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 불안한 인생에 해답을 주는 칸트의 루틴 철학
강지은 지음 / 북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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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고뇌 덕분에 귀한 글 읽게되어 감사합니다.
또 다른 작품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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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2008 촛불의 정치
남구현 외 지음 / 메이데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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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메이데이>읽고 난 단상들




박종성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서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고찰하는 글이 있다. 아마도 남구현과 이광일, 박영균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여기서 남구현의 글은 비폭력의 문제를 다시금 사유할 수 있는 장를 마련하고 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비폭력을 옹호하는 목수정의 글과 비교하면 흥미로울 것이다. 촛불 항쟁의 출발을 알린 고등학생들의 현실과 그로부터 귀결되는 신자유주의 비판을 다루고 있는 이철호의 글 또한 국가의 국민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교육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김동성은 공공부문의 위기를 야기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각 저자들이 문제와 그 내용은 독자들이 다양한 이해를 위한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되어 이 글에서 정리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나름대로의 국가의 권력과 구성원들의 관계, 권력의 정당성의 문제, 인터넷의 운동성 등의 문제의식으로 글을 이어 나갔다. 


  희망과 공포라는 국가 권력의 내적 동학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각 저자들이 집중해서 다루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과 직면하면서 ‘행복’과 ‘죽음’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죽음의 관계로 설정하고 행복의 영역은 자본에게만 허락하는 것이다. 그것도 죽어 있는 노동으로 우리 위에 군림하는 허구적 실체를 부여한 자본에게 말이다. 행복은 건강한 신체와 아타락시아(평온한 마음Ataraxia)이다. 촛불 항쟁에는 이러한 요구가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고통을 피하는 사려 깊음이 사라진 사회에 대한 요구인 것이다. 사려 깊음은 프로네시스(pronesis)는 곧 이성이다. 결국 사람들이 거리의 정치를 시작한 것은 ‘현실적인 것이 비이성적 권력이고 비이성적 권력이 현실적인 것’1)이라는 점을 아주 분명하게 직시한 것이며 이에 대한 이성적 사회의 직접적 실현인 것이다. 다른 한 축으로 촛불 항쟁에는 직,간접적으로 바로 ‘죽음’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리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듯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인간을 비추는 거울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얼마 전 보았던 <차마고도>의 수행자가 모습이 상기된다. 거기서 수행자들은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해 수행의 길을 걷는다. 이러한 길은 자본주의적 인간의 본성을 주장하는 애덤 스미스적 인간, 즉 호모 이코노믹스를 넘어선 인간이다. 

  신자유주의의 연속적 바통을 이어받은 이명박 정부의 지배적 가치관에 대한 균열은 이러한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윤보다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 신자유주의 정책은 광우병으로 인한 죽음의 불안을 야기하고 삶을 반성하는 긍정적 측면으로서 등장하여 기존의 가치관을 균열내는 촛불의 항쟁으로 전환된 것이다. 여기서 죽음의 불안은 자아 중심적 영역의 틀을 깨고 연대를 위한 그리고 이를 위한 전제로소 타인의 죽음을 위한 자아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이는 자본주의적 걱정인 호모 이코노믹스만이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존재라는 본래적이고 실존적인 불안에 공감하는 인간 존재의 규정 영역이 확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잠재적이건 현실적이건 간에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이렇듯 자신을 넘어 타인에 대한 걱정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우리는 광우병만이 이러한 본래적 걱정과 불안에 들어가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바로 우리네 삶을 지배하는 노동하는 가난한 계급으로의 전락과 언제든지 그 속에서 삶을 위협하고 있는 권력의 총구 앞에 우리 모두는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삶을 공감(sympathy)한다는 것은 이러한 우리 모두에게 강제적으로 노출된 생존의 위협에 대한 고통을 나눈다는 것이다. 이윤을 낳지 못하는 행위를 배제하는 원리로부터 비생산적 인간을 배제한다. 이때 늚음이라는 자연성은 천시되어야 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크리스트교는 신이 지지하는 인간중심주의이듯 신자유주의의는 자본이 지지하는 인간중심주의이다. 자본이 지지하지 못하는 인간은 여기서 철저히 배제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배제된 또는 생산 활동에서 배제된 인간들은 자기 창조(autopoiesis)적인 ‘가능성의 존재’이다. 이는 존재를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질 존재로 보는 시각이다. 또한 이러한 시각은 운동을 외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내부에서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촛불 항쟁이건 생존을 위한 투쟁이건 모든 저항은 자신을 파괴하는 바이러스에 항체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과정에서 항체의 형태는 그 모양을 촛불로 거리의 정치로, 물리력을 동반한 투쟁으로 바꾸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서 저자들은 촛불 항쟁을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진전된 운동으로 보고 있다. 존재의 가능성이 그러하듯이 촛불 항쟁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신자유주의라는 지구적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만들어 자기 생성하는 것이다. 보부아르가 말하듯 인간답게 만드는 문화적 생활을 선사한 문명도 ‘자본’앞에서 좌절해버린 것이다.


