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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다시 읽기 1 - 식민지적 사유의 전복을 위해
최형익 외 엮음 / 메이데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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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전 다시 읽기1>의 관심 영역은 정치학, 사회학, 철학이며 9명의 저자가 12편의 저작을 비판적으로 읽고 있다. 이 책의 전체적인 주제는 부제에서 드러나듯이 “식민지적 사유의 전복” 이다. 서문에서 최형익 선생은 “주류적 해석 방식에 도전하기” 위한 “새로운 학적 사유를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라 밝힌다(12-13쪽). 식민지적 사유는 불변의 실체를 전제하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자신의 지반으로 삼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사유에 대한 저항과 탈식민지적 사유, 식민지적 사유에 대한 전복을 꾀하고 있다. 이 책은 더욱이 현재 미국 중심의 세계화의 광풍 속에서 무방비적이고 무비판적인 주류 사유에 대한 반성을 통해 새로운 사유를 모색하고 규격화된 사유 틀을 벗어나려 한 점에서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고정된 틀에 얽매인 사유의 구속은 학문언어가 우리말이 아닌 풍토에서 서구 언어에 대한 무조건적인 권위를 인정하고자 하는 허구적 권위에 대한 갈증이 깔려 있다고 할 것이다.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지도 않은 소크라테스의 말을 온 국민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해프닝은 학문 번역어의 종속성을 나타내는 단적인 예이다.

먼저 나는 이 책에서 저자들이 해당 사상가의 주장을 요약한 내용을 재차 언급하지 않겠다. 그리고 저자들의 핵심적 문제의식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저자들이 사상가들의 주장을 요약하는 작업은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과 독자에게 분석 및 비교를 좀 더 쉽게 하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고전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독해는 또 다른 하나의 독해일 뿐, 하나의 고정된 시각으로 규정할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사유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은 하나가 아니라 복수의 열린 가능성의 문이며, 그 문을 통해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 넓은 고전의 바다일 것이다.

2.

  최형익 선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서평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오독한 해석가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나아가 귀족적 시민이라는 일부 인간을 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절반의 정치적 기획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온전한 기획의 현실화를 주장한다. 이러한 현실화의 근거의 단초를 그는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동화된 생산 체계의 구상”에서 찾고 있다(45쪽).

김경희 선생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알뛰세르 논의에 기반해 비평하고 있다. 그것은 마키아벨리가 국민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인민의 관점’이라는 계급적 입장에서 바라보았다는 것이다(63쪽).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알뛰세르는 계급투쟁을 역사의 원동력으로 파악하지 않고 귀족과 인민 간의 계급투쟁을 계급타협에 가까운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본다. 국가의 혼란 속에서 우선성은 인민의 우선성이 아니라 국가의 우선성이었다는 것이다.

이종영 선생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기존의 번역이 ‘비센샤프트’를 ‘학’으로 옮겼다는 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따라서 그는 ‘비센샤프트’를 ‘과학’으로 옮길 때에만 <정신현상학>이 과학적 인식에 이르는 의식의 경험에 대한 책으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에 과학 개념이 새롭게 부각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때 과학은 대상에 대한 주관성을 철회하고 ‘개념’을 통해서, 노동을 통하여 실질적 인식에 도달하고 사물운동의 내적인 필연적 연관을 포착한다. 또한 과학은 자연적 의식과 대립하며 분석 대상을 전체성 속에서 체계적으로 포착한다.

송태수 선생은 쏘스타인 베블렌의 <유한계급론>은 당시 미국 유한계급의 속물주의와 겉치레, 허례허식에 대해 신랄하게 공격했으며, 유한계급의 모든 행동의 동인은 “나에게 돈과 여유밖에 없다”는 것을 최대한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한다고 한다(110쪽). 이러한 베블렌의 금력과시 사회에 대한 분석은 “‘가공자본’의 지배력이 무한히 커지는 현실”에서 분명히 일반성을 갖는다(120쪽)고 한다. 하지만 베블렌이 유한계급에 대한 통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유한계급의 보수성에 대해 계급적 이해관계에 근거해 논증하지 않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대목이라고 지적한다.

