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아주 고요하고 어두운 오후다. 이런 오후는 언제나 낯설다. 
어디라도 될 수 있지만 어디도 될 수 없는 곳이다. 
세탁기에는 빨래가 돌아가고 고양이는 이불빨래를 걸쳐 놓은 식탁의자 위에 올라가 잠을 자고 있다. 
나는 따뜻한 녹차 한 잔을 끓여와 거실 탁자에 앉아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이야기들을 다시 떠올려보고 있는 중이다.
일본 서점 직원들이 선정하는, 서점대상이란 게 있다. 
이 상은 기존의 문학상이 독자를 책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진단에서 생겨난 상으로, 독자들과 직접 만나는 서점 직원들이 주는 상이라고 한다. 
나는 제 2회 서점대상을 수상한 <밤의 피크닉>이란 책의 광고를 보고 온다 리쿠를 알게 되었다.
아침 8시에 학교를 출발해 다음 날 아침 8시에 학교로 돌아오는 행사, 고교시절 마지막 보행제,
자신의 고민을 성숙하게 이겨내는 소년 소녀들, 학창시절의 추억만들기. 라는 시시하기 짝이 없는 광고 문구들로 인해 나는 이 소설이 언제 어디에나 있는 성장소설, 청춘 소설이라고 생각했고, 온다 리쿠는 요시다 슈이치와 늘 헷갈렸다. 
그래서인지 나는 전혀 아무런 정보도 없는 주제에 온다 리쿠를 남자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그런 내가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읽게 된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바로 이 이야기가 어떤 책을 찾고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왠지 모르게 무언가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를 몹시도 좋아한다.
폴 오스터의 <환상의 책>이 그랬고 마스터즈 오브 호러 시리즈의 에피소드8<담배 자국>이 그랬다.
어쨌거나 책을 읽은 후 나는 온다리쿠에 대한 나의 많은 선입견들을 수정해야만 했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미스터리적인 요소 때문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판타지 적인 요소라고 해야 하나, 온다 리쿠는 자신의 작품세계 안에 말 그대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놓은 듯하다. 
나는 판타지따윈 질색인 사람인데 해리포터니 반지의 제왕이니 같은 영화도 하나도 보지 않았다. 
그런데 <삼월은 붉은 구렁을>에서 느껴지는 판타지라는 것은 미묘하게 겹쳐진 세계이다. 
 완전히 딱 들어맞지 않고 약간 벌어진 상태로 겹쳐져 있는 두 개의 도형을 떠올려 보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는 또 하나의 겹쳐지는 원이 있다. 나는 종종 그런 것을 느끼곤 하는데 낯설음이라고 말하면 이해되지 않을까 생각중이지만 낯설음이라는 말로 온전히 그 느낌을 전달할 수 없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여기 이곳에 있지만 어쩔때 나는 이곳에 있지 않다.
온다 리쿠가 만들어낸 이야기들의 세계가 그렇다. 나는 그런 점에서 온다 리쿠의 이야기들을 굉장하다고 생각한다.
아, 온다 리쿠의 이야기를 읽으며 조금은 미스터리한 경험을 했다.
<흑과 다의 환상>을 읽고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부분이었다.
˝세쓰코가 화장하는 데에 의외로 시간이 걸려서 놀랐다. 화장은 여자마다 각기 미묘한 주의가 드러나기 때문에 재미있다. 
화장법이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그것이 생활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다 다르다.˝
그런데 때마침 거실에서 티비를 켰는데 홈쇼핑에서 화장품을 팔고 있었고 쇼호스트가 외쳤다.
˝요즘 화장법은 이렇게 투명 메이크업이죠˝
쓰고 보니 그다지 미스터리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지만 하루키의 우연한 여행자가 떠올라서 피식 웃어버렸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이야기중에 단 하나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건 <회전목마>이다. 
그것을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잘 모르겠는데 좀 뜬금없는 美를 추구하는 일본만화스럽다고 해야 하나, 그런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미모의 여고생, 학원제국, 남자로 길러진 여자아이, 그 여자아이를 남자인 상태로 좋아하게 된 소년. 
뭐 이런 것들 말이다. 휴.
<회전목마>는 사실 스티븐 킹의 <캐리>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흑과 다의 환상>을 읽고 있는데 <회전목마>의 이야기가 또 사용되고 있기에 실망했다.
그렇지만 그런 점이 바로 온다 리쿠의 세계를 진짜 존재하고 있는 세계로 만들어버리는 힘이다.
미묘하게 맞지 않는 도형의 안쪽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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