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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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페이지 가량의 두꺼운 로맨스 소설+철학서(?)이다. 너무나 유명하지만 처음 읽어보는 작가이며, 얇지 않지만 그의 글은 새벽 내내 집중하여 완독할 정도였다. (원서를 번역한 역자의 솜씨도 더해졌겠지만,) 원서를 읽어보고 싶을 만큼, 확실히 드 보통은 내게 궁금한 작가가 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최초의 꿈틀거림은 필연적으로 무지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_p.26 이상화

 

소설의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서술자인 는 연인 클로이와의 사랑을 대상으로 둔 총 스물네 가지 주제(낭만적 운명론, 이상화, 정신과 육체, 사랑과 자유주의, 회의주의와 신앙 등)에 고찰한다. 로맨스 소설이라 달콤한 이야기만 적힌 줄 알았더니, 주인공은 오히려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사랑을 뜯어봤다. 터무니없는 낙관과 답 없는 회의 사이의 균형을 지키려 애쓰면서 말이다.

 

너는 내가 잃어버릴 수도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린 나를 사랑하는가? 내가 영원히 가지고 있을 것들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가? _p.192 수축

 

그 생각을 하면 외로워졌다. 하나의 단어에서도, 언어에 현학적인 사람들 앞에서 펼치는 주장이 아니라 연인들이 서로를 이해시키려는 연인들에게 간절히 중요한 하나의 단어에서도 오류가 발견될 수 있다는 생각. _p.109 사랑을 말하기

 

그러나 주인공도 인간이라 이성을 지키고 싶지만, 비합리적으로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운명을 믿었고, 마르크스주의에 빠져 상대의 사랑을 의심했고, 자신과 다른 점을 사랑하다가도 부딪힘에 오는 불협화음을 견딜 수 없어 하기도 했다. 클로이와 헤어지고 나서 그의 비합리성은 극단에 치달았다. 나는 이 남자가 경험한 사랑의 시작과 끝을 읽으면서, 멍청하다고 여기기도 했으며, 속수무책으로 공감하기도 했다.

 

한편에는 여자를 천사와 동일시하는 남자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사랑을 병과 거의 동일시하는 천사가 있었다. _p.200 수축

 

나는 책의 제목을 비틀어 왜 인간은 인간을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명확한 해답을 기대했으나, ‘인간이니까라는 가벼우면서도, 우주를 담은 특이점 같은 대답만이 돌아왔다. 그러나 연인 관계에 고민이 있을 때마다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바보같이 미련한 주인공을 보면서, 나와 타인의 관계를 제삼자의 눈에서 바라볼 기회가 아닐까. 더운 여름밤 시원한 맥주를 옆에 두고 읽기에 좋은 책이었다. 뜨겁고도 단숨에 차게 식어버리는 로맨스라 그런가. 오래간만에 재밌게 읽은 소설책이었다.

 

증오는 사랑이라는 편지 안에 감추어진 글자들이며, 하나의 기초 위에 그 대립물과 함께 서 있다. 마치 사랑의 끝은 그 시작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사랑의 붕괴의 요소들은 그 창조의 요소들 안에서 이미 괴괴하게 전조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_196 수축

 

가르시아 로르카의 연극에서 누군가 하늘이 흐리고 어둡고 잿빛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순수한 기상학적 관찰이 아니라 심리적 상태의 상징이다. 인생은 우리에게 그런 손쉬운 표지들을 제공하지 않는다. _p.254-255 생략

 

#왜나는너를사랑하는가 #알랭드보통 #청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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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만든 공간 -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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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만든 공간』, 유현준

지금이 진화의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하는 순간 창조적 변화는 멈추게 된다. _p.397 「닫는 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요즘 예술과 과학의 교양서적을 찾아 읽는데 재미가 들렸다. 건축은 예술과 과학의 융·복합적 산물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리고 유현준 교수의 강연 영상을 보고 과제를 작성해낸 적이 있어서 더욱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반가워했다. 마침 을유문화사에서 서평단을 모집하길래 재빠르게 신청했고, 운이 좋게 책을 받을 수 있었다.

