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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의 섬 ㅣ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4
에도가와 란포 지음, 채숙향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4월
평점 :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에도가와 란포의 중편 <도플갱어의
섬>은 란포의 장점이 하나도 빠짐없이 구현되어 있는 작품이다. 감미로운
문체, 압도적인 그로테스크함, 인간의 광기, 행복을 추구하다가 파멸하는 비극적인 운명, 충격적인 죽음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는 이 작품은 기이한 이야기(奇談)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히토미 히로스케라는 몽상가가 자신과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이자 굉장한 부자인 대학 동창 고모다가
간질 발작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미 죽은 고모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위장해 고모다 가문으로 들어간다.
추리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범인의 정체가 처음부터 밝혀지며 그가 어떤 일을 어떻게 꾸미는지도 숨김없이 공개된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절정은 역시나 독자만 알고 있던 비밀이 소설 속 인물들에게도 드러나는 순간일 것이다. 주인공을 비난하는 독자건, 동정하는 독자건 그의 정체와 비행이 언제
쯤에야 폭로될까 , 혹은 폭로되지 않아야 할 텐데라고 기대하면서 책을 읽게 된다.
종반에 이르러 히토미 히로스케의 정체가 폭로되는 건 두 번이다. 우선 고모다의 미망인 지요코에 의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기타미
고고로라는 정체 불명의 문학가에 의해 히토미 히로스케의 정체가 탄로난다. 일반적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한 장면은 역시 이 작품의 탐정 역할인 기타미 고고로가 논리 정연하게 히토미 히로스케의 정신나간 기행을 파헤치고 그로 인해 히로스케가 응보로서
죽음을 맞이하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부분은 고모다의 미망인 지요코가 히로스케의
정체를 추궁하는 부분이다. 칠흑 같이 검은 계곡 안에서 지요코와 히로스케 단 둘이 남게 된 상황, 여기서 지요코는 마침내 점점 커져가는 의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묻고 만다. ‘당신은
혹시 고모다 겐자부로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닌가요?’ 그리고 결국 지요코는 히로스케의 손에 죽고 만다.
이 장면이 어째서 이렇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일까? 혹 나와 같이 소설의 이 순간에 온 신경을 집중하게 된 사람이 있다면 아마 미망인 지요코 때문일 것이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자 남편과 사별한 미망인이라는 애처로움. 작품
속에서 히토미 히로스케의 정체와 음모를 간파했던 유일한 두 사람 중 하나로 독자들과 진실을 공유하고 있다는 동지 의식 때문에 지요코에게는 자연히
눈이 갈 수 밖에 없다. 거기다 앞선 부분에서 히토미 히로스케와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천만하게 정신 나간 몽상가 앞에서 그의 정체를 폭로하는 지요코를 보면서도 ‘어쩌면 죽지 않을 지도
몰라’라는 실낱 같은 기대감을 가지고 두근거리게 된다.
하지만 나는 이 장면에서 전혀 다른 인물의 그림자를 느끼고 전율했다. 에도가와 란포가 이 중편 소설에서 철저하게 은막 뒤로 감춰버렸던
인물, 히토미 히로스케가 위장했던 그의 도플갱어 고모다 겐자부로 말이다. 특히 마지막 순간 지요코가 히토미 히로스케를 추궁하던 이 말이 소름을 돋게 했다. ‘겐자부로에게 당신처럼 무서운 재능은 없었어요!’. ‘무서운 재능’이라니 정말 이상한 말이다. 정체 모를 남자가 남편 행세를 하며 옆에
서 있다. 남편과 똑같이 생겼지만 남편이 아니다. 이 상황에서
보통 어떤 말을 내뱉을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는
이미 물었다. 그렇다면 ‘그 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라는 분노의 외침이나 ‘남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것만이라도 알려주세요.’ 같은 애원이 일반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지요코는 자신의 진짜 남편에게는 당신처럼 무서운 재능은 없었다고, 그렇게
말한다. ‘무서운 재능’ 남편으로 위장해 자신을 속인 남자를
어째서 이렇게 형용하는 걸까? 바꾸어 말하자면, 고모다 겐자부로는
‘무섭지도 않고’ ‘재능도 없는’ 심하게 말하자면 별 볼일 없는 인간이라는 뜻이 되고 마는데.