정병기 선생은 로베르트 미헬스의 <정당사회학>은 미디어라는 새로운 변화의 모습이 예측되지 못하는 시대적 한계가 있음에도 “현대적 개념들이 이미 당시에 모두 통찰”되었다고 한다(122쪽). 미헬스는 서유럽 사회주의 정당들의 내부구조를 당내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연구하는 것이 주된 관심이었다. 그 내용은 “선출된 자가 선출한 자들을 지배하고, 수임자가 위임자를 지배하며, 대의원이 대의원을 선출한 사람들을 지배하도록 만드는 것은 조직 그 자체이다.”(126쪽). 미헬스의 주요 분석 대상인 좌파계급정당들도 부르주아화의 경향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미헬스는 좌파조직에 대한 비판을 통해 당이론의 수정에 기여한 측면에도 불구하고 카리스마의 등장까지 포함하는 과두제의 철칙론을 주장하여 과두제와 민주화가 상호 반복하는 순환론적 역사관에 봉착한다. 그의 과두제 철칙론은 “대중의 무능력과 어리석음을 조직의 과두제화를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변하지 않는 요인으로 간주”(142쪽)하기 때문이다.

이호근 선생은 칼 폴라니의 <대전환>은, 시장지상주의와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맹신을 비판하고 있다고 한다. 폴라니는 시장분석을 경제법칙론적 이론의 틀에서가 아니라 독자적인 시각, 즉 역사 발전을 추동하는 특정한 주체가 등장하지 않으면서 시장경제에 대한 대항 축으로 ‘사회’ 또는 ‘사회의 자기보호’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분석한다(150쪽). 이는 역사발전의 기계론적 해석에서 자유롭다는 분석의 특성을 갖는 동시에 심화된 계급분석이나 사회구조분석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한계점을 갖는다(151쪽). 그럼에도 저자는 시장의 지배가 날로 강화되는 현재에 그 시장지배에 저항하는 사회의 도전은 그 사회의 최후조처가 될 것이라고 경종을 보내는 폴라니의 해석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본다.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혁명의 사회학>에 대한 양권석 선생의 서평은 파농의 사상을 식민지 해방운동의 맥락, 즉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구식민주의의 연장선에서 파악하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주변부 민중들의 자기 해방과정을 식민지 해방운동의 역사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파농 읽기와 해석의 자리를 재 주장하려는 것이다.”(166쪽) 왜냐하면 자본주의 세계화의 역사가 전개되는 과정은 식민주의 역사의 전개과정이며 따라서 식민주의 역사도 그것에 대항한 식민지 해방운동의 역사도 이미 끝난 과거가 아니기 때문이다(173쪽). 저자는 파농의 비판의 핵심 주제가 ‘식민지 부르주아지 민족주의’이며 그의 민족이해는 본질적이며 절대적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민족을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단일한 정체로 형성해, 세계 자본에 대항하는 방식을 많이 벗어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민족이나 민중의 이해는 단일한 정체가 아닌 다양한 정체들의 관계적 공존 형식으로 이해해야 하리라고 본다.”(195쪽).

이구표 선생은 푸코는<감시와 처벌>에서 지식과 권력 간의 상호 접합이라는 관행들 간의 전략적 연계관계들을 밝혀냄으로써 감옥 배치의 가시성을 드러낸다(209쪽)고 한다. 푸코에 따르면 근대 개혁가들이 구체계의 신체형 폐지를 요구한 직접적인 원인은 “민중의 저항과 사회 질서의 전복에 대한 공포”(212쪽) 때문이다. 근대 계몽의 개혁가들에 의한 새로운 사법 체제는 예방적, 공리주의적, 교정적 표상 모델에 입각하여 신체가 아니라 마음을 그 작용 지점으로 삼으며 형벌의 표상을 통해 범죄나 저항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제약적 코드들을 자동적으로 활성화시켜 스스로를 바로 잡는 법적 주체로 구성하도록 만든다. 저자는 푸코의 저작을 단지 권력에 대한 이론서가 아니라 “항상 특정한 권력 형태에 대한 특정한 저항 형태의 출발점”(221쪽)으로 읽는다. 푸코의 저작은 투쟁과 저항을 더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한,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전략적 도구(222쪽)이며 “감옥과 규율 권력의 궁극적 패배에 관한 이야기”(225쪽)이다.