400페이지의 두꺼운 책이다. 앞의 100페이지는 문명 발전의 역사를 기술했다. 역사를 미리 일러준 것은, 뒤에 있을 300페이지의 수많은 혁신을 뒤받칠 단단한 기반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어려울 것이라고 걱정은 마시길. 오히려 이미지와 풀어 쓴 설명으로 아주 친절한 책이었다. 뒤의 300페이지는 한자리에 앉아 금방 읽어버릴 정도로 재미있었다. 재미있는 건축 교양 수업을 수강한 기분이었다. 평소에 잘 접하지 못하는 건축물이나 평면도를 감상할 수 있는 점도 또 다른 소소한 재미 요소였다.

지구의 자연환경에 영향을 받은 동서양의 각기 다른 건축 문화, 기술의 발전으로 지구의 공간의 압축을 통한 융합, 국제주의의 한계를 저항하며 나온 다른 학문 간의 융합, IT 기술과 아날로그의 융합. 저자는 이러한 순서대로 건축 양식의 발전에 관해 설명한다. 설명하기 어려울 수 있을 텐데, 저자는 동서양의 건축 양식을 장기 게임인 체스와 바둑, 곤충인 벌과 개미를 통해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했다. 체스와 벌이 서양이라면, 바둑과 개미는 동양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공중에 있어 주위 자연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벌은 육각형 모양의 기하학적인 집을 지을 수 있다. 반대로 땅이란 자연을 고려해야 하는 개미는 외부의 형태보다는 공간 내부의 연결망을 더 중요시한다. 수학적 논리를 기반한 서양 건축과 외부와의 관계를 기반한 동양 건축의 특성을 봤을 때, 정말 탁월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벽 중심의 서양 건축과 기둥 중심의 동양 건축은 서로 영향을 주며 발전해왔다. 특히 유럽 내 중국 도자기의 열풍이 그 시작이라고 봐도 좋다. 도자기에 그려진 동양 건축의 영향을 받아 영국에선 중국의 정원을 따라 하고 마당에 ‘파고라’를 지어 거기서 차를 마셨다고 한다. 동양 문화의 수용으로 “직선에서 곡선으로” 서양의 건축은 바뀌어 갔다. 저자는 당시 유럽인의 충격이 DDP를 처음 본 한국인들의 충격과 비슷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DDP가 처음 공개됐을 때, 언론 매체로 접했던 당시의 충격이 아직도 선명하다. 당시 유럽인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 듯하다.

근대 건축의 4대 거장 중, 독일의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와 스위스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에 대해서도 새로이 알게 되었다. 그들은 기둥 중심의 동양 건축 양식을 신 기술과 융합하길 시도했다. 그들의 시기별 건축을 확인하면서, 이름난 거장들도 처음부터 완벽한 융합을 만들진 못했음을 깨달았다. 걸작은 최초의 변화 시도가 있었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덧붙여 일본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특히 그의 건축물 ‘물의 교회’는 1인칭의 시점으로 영화를 보는 듯, 건축물 내부를 볼 수 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의 감동을 위해서 보통 두 시간 정도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주요 장면 이전에 이야기의 전개가 중요한데, 그것을 가장 잘하는 공간 이야기꾼이 안도 다다오다. _p.311 「물의 교회: 시간으로 공간을 만드는 힘」

#공간이만든공간 #유현준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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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틀랜드 -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뼈 빠지게 일하고 쫄딱 망하는 삶에 관하여
세라 스마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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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하고 처음 받았던 과제는 사랑이 부담스러울 때를 주제로 에세이를 쓰는 것이었다. 과제 제출 날, 교수님께서는 갑자기 몇 명을 골라 발표를 시키셨다. 나는 절대 내 이름이 불리지 않았으면 했다. 어릴 적 부모님의 맞벌이로, 나와 동생이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던 기억에 관하여 썼기 때문이다. 이젠 부모님을 이해하지만, 외로운 기억이 속상한 건 여전하다. 그래서 내 과거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다행히 다른 학우가 지명됐고, 발표는 피할 수 있었다.