‘도플 갱어의 섬’에서 고모다 겐자부로는 시작하는 순간부터 고인이다. 그는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란포에 의해 철저하게 가려진다. 히토미 히로스케가 계획을 위해 그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능욕하던
그 처절한 순간에마저 그에 대한 건 시체의 피부가 해파리처럼 손에 들러붙었다는 묘사 뿐이다. 이후 히토미
히로스케의 망상이 구현된 ‘섬’과 ‘바다 밑바닥’의 몽환적인 광경에 대한 서술에 비교하자면 볼폼 없다
못해 처참할 정도다. 그러나 히토미 히로스케가 세운 계획의 중심축이며(고모다
겐자부로의 죽음이란 사건이 없었다면 히토미 히로스케는 그저 그런 몽상가로 방구석에 머물렀을 것이다.) 이
작품이 근원이기까지 한 도플갱어가 이렇게 철저히 무시되는 걸 보며 나는 란포가 무언가를 의도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역시나 란포는 자신의 작품 안에 히토미 히로스케의 도플갱어
고모다 겐자부로가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작은 단서들을 곳곳에 숨겨놓았다. 고모다 집안은 지역의 유지로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겐자부로의 부모는 자식이 어릴 적에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면 겐자부로는
어릴 때부터 긴밀한 감정적 교류를 가질 인물은 하나도 없이 주변의 경원시하는 시선 속에서 살아왔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히토미 히로스케가 고모다 겐자부로가 살아난 걸로 위장해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그의 망상을 위한 토목
공사가 발각되었을 때도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저 ‘센세이셔널’한
일로 받아들여졌을 뿐 고모다의 신상에 관한 일을 진지하게 궁금해하거나 우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모다 겐자부로는 간질을 앓고 있었고 실제로 간질 발작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간질이 반복적인 발작
증상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죽음에 이르기 전 이미 몇 번 발작을 경험했을 가능성이 크다. 책
속에서는 간질 발작 때문에 산 사람을 죽은 걸로 착각해 생매장하는 일이 있었다고 나오며 히토미 히로스케가 범행을 구체적인 계획으로 승화시키는 것도
이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고모다 겐자부로도 간질 환자가 생매장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의 질병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그의 고향이 벽촌이라는 점까지 더하면
고모다 겐자부로라는 인물의 초상을 그려볼 수 있다.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몹시 폐쇄적이고 우울하며 내성적인
성격의 부자. 친구도 없고 심지어 아내와도 제대로 대화하지 않는 사람 실제로 대학 안에서 히토미 히로스케와
고모다 겐자부로가 도플갱어처럼 닮았다는 건 당사자들을 포함해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사실이었는데도 아내 지요코는 그 사실에 대해 조금도 몰랐으며
히토미 히로스케도 고모다 겐자부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다른 동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조금 더 놀란 정도’라고 했다. 심지어 히로스케는
‘내가 겐자부로와 바뀌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기까지 한다. 겐자부로가 그의 고향에서 최고 갑부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변변한 교류조차 없었던 자신의 도플갱어에게 이렇게 업신여겨질 정도라면 고모다 겐자부로는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재미 없고’ ‘특징 없고’ ‘개성 없으며’ ‘인기 없는’ 인간이었다고
추리해볼 수 있다.
막연히 짐작만 하던 고모다 겐자부로의 인물상이 마침내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이 바로 아내 지요코의 외침이 울려퍼지던 그 때이다. ‘겐자부로에게 당신처럼 무서운 재능은
없었어요!’ 무서운 재능이 없는 남자, 매력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느낄 수 없는 남자. 이 최후의 단말마 직전까지 지요코가 히토미 히로스케의 정체를 의심하면서도 그의
망상에, 그리고 그런 망상을 구현해낼 수 있는 그에게 은연 중 홀려가고 있는 묘사를 더하면 고모다 겐자부로에
대한 평가는 완성된다. 그는 아내가 죽은 남편을 위장한 남자를 ‘무서운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하게 만들 정도로 무미 건조한 그저 살아만 있고 돈만 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고모다 겐자부로와 히토미 히로스케의 처지가 바뀌었다면, M현의 갑부가
히토미 히로스케이고 돈 없는 백수가 고모다 겐자부로였다면 시신 능욕도 살인도 자살도 없는 평화로운 결말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란포가 만든 세계는 그렇지 않았고 여기서 두 사람이 ‘도플갱어’라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는 하나의 부조리로 완성되는 것이다.
‘도플갱어의 섬’이라는 소설에서 에도가와 란포라는 언어의 마술사가 관객에게 보여주는 건 히토미 히로스케의 정신나간 망상과 그의
기만, 살인, 그리고 비극적인 죽음이다. 하지만 꽁꽁 가려진 천막 뒤에서 란포는 ‘도플갱어’ 고모다 겐자부로의 실체 없는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자신의 작품을 기괴하며 그로테스크함이 넘치는 비극으로 승화시킨다. 란포가 숨긴 ‘고모다 겐자부로’라는
도플갱어를 추적하며 란포가 남긴 단서를 이해하는 건 추리 소설 안에 또 다른 나만의 추리소설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요코가 죽음을 맞는 장면은 자신의 추리가 진실이었음을 확인한 탐정처럼 내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독자에게 이런 즐거움을 선사해준 추리문학 거장의 솜씨에 찬사를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