들뢰즈․가타리의 <분자혁명>, <안티 오이디푸스>, <천의고원>에 대해 권혜원 선생은 정치적이고 윤리적 관점에서 독해하고 있다. 그는 미시파시즘에 대한 발견과 분석을 정치 행동에 결합해야 하는 이유를 거시파시즘에 대항하는 집단조차 은연중에 파시스트적 삶의 양식과 어법을 존속시키면서 거시파시즘에 구조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주체성의 양식을 창조하는 문제”는 소수자화의 관점과 연계된다(256쪽).

3.

편집자는 이 책에서 여러 사상가의 저작을 관통하고 있는 문제의식을 “식민지적 사유의 전복”으로 독해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글 전체를 관통하는 단어로 떠오른 것은 ‘저항’이었다. 식민지적 사유의 전복을 위해 저자들과 저자들이 다루는 사상가들은 기존 사유와 지배 질서에 저항하고 있다. 식민지적 사유의 전복을 위한 저항적 사유는 한편으로는 사상가들을 새롭게 독해하고자 하는 문제의식 속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저자들이 다루는 사상가들의 사유 속에 녹아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책은 ‘순수하게’ 새로운 독해는 아니다. 왜냐하면 저자들은 사상가들의 원래의 의도를 왜곡한 기존의 해석을 비판하면서 다시금 사상가들의 저작 또는 비주류적 해석자들을 근거로 원래의 의도에 근접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먼저 “식민지적 사유의 전복”이라는 초점에서, 주류적 해석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인간을 더욱 가혹하게 착취하고 더욱 세밀하게 지배․통제하는 현실에 대한 반성과 비판 그리고 변혁적 실천이 시급히 요청되는 현실 속에서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사상가들의 사유는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의식을 던지고 있다.

이 책은 기존의 해석자들에 의해 덧칠해지거나 일반화되고 규격화된 이론을 무방비 상태로 수용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고 있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침묵하는 지배적 사상과 질서에 반기를 들고, 지배 권력의 거시적․미시적 정치 전략의 분석을 통하여 굴절된 인간의 모습을 복원시키고자 저항하는 사상가들을 다시금 현실로 불러내고 있다. 우리의 현실 세계가 사상가들의 문제제기를 여전히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한에서, 저항하는 사상가들의 문제의식은 그들만의 문제로 국한되는 특수하고 개별적인 문제의식이 아니다. 물론 이 책은 혁명가라 할 수 있는 사상가들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사상가들의 시대적 한계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나아가 새로운 사유가 안고 있는 문제점도 등장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한계점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그 가치를 역사 발전의 밑거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과거 사상가들을 새로운 사유의 조력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이 고전을 읽는 과제일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가 노예의 철학자가 아닌 새로운 공동체의 정치적 기획자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와 만날 수 있듯이, 사상가들은 우리의 현실과 여전히 소통가능하며 함께 호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죽은 고전(故典)이 아닌 옛날의 것이 현재까지 가치 있는 고전(古典)으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현실과 만나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전은 연대기적 고전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이며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맑스를 읽으면서 맑스가 환경문제를 간과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시대적 상황에 우리의 시각을 확장하지 않고 시대적 한계를 현재 규범으로 비판하는 것일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 책에 흐르는 공통된 문제의식을 ‘저항’으로 읽었다. 이때 저항은 서구적 권위를 추종하는 학문적 사유의 종속에 대한 저항이며, 기존의 지배질서에 대한 정치적 해방을 위한 저항이자 일상적 삶에 침투한 지배의 권력에 종속됨을 거부하는 저항이다. 저항적 사유의 목적은 부단한 반성적 음미과정에서 의도적 또는 타의적으로 감추고자 했던 역동적인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저항적 삶의 과정을 질식시키는 정형화된 사고의 틀과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새롭게 형성하는 것이다. 변화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전제를 부여잡는 것은 일시적이고 가상적인 안정성을 확보할 수는 있지만 언제나 보수와 억압을 추종한다. 지금까지의 사유의 저항과 실천의 저항은 이 모든 허구적 실체의 현실화에 대한 비판과 파괴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유의 종속에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사유는 저항하면서 깨어나고 저항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저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계간 <진보평론> 가을, 33호에 실은 서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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