 

하틀랜드를 쓴 세라 스마시가 대단하다고 느껴진 건, 가난과 수치심의 기록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는 데 있다. 나와 달리 세라는 적나라하게 문제를 드러내고 근원까지도 고민했다. 그녀가 이 책을 쓰기 위해, 공공 기록과 신문, 편지, 사진의 기록을 맞추어 봤다고 한다. 그리고 가족들의 일화를 알아내기 위해 오랜 시간에 걸쳐 면담을 해왔다고 한다. 그녀가 이 책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이고,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렸을까. 말하기엔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가난과 수치심에 대한 것은 더욱 그러하다.

 

이야기는 오거스트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한다. ‘위엄있는’, ‘존경받는이라는 뜻을 가진 오거스트(August). 오거스트는 세라의 상상의 딸이면서, 동시에 마음을 굳건히 지켜주는 나침반이었다. 캔자스의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난 그녀가 범죄의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은 것은, 그녀의 고군분투 덕이라고 생각한다. 노력하지 않으면 범죄자가 되는 것이 캔자스 하층민의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이 능력만 있으면 부를 창출할 수 있다고 믿는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은 스스로를 나쁜 사람으로 여기기 쉽지. 내 삶 최대의 행운이라면 내가 그게 옳지 않음을 알았다는 거야. _p.406 나의 출신지

 

내용 중에 차가 고장 났으나 돈이 없어서 수리하지 못해서 경찰을 피해 다니는 장면이 있었다. 경찰에게서 매겨진 벌금을 내지 못하면 감옥으로 가야 한다는 현실이 고달프다고 생각했다. 그런 범죄 기록이 생기면 직장에서 일할 수 없고, 기록을 없애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시작과 끝에는 항상 돈이 있었다.

 

나는 이 작은 여자아이가 보여주는 성공에 대한 야망에 소름이 돋기도 했다. 그녀 안에 울린 화재경보기”(p.237)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경제적 대물림을 끊어내려는 시도였다. 대물림을 끊어내고, 고통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다짐은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결심에서도 드러난다. 그녀는 대학교수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생략했다. 그저 힘들고 고통스러웠다고만 언급할 뿐이다. 서빙 알바를 하면서도 집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을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구상만 하고 실제로 탄생시키지 못한 최상의 것들이 너무나 많아. 너라는 아이처럼. 네 영혼이 어딘가에 만들고자 하는 나라처럼. 추수기 달 아래에서 농번기라 노곤하지만 맑은 눈으로 기대를 가득 품고 있는 한여름의 나라를 꿈꾸어본다. _p.414 나의 출신지

 

사실 문제는 우리의 현재가 아니라 엄마의 과거에 있었달까. 엄마는 안정감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수도 없이 거처를 옮기고 가난에 시달렸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베티는 지니를 데리고 60번도 넘게 이사를 했었다. _p.304 지붕이 새는 집

 

읽으면서 나와 세라, 우리 엄마와 지니를 겹쳐 보기도 했다. 야망을 품었으나 이루지 못한 지니의 처지가 우리 엄마를 연상하게 했다. 경영학과로 대학에 가고 싶었다는 엄마의 말이 떠오르면서, 내 대학 생활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난 엄마가 갖지 못한 것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세라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으리라고 확신한다. 세라 스마시는 이 책을 엄마 지니에게 헌정했기 때문이다. 나도 언젠가 엄마에게 멋진 무언가를 헌정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틀랜드 #세라스마시 #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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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착각 - 허수경 유고 산문
허수경 지음 / 난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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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착각』, 허수경

故 허수경 시인의 유고 산문집. 책의 제목이 ‘오늘의 착각’인 만큼, 착각에 대한 산문들이 실려있다.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은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비록 백 장이 조금 넘는 가벼운 산문집이었지만, 읽는 동안 잠시 그녀의 시간을 함께 살았다. 시인의 문명 비판적인 산문은 읽는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내가 모른 체하던 것들의 부스러기 덩어리를 목격한 것 같았다. 알면서도 모른 체했던 카르마가 따라오는 것일 테다.

