예술가의 초상 마로니에북스 Art Book 7
스테파노 추피 지음, 최병진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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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미술에 새로운 장을 열어 새로운 표현양식을 선보인 뒤러는 독일 미술계에서 네덜란드의 렘브란트, 벨기에의 루벤스와 나란히 손꼽힐 정도로 높이 평가받는 위대한 화가다.또한 판화가 ·미술이론가.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완성자이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표현기법을 터득하였고 점차 독일 전통에 충실하였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이어지는 미술사에서 비할 데 없는 업적을 남긴 최고 수준의 대가였다. 또한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 최초의 독일 화가였으며, 자화상을 독자적인 분야로 확립한 최초의 화가였다.

 

일찌감치 예술적 기술적으로 탁월한 수준의 수채화와 판화를 선보인 그는, 독일 최초로 누드를 실물 사생한 화가였는가 하면 미술 이론에 관한 글을 써서 자기 작품의 기반을 다진 첫 화가였다.

 

이런 점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만이 그와 비견될 수 있지만,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과물을 보여주는 방법 면에서는 뒤러가 훨씬 체계적이었다. 또한, 뒤러는 13살 때 처음으로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 3점의 작품을 남겨 자화상의 화가로 불리기도 했다. 렘브란트, 피카소와 함께 3대 판화가라 불리는 뒤러는 평생 100여점의 동판과 200여점의 목판화를 남겼고, 그의 그림에서도 느껴지듯이 완벽주의자였던 뒤러는 판을 제작한 뒤 찍는 종이의 선택과정은 물론 인쇄과정과 판매까지 관여를 했다.

 

헝가리에서 이주해온 금세공사의 아들로 아버지의 조수로 일하다 1486∼1489년 M.볼게무트에게 사사(師事)하였고, 목판기술을 익혔다. 1490∼1494년 콜마르 ·바젤 등지를 편력, 목판제작에 정진했다. 1495년 귀국하여 공방을 차리고 동판화를 시도했다. 이탈리아 여행 중에 그린 수채풍경화는 독일예술이 처음으로 도달한 순수풍경화라고 할 만하다.

 

1500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장의 역할을 담당해야 했던 뒤러는 부담 때문이었는지 점점 몸이 쇠약해졌다. 게다가 당시 유럽은 흑사병이 유행이었기 때문에 뒤러는 흑사병을 피해 몇 번의 여행을 해야만 했다. 덕분에 병은 더 깊어졌고, 우울증 또한 겹쳐 그의 그림들에선 우울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벨기에로 여행을 하던 50세의 뒤러는 고래가 해안에 떠밀려 왔다는 소문을 듣고 네덜란드의 해안가로 달려갔다. 하지만 고래는 뒤러가 도착하기 전에 다시 바다로 돌아갔고, 뒤러는 고래도 보지 못한 채 말라리아에 걸리게 되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뒤러는 마지막 작품을 그렸다. 그리스도의 제자 4명을 그린 <네사도>를 뉘른베르크 시에 기증하면서 그는 “나에 대한 기념물로 공공장소에 전시하고 이방인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한다” 는 말을 남겼다.

 

이 책에서는 명예를 얻은 금세공사의 아들, 뛰어난 성공, 황제와 역사 옆에서, 인문주의 종교개혁 도덕책임등으로 뒤러를 나누어서 잘 설명하고 있어 보기에도 아주 편하게 구성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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