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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평점 :
소주가 달~달~해지는 판타지 <더블>
더블앨범 자켓 같은 하나의 케이스 안에 든 두 권의 책, 박민규의 단편 소설집 <더블>.
책을 꺼내면 표지 속 마스크를 쓴 그의 옆모습이 보인다.
파리 눈을 확대한 듯한 고글 안경과 독특한 패션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박민규 작가, 그가 이번에는 마스크를 쓰고 나왔다.
자켓 디자인의 모티브는 멕시코 루 차 리브레의 전설 엘산토와 블루데몬이라 밝히지만,
두 전설을 모르는 나는 <반칙왕>이 먼저 떠오른다.
<반칙왕>의 임대호는 부지점장의 헤드락에 꼼짝 못하고 좋아하는 여자와 눈 한번 마주치는 것도 힘들어 한다.
그런데 타이거 마스크를 척~하니 쓰고 나면?
호랑이 힘이 솟아난 듯, 프로레슬러 반칙왕이 되어 링 위를 헤치고 다니고 어눌하게나마 여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기도 한다.
당하고만 사는 찌질한 현실의 임대호와 타이거 마스크를 쓴 반칙왕의 경계는 과연 무엇일까?
비루한 현실이 복면을 쓰면 판타지를 구현할 힘을 얻는 걸까?
5년 전 그의 첫 단편집 <카스테라>보다 더욱 처절한 현실의 바닥과 판타지의 천장을 휘젓고 다니는 두 번째 단편집 <더블>.
마술사 데이비드 카퍼필드가 만리장성을 뚫고 지나가듯
박민규 작가는 현실과 판타지 경계가 허물어진 18개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던져준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하지만 <끝까지 이럴래?>에서는 지구 멸망을 하루 앞두고도 층간 소음으로 심리전을
벌이는가 하면, <아스피린>에서는 서울 상공에 거대한 비행물체가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경쟁 피티를 위해 야근을 한다.
사과나무는 이상일 뿐, 저녁 끼니를 걱정하고
지끈거리는 두통을 해결하기 위해 진통제를 털어 넣는 것이 현실이라는 거다.
내일 지구의 끝이 오더라도 지금 당장 모기 물려 가려운 발바닥을 긁어대는 것이 가장 시급한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이 아니겠는가.
또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에서는 한때는 잘 나가던 카세일즈맨이었으나
이제는 신용불량자에 계약직, 거기에 발기부전으로 3년째 부부생활도 못하는 한 가장이 나온다.
그래도 아무 말 없이 꿋꿋하게 가정을 지키던 그의 아내.
그녀에게는 비밀병기(?)가 있었으니 바로 ‘딜도’다.
여성용 자위 기구가 기울어져 가는 한 가정의 지푸라기가 된 것이다.
또 알퐁스 도데의 <별>에서는 길을 잃고 헤매다 지친 천사같이 순수한 아가씨가 주인공의 어깨에 살포시 기댄다.
그러나 더블의 <별>에서는 여자에게 단물을 죄다 빨리고 감옥까지 다녀와
대리 운전을 하게 된 남자에게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여자가 어깨를 빌린다.
이렇듯 박민규 작가는 ‘신데렐라는 왕자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어요’라는 동화 속 이야기 대신
현실판 버전인 ‘알고 보니 왕자는 바람둥이에 호색한이라
궁궐에서는 내 논 자식인데다가,
신데렐라는 궁에서 왕따 당하며 여전히 바닥을 닦으면서 살아야 했다’는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이런 이런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걱정하지 마. 해결방법이 있어’라고 말하는 자기계발서는 우리에게 위로와 출구를 주는 사탕이라면,
그의 이야기는 참 쓰디 쓰다.
<루디>를 읽다보면
‘누가 너의 손에 든 사탕을 왼쪽 팔꿈치로 툭 쳐서 떨어뜨리는 거야.
그런데 사탕이 하필 쓰레기가 썩어가는 흙바닥에 떨어진 거지.
지나가던 행인이 그 위에 가래침을 ‘칵~ ’하고 뱉어서 툭 얹어놔.
