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셰어하우스
베스 올리리 지음, 문은실 옮김 / 살림 / 2019년 11월
평점 :
서로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사람들끼리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걸까? 소설
셰어하우스는 이 흥미로운 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애인의 변심으로 인한 실연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여성
티피는 새로운 집을 찾아 새출발을 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가 사는 런던은 같은 시간대 대한민국 서울과
마찬가지로 천정부지의 집값을 자랑하는 곳. 그녀는 집세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동거인을 구해 셰어하우스
생활을 시작한다. 같이 사는 사람은 남자라는 점이 걸리지만 문제될 건 없다. 호스피스 일을 하는 레온은 밤에는 일하고 오전에 집을 쓰는 올빼미니까.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두 사람이지만 만날 일은 절대로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명색이 동거인데 이런 무리수가
오래 갈 수는 없는 법. 두 사람은 생활 상의 절충을 위해 포스트잇에 서로의 메시지를 써서 남기기 시작한다. 사소한 요구와 사무적인 분위기로 시작한 이 기묘한 형태의 대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우정으로 발전해가고
마침내 그보다 열정적인 어떤 것으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데이트는
물론 어떤 신체 접촉도, 심지어 상견례조차 못한 채 오직 글자에 의지하여 사랑은 그 어려움과 기이함
때문에 보는 사람을 몰입시키는 힘이 있다. 영화 러브레터가 그랬고 시월애가 그랬다.
소설 ‘셰어하우스’는
러브레터와 달리 과거를 끌어오지 않고 현재진행형으로 사랑이 익어간다. 시월애와 달리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조금만 재미없어지면 라디오에서 실제 사례로 소개될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이 기묘한 사랑 이야기는 읽는 사람을 매료 시킨다. 서로
얼굴 조차 모르는 티피와 레온이 서로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부분에서 이 이야기의 간질간질한 감정은 그야말로 정점을 찍는다.
그러나
흡인력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읽으면서 한국에서 드라마를 이렇게 만들었다가는 망하겠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영국
소설가들 특유의 끔찍하게 느린 호흡이 새콤달콤한 로맨스를 그리는 과정에서도 가감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셰어하우스>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옛 여친을 정리하는
대목에 이르는 데만 엄청난 분량이 소모된다. 흥미 있는 부분에서 과감히 끊어버리는 이른바 절단 신공조차
없다. 남자 주인공이 근무하는 호스피스의 환자들까지 끌어들여 세세하게 묘사한다. 때문에 재미있고 웃긴 와중에도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거지?’라는 의문이 든다.
연애 소설을 ‘왜’ 이렇게 길고 느리게 서술해야 했는지에 대한 답은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발견할 수 있다. 티피와 레온의 서사는 단순히 서로에 대한 연정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방적인 이별을 겪은 데다 소름끼치는 통제광 전남친에게 시달리는 티피, 내성적이고
침잠하는 성격인데 죽어가는 사람들로 가득찬 호스피스에서 일을 하는 레온. 한 눈에 봐도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걱정되는 이 두 사람은 ‘사랑하기 이전에’ 우선 ‘살아 남아야’ 한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의 홈 셰어는 사랑 이야기이면서 각자의 우울함으로부터 탈출하는 치료 후기이기도 하다. 밝고
수다스럽고 충동적인 티피와 침착하고 조용한 레온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만 정신적 고난은 사랑하는 사람이 부축해주는 것만으로도 딛고 일어서기 힘들다. 가급적 많은 사람이 어깨를 빌려주고 손을 내밀어주어야 한다. 뜨개질과
바늘코에 대해 진지하게 글을 쓰는 작가도, 지나치게 솔직한 바리스타 친구도, 암으로 죽어가는 착한 아이도, 2차 세계대전 때 만났던 옛 애인을
찾아다니는 시한부 노인도, 티피와 레온의 이야기 안으로 들어왔던 인물들은 전부 두 남녀가 심연 같은
고통으로부터 헤어나오게 만들기 위해 작품 안으로 들어와야 했던 것이다. 티피와 레온에게 단순히 피상적인
‘아는 사람’ 혹은 ‘친한
사람’으로 머물러서는 효험이 없기 때문에 그들 뿐 아니라 그들의 서사마저 전부, 통째로 들어와야 했던 것이다.
삶에 지쳐 슬픈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요즘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남녀조차 절망스러운
우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듯 하다. 이런 시기에 티피와 레온의 이야기 <셰어하우스>는 평범한 로맨스를 넘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사람들과 관계 맺고, 그들의 이야기마저 우리네 인생으로
들어오게 하자. 필요할 때 기댈 수 있을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