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야
마광수 지음 / 어문학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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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죄의식 -- 마광수 소설집 "나는 너야"를 읽고 / 이지혜 




작가는 연세대학교의 국문학과 교수로, “야한 여자가 좋다”와 “가자! 장미여관” 등 성문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동시에 외설과 예술의 경계에서 명성과 지탄을 동시에 받아왔던 인물이다. 2015년도에 발간된 “나는 너야”는 마광수 교수의 따끈따끈한 신작으로, 서시를 포함해 단편, 중편소설 25 작품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서시가 서문을 대신하고 있는데, 이 서시에서 작가의 한과 자유로움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가슴 속에 엉긴 핏덩이를 소낙비로 씻어내고 싶다고 말한다. 붉고 꾸덕꾸덕하게 엉겨있는 죽은 핏덩어리 떠올리게 한다. 아마 그 핏덩이란 작가 본인의 문학관으로 인해 수십년간 핍박과 수난을 받으며 쌓인 한이라고 생각된다. 이 핏덩이를 씻어낼 수 있는 소나기란 “뒤섞여 흘러가는 물”은 곧 보편적인 패러다임을 따라 흘러가는 세상 사람들의 의견과 말 등이 아닐까 싶다. 작가는 그 흐름, 보편적으로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윤리적, 종교적 성애관에 순응하지 않고 성과 쾌락이라는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직접적으로 꼬집었기에 사회에서 지탄받았다. 그 보편적인 흐름에서 떨어져있기에 고독하고, 이미 떨어져 나왔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어 자유로울 수 있다고 “두려워하고 서러워하는” 내면을 위안한다. 그의 희망과 절망이 못생긴 까닭은 그것들이 미화되지 않고, 포장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제목 “나는 너야”는 작품들 전체에 걸쳐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나는 너야”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1인칭 시점으로 남자 주인공의 자신의 경험담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가 사랑하고 욕망하는 여성들에 대한 그의 심리와 상황에 대한 설명이 마치 경험담을 읽는 것처럼 담담하고도 유쾌하게 전달되고 있다. 특히 주인공의 사상이 마치 작가 본인의 그것과 유사하면서도 일관성이 있어서,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의 경계를 흐릿하게 한다. 본인을 모델로 소설을 설정하여 현실의 사실(real fact)와 소설적 허구(fiction)을 교묘하게 꼬매어 놓음으로서, 독자는 주인공 “나”와 마교수를 동일시하며 소설에 몰입하게 된다.
1인칭 시점과 “나는 너야”라는 제목은 곧 소설의 화자는 곧 작가 본인 이기도 하고, 또 소설의 독자이기도 함을 의미한다. 이는 곧 누구나 마음속에는 마광수가 있다. 즉 소설 속의 “나”의 심리와 욕구에 너도 사실은 공감하지 않느냐. 이제 그만 너도 솔직하게 내면의 목소리를 인정하라는 은근한 압박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것은 작가가 그의 문학세계에서 초반부터 현재까지 줄곧 주장해오던 바이기도 하다.

“나는 너야”의 주인공들은 우리가 현실과 문학세계에서 보아왔던 그 어떤 이들보다 솔직하고 직설적이다. 단순히 성적인 성향과 묘사에서 뿐 아니라, 이성에게 어떤 부분에서 매력을 느꼈는지, 언제가 서운했고 언제가 허무했으며 언제가 불안했는지, 자신의 기분과 충동에 대해서 마치 유리병처럼 투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화자는 자신의 감정을 윤리적으로 포장하려고 하지도, 변명하거나 합리화 하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게 고백할 뿐이다. 이러한 심리묘사와 내러티브를 통해 독자는 화자의 감정선을 생생하게 따라가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방어기제나 합리화가 담기지 않은 감정에는 판단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화자가 유부녀에게 욕정을 느낀다고 해서, 독자가 이를 윤리적으로 옳은지, 합리적인지 판단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은 그냥 그런 것이지, 맞거나 틀리거나, 혹은 착하거나 나쁘거나 한 것이 아니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가 왜 그렇게 느낄까”를 고민하기 시작하면 이는 곧 소설의 “심리주의 분석”의 시작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적극적인 비평이 아닌 감상의 단계에서는, 그저 화자에게 이입하여 스토리가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해하며 그의 감정선을 따라갈 뿐이다. 이렇게 감정고백을 통해 작가는 독자에게서 성에 대한 판단(judging)과 성에 대한 감정(feeling)을 분리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렇게 성에 대한 도덕적, 논리적 판단을 유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보다 솔직한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성담론에 대해서 우리 모두는 보수적인 (아마도 실제 의견보다 더 과장하여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는 대중문화 곳곳에서 코드화된 성적 욕망들을 소비하면서도, 막상 욕망 그 자체는 부정하도록 사회화 되어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는 아주 오래된 신화(myth)에서부터 학습되어온 전통이기도 하다. 작가가 또 다른 저작 “문학과 성”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동양의 음양관에서 양이 곧 남성과 삶을 뜻한다면, 성과 여성, 죽음은 음의 영역에 속한다. 서양에서도 이브가 사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에덴에서 추방당했듯, 여자는 유혹에 약한 죄의 근원이자 부도덕의 원천이었다. 음란한 여자와 쾌락추구, 그리고 타락은 항상 한 묶음으로서 분류되어왔고, 지탄과 경계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서양 철학의 근간이 되는 칸트의 합리주의에서 “이성이 감성보다 우월하다”는 명제가 성립했으며, 에릭 프롬은 “정신적인 사랑이 육체적, 감정적 사랑에 우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사회적 명제, “정신적인 가치가 욕구충족과 쾌락에 우월하다.”에 부응하라는 명령은 우리의 초자아(super ego)에 깊숙히 새겨져 있다.
작가의 오랜 지론은 소설의 재미는 감상과, 퇴폐로부터 나오며, 문학의 가치는 배설이라는 것이다. 문학의 가치가 오로지 배설이라는 명제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이 문학적 카타르시스의 과정은, 사실 섹스에서 오르가슴을 느끼는 과정과 비슷하고 생각한다.