태양이 봄빛을 보낼 때쯤 내가 살았던 바다 가까이로 거대한 떼를 지어 떠도는 멸치빛이 나는 좋았다. 집단으로 헤엄치던 것들이 커다란 어망에 걸려 은빛으로 파닥이며 지상으로 올 때 나는 어부의 기쁨에다가 내 마음을 기대야 하는지 아니면 저렇게 파닥거리며 하늘을 날아올라갈 기세인 멸치들이 바닥에 너부러지면서 썩어가는 걸 애도해야 할지 몰랐다. _p.14 「물고기 모빌, 혹은 화어花魚」

가까운 과거에 기쁨엔 기쁨만이 남을 수 없단 것을 깨달은 나는 잠시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앞으로의 세상살이가 무섭게 느껴져 깨달음이 반갑지도 않았다. 아는 게 힘이었던 과거와 다르게, 지금의 세상은 모르는 게 힘이고 권력이다. 고통을 모르는 것이 진짜 힘이고 권력이다. 좋은 것을 보며 마냥 좋아하지 않는 시선을 가진, 비슷한 온도의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앎에 대한 의지는 태양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인간의 몫이다. _p.52「미스터 크로우와 오디세이의 착각」

거대한 세계의 불합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않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앎에 대한 의지는 세계의 몫이 아니다”, “앎에 대한 의지는 신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인간의 몫이다”라고 적어보기도 했다. 미스터 크로우는 태양과 싸우는 인간이다. 강렬한 열에너지를 뿜어내는 별과 싸우다니 미친 소리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여기엔 반전이 있다.

사실 미스터 크로우가 싸우고 있는 것은 태양을 중심으로 세워진 일상이다. 태양이 있는 시간을 태양 너머의 시간으로 바꾸고 싶은 열망. 시에 나오는 대로 “태양빛에 가려져 있던/죽음과 재생의 필름들 속에서/돌멩이 하나의 기원이/우주의 모든 페이지를 펄럭거리게 할 수도 있”게 하고 싶은 것이다. _p.55 「미스터 크로우와 오디세이의 착각」

미스터 크로우의 고독한 싸움은 “존재하려고 하는 싸움의 기록”이다. 누군가 그의 검무를 보고 태양을 이길 수 있단 착각에 사로잡혔다고 비웃을 수도 있으나, 나는 역전을 꿈꾸는 자를 보고 도무지 웃을 수가 없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언제가 그랬기에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가정이 가져온 착각”이 더 어리석게 느껴진다. 침묵을 노래라고 생각한 오디세이의 착각처럼 말이다.

착각을 사랑하는 건 인간의 일이며, 인간은 착각으로 살아간다. 내일이 더 불행할 거라는 착각, 혹은 내일이 더 나을 거라는 착각, 혹은 우리가 같을 수 있다는 착각과 같은 것들을 한다. 시인은 날카롭고 이성적이지만, 그녀도 착각에 단숨에 빠져버리는 인간이었다. 그녀 안에서 일어나는 관념 간의 싸움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 가장 편해야 할 침실까지 착각의 싸움터로 만든다. 지나버린 폐허 도시의 기억마저도 침실로 끌고 온다. 독일에서 고고학을 공부한 그녀가 경험하고 고민하며 마주한 그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유한성을 생각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그리고 영원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막연함을 느낀 시인이었다.

이곳에 있는데 이곳에 없다는 느낌.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잃어버린 것도 아닌데 하나씩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 섬뜩한 것은 이것이 착각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는 데 있다._p.28 「김행숙과 하이네의 착각, 혹은 다람쥐의 착각」

나는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했다. 물질이든 생명이든 유한한 주기를 살다가 사라져갈 때 그들의 영혼은 어디인가에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_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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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마저 너무 멋졌다. 시험을 앞두고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도 시간내어 틈틈이 읽었다. 두꺼운 책은 아니기에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아까웠다. 내게는 분에 넘치는 책이고, 산문이고, 시간이었다. 언급한 내용 말고도 좋은 산문이 많았는데, 하게 될 말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글을 줄였다. 책장에 소중히 꽂아두고, 착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쯤 또다시 읽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의착각 #허수경 #허수경시인 #난다 #난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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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홀로 집을 짓기 시작했을 때
김진송 지음 / 난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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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홀로 집을 짓기 시작했을 때, 김진송

 

나비를 죽인 적이 있다. 날개 대부분이 찢어졌으니 죽었다고 봐도 되겠지. 기억도 안 나는 어릴 적 저질러버린 일이었다. 노랑나비를 잡아다 우유갑으로 만든 집에 넣었다. 예쁜 나비는 순간에 형편없게 되었다. 제대로 말리지도 않은 우유갑 안에서 날개는 젖고 몸엔 힘이 빠졌다. 나비에게 집이라니, 전형적인 인간 중심적 사고였다. 만약 나비가 살 환경이 갖춰졌다고 해도 그것이 자유는 아닐 것이다. 인간과 나비는 다르다. 다소 충격적이었기에 가슴이 뛰었다. 그제야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깨달았다. 의도치 않게 다른 존재를 불구로 만들어버렸다.

