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 프랑스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드니 디드로 외 지음, 이규현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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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손은 평온해 보이는 일상을 파고들어 인간의 내적 무질서와 불화에서 비롯되는 환각, 현기증을 기록하는 '지진계'라는 비유가 굉장히 인상 깊었다. 가장 기억에 남기로 꼽을 작품은 단연 <어떻게 왕부는 구원받았는가> 프랑스 단편선에서 공자와 제자 안회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동양철학 사상을 엿볼 수 있어 애틋하게 다가왔다.

_ 마치 침묵은 벽이고 말은 그 벽을 가득 채우는 색채인 듯, 그날 저녁 왕부는 말이 많았다. 이 노인 덕분에 링은 따뜻하게 데운 술에서 피어오르는 김으로 인해 희미해진 손님들의 얼굴이 아름답다는 것과, 널름거리는 불길로 고르지 않게 익어가는 거무스름한 쇠고기가 화려하게 빛난다는 것과, 시든 꽃잎처럼 식탁보를 수놓은 분홍빛 술 자국이 그윽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_ 왕부는 포승줄에 묶인 두 손이 아팠고, 절망한 링은 스승을 바라보고 빙긋이 웃었는데, 링에게 이것은 슬픔을 표현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었다.

사제 간의 공경과 도의가 여실히 드러나는 서사는 한 편의 설화처럼 읽혔다. 특히나 두 인물이 황궁에 잡혀들어갈 때 묘사된 여러 지물들은, 권위를 유려하게 포착한 문장들로 하여금 마치 독자를 그곳에 있게 하려는 듯 탁월했다.

_ "짐은 그곳에서 자랐다. 짐이 그곳에서 자라도록 하기 위해 짐의 주위에는 고독이 마련되어 있었느니라. 인간 영혼의 흙탕이 튀어 짐의 천진함을 더럽히지 않도록, 내 미래의 신하들이 불러일으킨 요란한 파도를 짐에게서 멀어지게 했고, 그림자가 짐에게까지 이를까봐, 어느 누구에게도 짐의 문턱 앞으로 지나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시간은 제자리에서 맴돌았으며, 네 그림들의 색깔은 새벽이면 생생해지다가도 황혼이 질 때면 희미해졌다. 짐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네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_ "네가 이토록 사랑받으니만큼, 짐은 너를 증오하노라."

제자의 피가 청옥 바닥에 흩뿌려지며 얼룩을 만들자, 그 순간마저도 '아름다운 진홍빛에 감탄'하고 마는 왕부는, 황제의 앞에서 그림 작업에 몰두하며 황궁을 비취빛 바다로 만든다.

_ 물이 어깨까지 차오르는데도 예절 때문에 자리를 뜨지 못한 신하들은 물속에서 깨금발을 하고 서 있었다. 마침내 수면이 황제의 가슴께로 높아졌다.
_ "난 네가 죽은 줄 알았다." "선생님께서 살아 계시는데 어찌 제가 죽을 수 있었겠습니까?"
_ "걱정하지 마십시오, 선생님." 제자가 속삭였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물이 완전히 마른 상태가 될 것이고, 일찍이 자신들의 소매가 젖었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황제는 가슴속에 바다의 씁쓸함을 조금 간직할 것입니다."

화가 왕부와 제자 링은 그들이 만들어낸 그림 속 물결 너머로 함께 영원히 사라졌다.

또 유럽 문학에는 사랑하는 여인을 향한 찬사가 그득한 까닭으로, 사랑과 고통 혹은 경탄의 홍수 속에서도 특색있던 <밤(La nuit)>, <난쟁이(Le nain)>, <륄라비>라는 세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

"바르나붐 곡예단의 난쟁이는 서른다섯살 되던 해에 키가 자라기 시작했다. 학자들이 난처해졌는데, 성장의 한계를 스물다섯살로 못박아둔 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애썼다." <난쟁이>는 기이한 현상으로 출발함에도 몹시 일상적인 리얼리즘으로 녹아들어 모든 사건과 대화가 자연스레 느껴질 지경에 이른다. 환상이 현실 영역 안으로 틈입한다는 점에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 연상되기도 한다.

서커스의 '쓸모있는' 단원이었던 그는 오히려 장신의 미남이 되면서 난생 처음 군중에 섞여 단장의 눈에는 무수한 점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되는데, 이는 '몰개성'을 함축하며, 역설적이게도 그가 '평범해지며' 오히려 무언가를 '상실했음'을 시사한다. 남들처럼 '평균치'에 가까워지자 "불쌍한 녀석"이라든지 "가망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말을 듣게 되면서 우스꽝스럽게도 왜곡된 현실성에 우리 사회의 일면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_ 또비가 코끼리인 것으로 충분하듯이 그는 난쟁이인 것으로 충분했고, 따라서 관객을 사랑할 필요가 없었다.
_ 기형 인간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신체적 결함에 대해 어느정도 우울해하거나 말도 안되는 소망을 품기에 이를 테고, 그러면 그들의 공연에 지장이 생길 거야.
_ 삶은 정말 아름다워요.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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