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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평점 :
이따금 기묘한 독서를 할 때가 있다. 책을 읽기도 전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데. 사샤 스타니시치의 새 소설이 바로 그 경우였다.
기본적으로 이 이야기는 난민의 이야기로 자전적 소설이다. 작가이자
주인공 사샤의 가족은 보스니아에서 태어났지만 1992년 내전 때문에 조국을 떠나 독일로 이주한다. 내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조국 대한민국이 내가 살아있는 동안 공중 분해되어 베트남이나
싱가포르로 이주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때문에 사샤 스타니시치의 이야기는 설령 그것이 독일의
저명한 문학상을 수상한 스토리 텔링이라고 하더라도 공감이 어려울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출신’은 담담하게 그러나 상당히 묵직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소설은
작가가 독일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이력서를 쓰는 다분히 사무적인 장면으로부터 시작되면서 이국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불안과 혼란을
예고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력을 그러모으는 과정에서 기원담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작가 사샤의 시선은 대단히 무질서하다. 본인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그 와중에 가족과 친척들의 이야기까지 등장한다. 경영학자였던 아버지는 공사판의 노동자가
되었고 정치학을 배운 어머니는 세탁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배우였던 외삼촌은 신문 배달부를 거쳐 광대가 되었고 이모 할머니는 소련의 우주 비행사가
되었다. 공간적 배경도 고정되지 않고 부유한다. 독일에서
오스코류샤로, 비셰그라드로 이동한다.
등장 인물 중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사람은 작가의 할머니로 주인공이 찾아 헤매는 ‘출신’의 원점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면서
이야기의 불투명함은 배가된다. 작품 속에서 시간이 뒤섞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분간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동유럽의 전래 동화까지 현실을 침범해 들어온다. 이
모든 복잡함은 작가의 부지런함 때문이다. 작중 독백처럼 작가는 ‘나를
원하고 내가 있고 싶은 곳에서’ ‘소속감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 여정은 지난했으나 결실 없이 끝난 듯 하다. 작가는 ‘우리들을 이곳 저곳으로 이끌었던’ ‘우연’들이 곧 자신의 ‘출신’이라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고민에 매듭을 지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작가가 ‘출신’을 ‘우연’이라고 정의 내린 데서 그 내면의 불안을 느꼈다. ‘우연’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노력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짐작할 수 없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작가이자 주인공 사샤가 결국 확인한 사실은 고향을 떠난 삶은 그릇에서 쏟아진 음식처럼 원래 모습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내면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유례없이
독특한 ‘멀티 엔딩’ 기법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장 ‘용의 보물’ 역시 기교적 측면에서의 창의성 보다 작가의 흔들리는
내면을 투영한 것으로 보인다.
‘실향민’은 아니지만 소설 전반에
드러나는 이런 부평초 같은 불안함은 이해와 공감이 가능했다. 우리도 누군가와 처음 만났을 때 어디에
사는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가 묻고 자리가 무르익으면 어느 지방에서 온 어느 성씨인지 이야기한다. 나의 뿌리, 나의 원초를 찾고 확인하고자 하는 시도는 주변에서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기원담, 히어로 무비로 치자면 오리진(origin)이 우리에게는 이처럼 가볍고 흔하다. 그 이유는 흔들리지
않는 근본이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조국이자 우리
나라. ‘출신’의 화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는 나라를 잃었고, 그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풍화된 세대도 아니다. 그에게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나아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근원적이고
끔찍한 불안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이 불안정하고 고통스러운 심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이유는 작가의 태도 때문이었다. 솔직 담백하고 해학적인 사샤 스타니시치의 문체는 작가의 감각을 독자들로 하여금 공유하게 만든다. 독일로 이주했을 때의 술회에서부터 그의 부담 없는 문체가 빛을 발하는데 새로 뿌리를 내려야 했던 터전이 얼마나