1) 첫째, 과거의 경험에서 형성된 성격과 가치관에 기반한 개인적인 취향이 존재한다.
심리학의 유명한 논제인 유전이냐 환경이냐(Nature vs. nurture)의 논란은 논외로 치더라도, 문학적 취향이 개인의 가치관, 성격과 크게 맞닿아 있음은 부인의 여지가 없다. 사회문제의 심각성에 공감하고 참여지향적인 성격을 가진 독자는 리얼리즘 소설이나 문제의식을 담은 문학을 선호할 것이고, 인간의 내면에 관심이 높은 독자는 심리적 묘사가 탁월한 문학을 선호할 것이다. 이는 지적 탐구의 꼭지점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느냐와 같으며, 이러한 취향은 개인의 성격이 형성된 과정과 그 맥을 같이할 것이다.
성적 취향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한다. 가장 처음으로 경험한 강력한 성적인 기억이 이후의 성적 취향에 영향을 미친다. 남성 동성애자 중에서는 소년기에 남성에게 성적추행을 당했던 경험이 있는 비율이 높으며, 여성 동성애자중에서는 어린 시절 남성에게 폭력이나 추행, 혹은 버림받은 기억 등의 상처를 당한 일화가 많다. 또 마조히스트나 사디스트 등의 “변태성욕”을 취향으로 하는 경우에도 이와 관련된 심리적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둘째, 충분한 전희가 있을 때 최고조의 흥분을 느낄 수 있다.
대부분의 잘 짜여진 소설에는 기,승,전,결이 있다. climax로 오르는 과정에서 개연성 있는 스토리 뼈대를 바탕으로, 등장인물의 성격에 생생하게 묘사되었을 독자는 최고로 몰입하고 캐릭터에 공감하게 되고, 가장 큰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이는 climax로 유도하기 위한 작가의 섬세한 설계로 이루어진다.
섹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충분한 전희와 능숙한 애무에 의해서 흥분이 고조된다. 이는 곧 에로티시즘의 본질은 “발기”에 있다고 단언한 작가의 사상과도 그 맥락을 같이한다. 10계단 올라가면 1 미터 높이에 있을 뿐이지만, 30계단을 올라가면 3 미터 높이에 있을 수 있다.

3) 오르가슴과 카타르시스
카타르시스는 마치 묶은 찌꺼기가 내려가는 느낌과 같다. 이를 “배설”이라고 표현하며 관장도 “카타르시스”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런 메커니즘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비극의 효과로서 “카타르시스”를 강조한 이래 예술의 치료 효과로서 카타르시스가 논의되어왔다. 우울할 때 슬픈 영화를 보며 펑펑 울고 나면 기분이 한참 나아지는 것처럼 한껏 고조되었다가 해소되는 감정은 묵은 감정을 배출시키는 정서적 치유효과가 있다.
오르가슴이나 사정 또한 이와 비슷한 매커니즘이라고 생각한다. 오르가즘이나 사정을 통해 정체된 성욕을 배출시킴으로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보다 활기차고 말끔한 기분을 느낀다.

4) 정서적 교감이 없는 결론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작가의 문학을 읽었을 때, 어렴풋이 느끼던 기분, 감정을 아주 섬세하게 표현해 낸 것을 발견했을 때, 독자는 정신적인 희열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마치 정서적으로 “공명”하는 것과 같은 경험이며, 정서적 오르가슴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지적, 정서적 충만함은 독자가 작가와 충분히 소통하여 공명한다고 느낄 때 얻을 수 있다.
섹스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소위 “영혼 없는 섹스”는 자위행위와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신뢰에 기반한 애정이든, 쾌락을 추구하는 여정에 있어서의 동지애든, 파트너와의 정서적 교감, 소통으로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쾌락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충만한 만족감, 뿌듯함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본능"이라는 단어에 우리는 동물적인 감각, 성욕과 쾌락 수식어를 떠올린다. 그렇지만 영어권에서 본능은 전자를 뜻하는 instinct이거나 "human nature"이라 번역된다. “nature”란 본질이자 곧 자연스러움이다. 물론 물욕이 절도로 연결되어서는 안되며 분노가 살인으로 연결되어서는 안되듯, 성욕이 성범죄로 연결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욕구 그 자체에는 죄가 없다. 윤리적, 도덕적 담론을 벗어나, 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이를 다스리는 법 또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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