 

이 책에 담긴 단편들은 다양한 타자와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내 어릴 적 나비에 대한 기억처럼 와 타자의 경계를 생각하게 했다. 동물 심지어는 무생물과의 관계도 그려졌다. 종이 아이와 어린 왕자 오토마타 인형의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분명 흔하지 않은 타자의 모습일 것이다. 작가는 누가 타자이고 아닌지에 대한 경계를 많이 고민한 것 같다.

 

물리적인 세계에서 마음대로는 경우의 수로 실현된다. 선택 가능한 경우의 수를 무한대로 늘리는 것. ‘무한한 자유의 기계적 의미는 그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20개의 교차로를 만든다면 경우의 수는 무려 1,099,511,627,776. 그러니까 1조가 넘는다. 죽을 때까지 끝을 볼 수 없는 경우의 수는 무한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어린 왕자, 너는 자유로운 것 아닌가? 어린 왕자는 더이상 말이 없었다. _p. 183 어린 왕자의 귀향

 

각 단편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고요하다. 그러나 전개가 빠르게 느껴져서 지루하지는 않았다. 350페이지가 넘어서 얇다고 할 수 없는 책이지만 흠뻑 빠져 읽을 수 있었다. 깊은 몰입감을 경험케 했다.

 

전개가 빠르게 느껴진 이유는 소설 속 사건들 때문일 것이다. 하나같이 황당하고도 어처구니없었다. 모든 짝이 사라지고, 종이와 달팽이를 사랑해 결국 새끼까지 생기는 일이 일어나고, 잠든 사람들이 철탑에 올라가는 사건이 발생하고,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고, 인형 스스로가 본인의 세계를 고쳐버린다. 그러나 소란스럽지 않으며, 결말은 당연하고 별것 없다. 그래서 꿈의 장면을 보는 듯했다. 정신없이 흘러가다 밍숭맹숭한 끝을 맞이하는 꿈과 같았다. 그래서 더 심오하고 흥미로웠다. 결말의 그다음을 생각하게끔 하는 소설들이었다.

 

그게 다였다.”_p.350, 서울 사람들이 죄다 미쳐버렸다는 소문이……」

 

다 읽고 나서 본 책의 표지는 다르게 느껴졌다. 처음엔 어두운 공간과 계단만을 봤지만, 이젠 문밖의 세계가 보인다. 뒤집혔지만 현실과 같은 세계말이다. 이것은 꿈의 세계가 아닐까? 작가는 무의식의 세계를 글로 표현한 것일까? 무의식의 세계라서, 솔직한 꿈의 세계라서 한껏 나약한 인간의 본성도 드러난다. 혼자가 되고 싶지만, 그러기엔 깊은 외로움을 느끼는 인물이 많이 나왔다. 나도 비슷하게 생각한 적이 있기에 소설 속 인물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그는 완전히 독립된 존재로서 세상을 살아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히 혼자여야 했다. 숲에 들어와 집을 짓고 살기로 작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혼자라는 건 용기인 동시에 외로움이자 두려움이었다. _p.44~45

 

난다에서 오래간만에 나온 소설 신간이다. 그동안 난다의 여느 책과 다른 분위기를 가졌다. 띠지에 적힌 몹시도 특별한 소설이라는 문구가 공감됐다. 난 신비하다는 수식도 덧붙여주고 싶다. 작가가 사용하는 만연체도 너무 맘에 들었다. 나열과 반복이 심하면 자칫 지루할 수 있는데, 오히려 즐겁게 읽을 요소가 되었다. 신비하고 특별한 소설을 읽고 싶다면 추천하고 싶다.

 

#그가홀로집을짓기시작했을때 #김진송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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