국가 권력의 나르시스트, 이명박 정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서 몇 몇의 저자들은 국가의 발생과 그 권력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내용의 확인은 독자들의 열린 사유를 위해 정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내가 이 글을 읽으며 들었던 단상들을 피력하는데 국한하고자 한다.     국가 권력의 발생 원인이자 결과인 지배와 공포의 자기애는 타인을 통해 인식된다. 이는 민심이 곧 타인의 거울(라캉)이라는 것이다. 인간적 삶을 황폐화시키는 국가 권력은 자신의 권력을 대상화하지 못하는 ‘일차원적’ 권력이다. 이러한 권력 속에서 청소년들은 꿈이 없는 현실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의 이철호는 바로 이러한 현실에서 촛불 소녀가 등장했음을 주장한다. 우리는 더 나아가 나르시스트적 권력은 결국 자기애를 타인을 통해 실현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기애를 자본을 통해서만 실현하는 현실적 정책들 속에는 우리는 타인을 통해 자기애를 실현하지 못하고 죽어간 나르키소스의 죽음으로 핀 수선화의 전설을 가슴속에 간직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죽음으로 핀 수선화의 전설은 21세기 인간의 죽음으로 핀 자본화의 전설이 살아나 현실을 지배하고 실현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억견(doxa-자기 혼자의 판단)에 빠진 권력의 전형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이 권력이 지배적 권력을 위한 권력으로 치닫고 있을 때 촛불을 든 이들은 국가권력은 다중(multitude)의 권리, 역량이다. 정치사회의 코나투스(conatus)는 곧 다중의 권리 실현이라는 참된 깨달음(episteme) 보여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존을 위협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에 대한 반응은 건강권의 욕망이다. 이는 인간의 내부이자 외부에서 작용한다. 생명의 보존과 지속이라는 측면에서 내적이고 외부 환경이 인간의 건강권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라는 측면에서 외적이다. 건강권을 위협하는 외부로서의 사회를 건강을 배려하는 사회로 만들 것, 이것이 샤르트르가 말하듯 자신 스스로 선택한 쪽으로 자기를 구속하는 것, 곧 자유이다. 자기를 구속한다는 것은 바로 책임을 말하는 것이다. 촛불을 든 이들은 바로 이러한 자유의 실현을 위한 자기 책임의 실현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는 현재만이 아닌 미래의 민중을 내포하는 것이다. 즉 오늘날의 촛불은 과거의 촛불의 총결산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촛불을 담고 있는 것이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샤르트르의 주장은 국민은 국가 권력에 복종해야 한다는 명제에서 현실적 개인의 연대가 자기를 창조한다는 명제로 번역될 수 있다.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따른 정치 형태와 정치 권력의 선택과 실현을 위한 행동이다.

