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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 ㅣ 걷는사람 시인선 20
이소연 지음 / 걷는사람 / 2020년 2월
평점 :
'죄/죄악/재앙의 이미지는 "지옥"이라는 단어로 압축되어 드러난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의 시집 해설에서 발췌)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에서는 작가가 무언가에 대해 말을 하고 있으며 시의 어조 또한 누군가에게 말을 해주는 듯한 어조로 시가 쓰여 있다. 작가는 우리에게 "지옥" 이라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지옥" 안에 압축된 여러 죄/죄악/재앙 등은 우리를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중「솔직한 돼지」와 「수족관에 돌고래나 흰고래가 있다 그러면」이 그렇다. 「솔직한 돼지」에서 '이제는 아무도 감추는 일을 교양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요.'.'당신은 입만 살아서 좋은 말은 다 하려고 하네요.'라는 구절을 보면 시적 화자가 '당신'에게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 '당신'은 인간임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이제는 감추지 않고 말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서 1부의 마지막 시 「우유를 마시며」 에서는 시적 화자가 무언가를 말하며 시가 끝난다. 그 뒤로 말하기를 노력하고 있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솔직한 돼지」에서 시적 화자는 직설적이면서도 노골적으로 우리에게 '말함'에 대한 죄악을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마지막 행 '당신은 입만 살아서 좋은 말은 다 하려고 하네요.' 이 강하게 꽂혔다. 「수족관에 돌고래나 흰고래가 있다 그러면」에서 돌고래와 흰고래는 절망이라는 사각형, 즉 그들을 가둬놓고 있는 수조 그 자체가 절망이라는 것이다. 아이는 고래가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수조 속 고래를 바라보고 있다. 수조 속에 고래가 있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처럼. 그들의 자유를 갈기갈기 찢을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가? 에 대해 직설적으로 묻는 것 같은 문장들이 특히 좋았다.
「밑」에서는 시집의 제목인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라는 문장으로 시가 시작된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이 문장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며 여기서 소녀는 누구인가? 시집을 모두 읽고 나서도 선뜻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흔히 하늘로 되돌아간다, 올라간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가 죽은 뒤에 묻히는 곳, 혹은 뿌려지는 곳은 땅이나 물 속 그 아래 '밑'이다. 사람이 죽고 하늘로 돌아간다는 말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돼 영혼이 하늘로 간다는 뜻이기도 한데, 이는 확인되지 않은 가설일 뿐이며 육체를 남긴 채 영혼만이 하늘로 올라간다면 죽은 자는 어디에 머무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국 우리는 '위'가 아닌 '밑'에 있다는 뜻으로 읽혔다. '없지도 있지도 않은 세상이, 밑에 있다.'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없지도 있지도 않은 세상'이란 무엇일까? 삶과 죽음 사이의 틈에서 소녀는 '나로 살기 위해' 물 아래로 가라앉는다. 이 행동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나는 왜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한지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준 시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