낯설었는지를 아는 독일어 단어가 ‘메르세데스’와 축구팀
‘바이에른 뮌헨’ 뿐이었다라는 표현으로 .위트 있게 묘사한다. 이민자들에 대한 인종차별적 시위를 묘사한
바로 다음 문단에서는 스타니시치가 열심히 이주국인 독일어 단어를 암기하는 모습이 나온다. 어떠한
평가도 형용도 서술도 없다. ‘인종차별시위가 있었다’ ‘독일어
단어를 외웠다.’ 이 두 일화는 그저 통통 뛰어넘듯 가볍게 서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스타니시치의 부담없는
어조는 나에게 여러 명의 ‘타자’를 떠올리게 했다. ‘우리’라는
원 바깥의 다른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다. 가장 먼저 연변 자치구에서 대한민국으로 넘어와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제주도에 도착한 예맨의 난민들. 한 연예인이 난민에 대한
인도적 수용을 주장했을 때 나 역시 그에게 날선 시선을 보냈던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우리 사회로
들어온 타자들의 문제가 관용과 호혜라는 단순하고 유치한 마음가짐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점은 숙지하고 있었다. 아직도 이런 자세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냉정함은 타산과는 다르다는 변명으로 타자들에 대한 이해조차 방기한 것은 실로 끔찍한 게으름이었다. 스타니시치의
‘출신’을 읽고서야 나는 낯선 그들의 눈동자 뒤에 ‘마음’이라는 것이 숨어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끝없는 불안일 수 있음을 처음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사실 우리 주변의 타자들은 물론 스타니시치도 모국을 '잃은'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의 나라는 존재한다. 참을 수 없이 고단한 삶 때문에, 그들 자신 혹은 그들의 부모들이
자신이 태어난 곳을 등진 것이다. 이후 돌아가기를 포기한 시점에서 그들은 어느 정도는 자발적으로 타자화를
선택한 것이다. 이 사람들의 복잡한 심리는 이 지점에 연원 한다. 그들이
원래 누구인지 알려주는 조국이 엄연히 실존하고 불청객으로서 인생이 자의 때문인지 타의 때문인지 구분하기 힘들다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혼란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엄연히 실존하는 그들의 기원이
끊임없이 내면의 불안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낯선 존재들의
눈동자 안에 도사린 흔들림과 불안. 여기까지가 사샤 스타니시치가 우리들에게전달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독자들은 소설 외부에 존재하기 때문에 작가가 작품에
담을 수 없었던 점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스타니시치의 글이 언급하지 않은 것, 그건 바로 ‘우리’들은
‘타자’인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의 문제다. 독일인들은 스타니시치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보스니아에서 온 난민들을 보고 어떤 생각을 품었는가. 작가의 시선
외부로 나가야 하는 이 문제만큼은 사샤가 아닌 우리가 품고 답해야 한다.
혹자는 ‘출신’을 탐색하는 이 소설을 디아스포라 문학이라고 일컫는다. 사샤의 이야기를 통해 디아스포라들의 내면을 인식하면, 그들의 고통과
불안에 공감하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답은 단순할 수 없다. 치안, 직업, 생활 보호, 문화
충돌 등 가볍게 대답할 수 없는 사안들이 너무 많다.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출신’에서도
그러하다. 사샤 스타니시치가 정체성과 기원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중심은 어디까지나 스타니시치 자신이다. 저자는 불안해하고 기원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끊임없이 ‘살아간다’. 세르비아인 아버지와 이슬람 교도 어머니와 함께 보스니아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전쟁과 함께 독일 하이델베르그에 난민의 신분으로 도착하고, 마지막에는 다시 보스니아를 찾아간다. 그들은 스스로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아나가고 있으며 따라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은 뿌리내린 우리가 아니라 흘러 들어온 그들이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인지’다. 우리와
다른 겉모습 안에 스타니시치가 표현한 마음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불안과 혼란, 그리고 살고자 하는 의지를 인식해야 타자들을 ‘난민’, ‘이민’이라는 활자 상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대등한 ‘인간’으로 볼 수 있다. 이른바
이성적인 묵시를 하자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폭력과 증오를 삼가하고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분노를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해소하려는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 ‘출신’을
찾아헤맸던 스타니시치가 ‘출신’을 가진 우리들에게 소설 속에서
부탁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색안경을 벗고 바라보아 달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