그때 누군가 나타나 너의 왼쪽 옆통수에 리볼버를 들이대고
“그 사탕을 지금 당장 한입에 쓱싹하지 않으면 머리통에 시원한 바람구멍을 뚫어주지”라고 말하는 거,
그런 게 바로 현실이고 인생이란 말이지.’
라고 말하는 듯 하니 말이다.
그런데 <더블>의 모든 단편은 누군가에게 주는 선물로 씌여진 거란다.
‘선물? 이런 느낌이 선물이라는 거야?’ 살짝 반발심이 든다.
그때 문득, 한 소설이 생각났다.
20대 소녀와의 스캔들로 전직 유명토크쇼 진행자에서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인간이 된 남자,
록가수의 꿈이 박살나고 남은 인생을 피자배달을 하는 것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는 청년,
젊은 시절 단 한 번의 실수로 낳은 중증장애아에게 묶여 살고 있는 50대 여자,
언니가 행방불명되고 난 후 더 이상 살 이유를 찾지 못하는 십대 여자아이.
자살을 할 만큼의 필요충분조건을 가진 네 명이 아파트 옥상에서 우연히 만난다.
그런데 그들은 자살을 유보한 채 조금 더 살아본다.
닉혼비의 <딱 90일만 더 살아볼까?>의 내용이다.
누군가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위로를 받았다 하는데,
처음에는 그 위로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 말이지, 이런 위로가 아닐까?
‘아파트 난간에서 1초도 망설이지 않고 훌쩍 다이빙을 해도 시원찮을 주인공들도,
그래도 살잖아. 살려고 노력하잖아.
인생은 그런 거야.
흙구덩이에 가래침을 얹은 사탕도 빨아먹다보면 단물도 나오고 그런 거.
그리고 단물이 안 나오면 어때?
그래도 열심히 인생이라는 사탕을 빨아먹으며 막대기만 남을 그날까지 열심히 살잖아’
어쩌면 우리가 너무 힘들 땐,
‘희망을 가져,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니까 말이야’ 라는 말보다
‘세상은 인생은 원래 그런 거지. 그래도 인간은 살아가잖아.
힘들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말이지’ 라는 말이 더욱 와 닿을 때가 있다.
누군가가 소주가 달달해지면 인생을 알게 된 것이라 했던가.
인생이 얼마나 쓴지 제대로 맛보고 나면
혀와 목구멍까지 얼얼하게 쓰디쓴 소주가 달게 느껴진다는 말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양미간과 입 주변 근육들이 찌글찌글 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 쓴 맛이 ‘퉥’ 뱉어버리고 싶은 맛이 아니라,
입 안을 감도는 감칠맛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건 아마도 박민규 작가의 세상에 대한 인간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좋은 글이 이런 게 아닐까 한다.
“나 너무 힘들어”라는 울부짖음과 눈물과 콧물이 속도전을 벌이며 통곡하는 한 남자의 모습보다는
목구멍에 치밀어 오르는 뭔가를 두 눈을 꼭 감으며 삼키고 말없이 돌아선 뒷모습.
그 쓸쓸한 등이 몇 차례 움찔움찔 들썩거리다 ‘크흑~’하는 비어져 올라오는 울음을 애써 누르는 소리,
그러고도 무거운 걸음을 한발 한발 떼어가는 한 남자의 뒷모습.
‘나 슬퍼~’라고 대놓고 철퍼덕 펼쳐두는 것이 아니라
‘저 남자 정말 슬픈가봐’라고 독자로 하여금 느끼게 해주는 글.
좋은 글, 인상적인 글은 그런 게 아닐까 한다.
어쩌면 그는 이렇게 쓰디쓴 세상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좀 더 행복하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쓰디쓴 맛을 보여주며,
그래도 자신의 인생을 덜 쓰게 느끼길.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너무나 쓰더라도, 그것을 잘 받아들이길 바라면서 말이다.
<더블>을 읽으며 조금은 시니컬해졌지만, 좀 더 쿨하고 자유로워진 기분이다.
살아있는 병균으로 만든 백신을 접종하므로써
인생에 대한 면역력을 높였다고나 할까.
인생이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한탄하기 보다는
세상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그 에너지로 나의 인생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