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자평] 반박하는 여자들

반박하는 여자들
대니엘 래저린 지음, 김지현 옮김 / 창비 / 2019년 9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박하는 여자들』,대니엘 래저린

“사실상 입장이랄 것도, 견해랄 것도 없어야 하는 사람. 자신에게 주어진 입장들과 견해들을 그저 수용해야 하는 사람. 텅 빈 농구 골대처럼 날아오는 공을 받기만 해야 하는 사람. 그런데 그 골대가 속으로 또 다른 공을 품고 있었다면, 그리고 그 공을 갑자기 선수를 향해 던져버린다면, 게임은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지게 된다.” - 옮긴이의 말

“정말로 그랬나? 물론 정말로 그랬다. 말이 별로 없는 편인 남자애는 주변에 그 얘기를 다 떠들고 다녀서 화요일엔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 그러나 너는 침묵을 선택한다. 네 남자 친구에게도, 그 개새끼에게도, 그 개새끼 여자 친구에게도. 그 여자애는 자기 남자 친구 말을 믿는다. 반박되지 않는 주장은 쉽사리 믿게 되니까.” - 「반박」

이 책의 원제는 ‘Back Talk’다. 의미상 가장 비슷한 한국 단어는 ‘말대꾸’일 것이라고 옮긴 분이 써두셨는데, 나는 어릴 때 ‘말대꾸하지 말아라’라는 말을 어른들에게서 많이 듣고 자랐다.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탓도 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왜?’라고 묻는 성격 탓이었다. 날 부르는 이유가 궁금해서 묻는 단순한 질문이었는데, 그때마다 집안 어른은 불같이 화를 내곤 하셨다. 아마 되묻지도 이유를 따지지도 않고 내가 따르길 바랐던 것이겠지.

「재희」, “나의 악마, 나의 구세주, 나의 재희.”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평소에 박상영 작가님의 소설 특징을 좋아했다. 누가 “박상영 세계관”이라 표현했던 것 같은데, 딱 맞는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본인 인생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등장인물, 퀴어적 인물, 사랑받고자 하는 인물들이 나오고 그들이 내뱉는 자멸적 유머는 우울한 상황에서도 독자가 웃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속수무책으로 공감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박작가님이 그리는 인물들의 특징이라고 생각해왔다.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 「햄릿 어떠세요」를 읽었기에, 작가님이 평소 여성 화자를 주인공으로 해 왔던 건 알았다. 그런데 「재희」처럼 퀴어 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동시에 나오는 소설은 처음이라 호기심 가득한 마음이 들었다. 두 주인공이 소설 내에서 어떤 조합을 만들어 낼까? 어떤 이야기를 할까? 결론적으로 봤을 때, 나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

진득한 연애를 해보지 못했다는 것 외에 ‘재희’와 주인공 ‘나’는 모든 것이 다르다. 그러나 그 공통점은 둘의 관계를 잇는 매개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매개를 통해 둘은 둘도 없는 친구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친구인 뿐만 아니라, 연대의 관계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재희는 나를 통해서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으로 좆같다는 것을 배웠고,

나는 재희를 통해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희가 의사에게서 들은 “생명의 소중함과 순결의 중요함”이라는 것, 그리고 주인공 ‘나’가 비뇨기과에서 남자 간호사들에게서 들은 혐오 발언은 여자와 게이로 사는 것이 참 좆같음을 보여준다. 이런 좆같은 세상에서 둘은 서로의 존재에 의지하며 살아간다. 재희는 ‘나’에게 얼린 블루베리를, 나는 재희에게 얼린 말보로 레드를 준비하고 서로가 만나는 남자에 대해 수다를 떨며 잠드는 것이다.

이성 간의 룸메이트라니, 사회에선 용인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재희는 ‘재호’, ‘나’는 ‘지은’이가 되어 성별을 숨긴 채 지냈는데, 재희의 남자친구가 그 ‘지은’이란 룸메이트에 대해 의문시하게 되면서 갈등이 생긴다.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말해야 했고, 주인공 ‘나’는 재희가 남자친구에게 본인과의 관계에 대해 말한 것에 실망하게 된다.

“재희와 내가 공유하고 있던 것들이, 둘만의 이야기들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게 싫었다.

우리 둘의 관계는 전적으로 우리 둘만의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언제까지라도.

- 연락 안 해도 돼.

나는 가방을 싸서 곧장 잠실의 본가로 들어갔다.

내가 왜 그토록 격렬한 반응을 보였는지 나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채로.”

재희는 사실을 말했고, 딱히 정체성을 숨기려 않는 ‘나’이기에 본인마저 이 타이밍에 화를 내는 것이 웃기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왜 그토록 화를 내는지도 모르지만, 그가 느낀 감정은 일종의 배신감이었다. 둘의 관계를 타인이 알게 되었다는 데에 크게 실망한 것이다.

본가에 있는 동안 작가가 된 주인공은 수상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재희에게 연락을 했고, 그렇게 다시 가까워진 둘이었는데 둘의 관계는 이전 같지 않다. 재희는 더는 얼린 담배가 필요하지 않았으며, 재희는 자신과 남자친구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런 재희가 결혼한다.

주인공은 결혼식에서 축가로 핑클 노래를 부르며 그들의 결혼을 축하해준다. 집에 돌아온 주인공은 잠시 만났고, 교통사고로 죽었던 K3가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를 읽는다.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면 난 한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

마지막으로 냉장고를 열어 블루베리를 꺼내던 주인공은, 보라색 얼음이 떨어질 때 재희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그때, 영원할 줄 알았던 재희와 나의 시절이 영영 끝나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아름다움이라고 명명되는 시절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준 재희는, 이제 이곳에 없다.”

-

나는 주인공의 감정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면 난 한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라는 이 K3의 말을 두 번씩이나 나온 이유는 K3의 사랑과 주인공 ‘나’의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또한 주인공이 “나의 악마, 나의 구세주, 나의 재희”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부분에서 ‘나의’라는 수식어는 그의 집착을 드러낸다. 주인공이 이유 모를 배신감을 느꼈던 것도, 재희의 빈 자리를 생각하는 것도 집착인데, 이런 것들에 있어서 재희에 대한 주인공의 사랑을 볼 수 있다.

-

<소설보다: 가을 2018>에서 읽었던 「재희」였는데, 박상영 작가님의 새 소설집 출간으로 사전서평단에 뽑혀 서평을 제출할 기회가 있을 줄은 몰랐다. 이미 읽었던 「재희」이지만, 역시나 또 읽어도 재밌단 생각이 드는 소설이었다. 평소 좋아하는 작가님이라 더 좋은 서평을 내고 싶은 것이 욕심인데, 아직 내 능력으론 이 정도밖에 못 써드려 아쉽단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