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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다를 닮아서 ㅣ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반수연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평점 :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 책을 집어들었던 것은 제목이 예뻐서였다. '나는 바다를 닮아서' 푸른색의 표지와 잘 어울리는 글귀가 '과연 소설가는 다르구나'라는 감탄을 자아냈다.
그러나 책 소개를 뒤늦게 읽고 '아, 이 작가도 책도 나하고는 별로 맞지 않겠구나'라고 후회했다. '이민자들의 삶에 대해 쓰며'.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내 삶은 이민이라는 것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대한민국 서울에서 태어났고 대한민국 서울에 모든 가족이 다 있고 대한민국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고 대한민국 서울에서 직장을 잡았다. 대한민국 서울을 떠난 기간은 가장 길었을 때도 1년을 넘지 않았다. 아마 내 삶도 대한민국 서울에서 마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내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이민'이라는 소재는 아무리 맛들어지게 조리했다하더라도 내 입맛에 맞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런데 너무나 의외로 책은 술술 읽혔다. 뱃사람들로 가득찬 시장통 이야기, 벤쿠버에서 말아먹은 식당 이야기, 손가락이 잘린 남편 이야기,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 이야기. 술술 읽힌 다른 이야기들과 달리 쉽게 잊혀지지도 않았다. 통 크고 대책없는 아버지, 시장통의 은밀한 계급도, 고향 사람들 마음 속에서 규정지어진 '나'가 너무 싫어 다른 세계로 탈출하고 싶었다는 고백, 조금씩 멀어지는 형제들, 미 서부 해안을 따라 달리며 필사적으로 리셋시켰던 마음.
여성, 소설가, 이민, 엄마. 작가의 삶과 정체성은 나하고는 너무나 다르다. 나로서는 공감이 쉽지 않고 앞으로도 공감할 것 같지 않은 소재들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 작가가 담담히 털어놓는 회고가 이렇게 쉽게 읽히고 잘 잊혀지지 않게 되었을까.
작가의 글솜씨가 진솔하고, 담담하고, 친숙하면서도 유려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뒤늦게 깨달았다. 작가의 글이 이렇게 깊이 다가올 수 있었던 건 내 삶이, 아니, 우리의 삶이 '이민'과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작가의 이민은 단순히 통영에서 벤쿠버로의 이동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촌의 막내딸, 식당 주인, 목수의 아내, 자식들을 길러내야 하는 어머니, 부모를 보내야 하는 자식으로 삶의 지표 사이사이를 옮겨다녀야 했다.
나도, 우리도 마찬가지다. 학생, 직장인, 자식, 친척, 부모로 낯선 삶 사이 사이로 옮겨다녀야 하는 '이민'이고 낯선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군생이다. 내 생각과 다르게 '이민'은 내 삶에서 먼 소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글은 바로 그 삶의 이민 속에서 털어놓는 담담한 술회였기에 나에게 이렇게 깊은 흡입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렇지 않을까.
작가는 이민과 정착 사이에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작고 익숙한 것들을 붙들었다. 이 곳이 나를 거부하면 어떡할까, 적응하지 못하는 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이 인류 보편적인 불안감에 작가는 소설, 식당, 남편, 자식 같이 삶의 작은 파편을 붙잡으며 '익숙해져' 갔다.
나는 삶의 단상들을 돌아다니며 항상 거창한 것을 붙들려고 했다. '성적' '사교' '스펙' '경력'. 모두에게 인정받는 어마어마한 것을 닻으로 삼아 버텨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작가의 글을 보고나니 어쩌면 내 삶의 이민들 속에서 나를 지탱해주었던 것은 그보다 훨씬 사소한, 재미있는 예능프로그램, 가족, 친구 같은 것이 아니었나 새삼 깨닫게 된다.
이 책 중 가장 인상적이면서 서늘한 부분은 작가 친구가 내뱉은 경계와 적의의 말이다. '이 가게도 그렇고 바로 아래 뜰이 예쁜 커피집도, 꽃가게도, 텐동집도, 출판사도 다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차린 거야. 덕분에 거리는 예뻐졌지. 그런데 말이야. 선민의식 가득한 그 사람들이 이곳 문화를 꽤나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객지에서 온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 뭘 알겠어? 토박이들만 밀려나는 거지'
삶 사이사이를 표류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어떤 곳의 원주민인 척 하며 '이방인'이라고 규정지은 사람들을 백안시하지 않았을까. 그들에게 이민의 불안함과 외로움을 안겨주진 않았을까.
이민은 삶의 일상이고 우리 누구도 '원주민' 같은 건 될 수 없는데도. 앞으로 '이방인'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을 볼 때면 작가의 이 책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