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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원제는 Being Mortal, 번역본의 제목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다.
이 책을 처음 본 건 8월 첫째주 점심을 먹고 주위를 산책하다 서점에서 진열된 것을 보았을 때이다.
제목이 강렬해서 바로 손에 들고 조금 뒤적거리면서 봤지만 다시 내려놓았다.
죽음이라는 테마는 언제부터인가 - 꽤 어려서부터 심각하지는 않았더라도 - 생각해오던 것이고,
고등학교 2학년 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다시금 깊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출장을 가게 된 터에 새로 읽을 책을 구하지 못했는데 공항에 도착해서 이 책을 사버렸다.
긴 비행 시간이고 비행기에서 다 읽고 나서 시차 적응을 위해서도 잠을 저지해야 되는 이유로 내친 김에 독후감을 작성한다.
죽음에 대해서 그래도 초연할 줄 알았는데 책을 읽고 아직도 많이 떼지 못했다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난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차례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비행기 안에서 울 수는 없잖아.)
단순히 슬픈 것만이 아니고, 만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머 그런 감정이 자꾸 올라왔다.
할아버지 임종하던 생각도 나고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니 말이다.
한 여름날 하교하고 돌아왔고, 할아버지는 맏손주인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고 숨을 멎으셨다.
할아버지 임종을 지켜보고 나는 한달 동안 밤이 오면 그냥 눈물을 흘렸었다. 그건 심한 충격이었으니까.
삶은 유한하다는 것, 누구나 알지만 아무나 모른다.
불교의 가르침,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있지 않는가 오죽하면 수자상이라고 네가지 중생상에 떡 하니 있을까.
중생의 네가지 상이 있단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러한 상을 여의는 것이 바로 석가모니의 멋있는 가르침이죠. (종교 아님)
내가 있다는 굳은 생각, 나와 남이 있다는 생각, 중생상(? 음 이건 뭐였지. 내가 있고 나와 남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서 발생하는 중생과 부처를 둘로 만드는 상인가?)
그리고 수자상. 수자상이 나의 생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석가모니께서는 왜 수자상을 이야기했을까?
그 당시 인도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갠지스강에 화장한 뼈를 뿌렸다고 하던데, 다 사람들은 죽는다는 것을 안다는 것인데 왜 굳이 수자상이라고 했을까.
남들은 다 그렇게 죽어도 막연하게 자기는 그렇게 죽을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심각하게 생각을 안한다는 것 때문인 것 같다.
남이 죽는 것을 여러차례 보면서도 자기가 마치 천년을 살 것 같이 행동을 하지 않는가 말이다.
만약에 자기가 유한하다는 것을 느낀다면, 적어도 인생의 관점은 엄청나게 바뀔 것인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분명히 수자상을 강조해도 될 거다.
요새 화정이라는 사극을 보지만, 그 덫 없는 인생사 길어봐야, 50~60년 정도 살면 가던 시대에 엄청난 음모와 모험을 감행해서 권력을 쟁취하려고 한다.
권력을 쟁취하려는 자와 지배 당하는 백성 모두 자아 성찰과 하나로서의 공생에 대한 개념은 전혀 없이 이기적인 피로 점철된 역사 아닌가? 동서고금 다르지 않지.
재벌가에서 벌어지는 일 들, 아니 멀리 볼 것도 아니다 자기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남의 일도 아니다.
이 책에는 마치 연속극이나 영화를 보듯이 불치병을 앓던 사람들과 주위의 가족들의 삶고 애환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고, 저자의 의도 또한 명확하게
전달하면서 독자들에게 생각을 하게끔 한다.
생각을 하게끔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답이 있는 고로, 답은 모두 자신이 찾아야 되기 때문이다.
저자의 이야기 중에서 이러한 대목이 있다.
1943년 Abraham Maslow이 발표한 A Theory of Human Motivation이라는 논문이 있는데,
내용인 즉 슨 인간의 욕구의 위계, 즉 욕망의 순서가 있다는 거다.
가장 밑바닥에는 생리적인 욕구, 생존에 필요한 음식, 물, 공기, 안전 등등
그 위로는 애정과 소속감이 있고 그 위로는 성장에 대한 욕구, 개인적인 목표 성취감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꼭지에는 자아실현 self-actualization 이라는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문도 있겠지만, 이미 들어본 이야기기도 하고, 원래 그전에도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엔 Stanford 심리학 교수인 Laura Casrtensen이라는 분의 다년간에 걸친 연구 결과로는 전반적으로 나이가 들면서
정서적으로 만족스럽고 안정적인 경험을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점점 더 깨닫는 것과 이러한 심리적 변화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이 연구의 한가지 이야기이기도 하단다.
그런데 저자의 의문점이 있다는데, 나이가 들을수록 성취하는 일에서 멀어지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이러한 심리상의 긍정적인 경향이 무엇인지?
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경우에 나이가 들어가면서 오히려 더 정서적으로 만족스러워지는지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드는 의문이 성취하고 사회적인 관계를 넓히고 바쁘게 살아가다가 일상에서 더 소중함과 정서적인 안정을 느낀다면,
우리는 왜 그렇게 되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을 보내는 걸까? 라는 부분을 제시한다.
이 책에는 이러한 부분의 명확한 해답은 없다. 그래도 중간 중간에 새로운 개념의 요양소들이 성공을 거둔 사례에서 조금씩 보여주고 있고,
이러한 사례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도 들게 했다.
인류는 언제 철이 들을까? 철이 들을 수 있을까?
화정이라는 드라마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이게 어디서 나오더라... 아마도 인조반정의 공신이 왕권을 절대 권위처럼 휘둘려 할 때 했던 조언이었던 것 같다.)
백성들은 아주 무지하단다. 단순하고 그러나 그들의 핍박과 어려움이 극에 달하면 크게 일어나서 막을 수가 없게 되니
백성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대응을 하셔야 된다고. 이 말을 하는 지배계층 또한 지혜롭지 않았으면서...
우리나라에 고찰들에 가보면 더러 써있다.
불이문(不二門), 둘이 아닌 문 아닌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한마음 도리로 가는 문)
카톨릭에도 내 탓이로소이다. 성경에 예수님이 너희들 중 죄짓지 않은 자가 있거든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왜 우리는 이렇게 간단한 진리를 수많은 성현들이 이야기 해줬는데도 뭐가 그리 바빠서 귀를 기울이지 않는가 말이다.
나는 정말 무엇인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