  천박한 정치가 규정하는 내재적 선택을 일반적 선택의 원리가 관통하는 정치 형태로 지향되고 있음을 깨닫는 정치적 경험인 것이다. 자발적 복종에서 벗어난 자발적 저항, 자발적 창조, 희망으로 도약하는 현실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지 못하는 권력은 이미 그 권력 자체의 기원을 스스로 저버린 것이다. 촛불을 바라보는 또는 참여한 이들은 자신들의 자발성에 강조점을 두면서 기존의 운동과 차별화한다. 이는 표준적 인간을 벗어난 운동으로서 자발적 의지에 따른 행동이다. 이러한 행동은 이미 비자발적 의지를 생성하는 조직의 균열을 통해 가능해 진다. 이러한 조직의 균열은 국가 권력이 속죄양을 통해 폭력을 자행하는 것이 허구적임을 폭로하면서 드러난다. 즉 국가 권력은 속죄양(scapegoat)2)에 상응해 배후자,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 권력은 무저항적 인간만을 용인하는 사회를 구축하는 것으로 그 이외의 인간을 배제하는 단결의 권력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촛불의 현장에 있었던 이들이 다들 공감하듯이 촛불의 거리에는 현재의 자신을 뛰어넘고자 하는 힘이라 할 수 있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에로스와 이익이 없어도 희생하는 아가페가 공존하여 결합되어 있었다. 자발적 저항을 몸소 실현하고 있는 사람들과 이와 더불어 배고픈 이들을 위한 김밥과 목마른 이들을 위한 물 한모금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 중심성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현실 권력과는 정 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촛불이 있어 그 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반대의 길은 간접민주주의의 길을 벗어나 적극적인 정치적 참여로 이행하는 길을 의미한다. 사회철학적으로 말하면, 이미 홉스는 죽음의 공포를 통한 사회계약을 주장하는데 이때는 저항권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 독립선언에 있으며 간접 민주주의의 기초를 마련한 로크는 저항권의 일부를 승인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한계는 정치적 무관심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 루소는 정치적 참여를 주장한다. 일반의지를 통한 사회계약은 정부를 국민의 사용인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적극적인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정치적 참여에 적극적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 길에 있는 것이며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주권자는 국가라는 보편자의 특수자로 인식하는 것은 중세적 발상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종래의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수직적 관계였던 반면에 현재는 대등한 관계로 전화되고 있다. 치료에 대한 종래의 관계는 의사가 환자의 상태와 그 상태에 따른 결정권을 주도하거나 환자가 의사에게 “의지하게 만들어야 한다.”3)하게 만든다. 이렇듯 국가권력과 국민의 관계는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처럼 결정권이 의사에서 환자로 옮겨지듯 정치적 결정권또한 국가에서 국민으로 옮겨져 사회의 치료의 주체로 나가고 있는 역사적 과정의 현장에 우리가 있는 것이다. 현실의 국가권력은 이미 중세로 후퇴하고 있다. 미래적 존재로 전진하는 역사의 동력으로 그 역할을 하는 촛불의 항쟁은 이러한 진부적인 역사관을 전도시킨다.

  직접적인 민주주의의 소통과 현실화라는 시냅스를 절단하려는 국가권력과 보수언론에 맞서 뉴런의 이음매인 시냅스는 마치 ‘전세계를 둘친 거미줄’4)처럼 커지고 증가한다. 히터 레셀의 말처럼 “글로벌 브레인”은 “역사가 낳은 최대의 대중참가형 매체”5)이다. 그런데 인간의 인간적 삶을 재창조하기 위해 권력의 형태를 역전시키기 위한 활동은 거미줄로서의 인터넷만이 아니다. 거미줄에 의존한 거미는 거미줄이 끊어지거나 그로부터 벗어나면 자신의 활동의 장소를 상실하여 죽음에 직면한다. 지상의 거미는 끊임없이 지상을 배회하며 생명을 이어 나간다. 생명의 비약(엘랑비탈,elan vital)은 창조적 진화속에서 자신과 외부를 끊임없이 재창조한다. 이 역사 속에 촛불의 비판은 역사의 진보의 동력으로 존재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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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다시 읽기 1 - 식민지적 사유의 전복을 위해
최형익 외 엮음 / 메이데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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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전 다시 읽기1>의 관심 영역은 정치학, 사회학, 철학이며 9명의 저자가 12편의 저작을 비판적으로 읽고 있다. 이 책의 전체적인 주제는 부제에서 드러나듯이 “식민지적 사유의 전복” 이다. 서문에서 최형익 선생은 “주류적 해석 방식에 도전하기” 위한 “새로운 학적 사유를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라 밝힌다(12-13쪽). 식민지적 사유는 불변의 실체를 전제하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자신의 지반으로 삼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사유에 대한 저항과 탈식민지적 사유, 식민지적 사유에 대한 전복을 꾀하고 있다. 이 책은 더욱이 현재 미국 중심의 세계화의 광풍 속에서 무방비적이고 무비판적인 주류 사유에 대한 반성을 통해 새로운 사유를 모색하고 규격화된 사유 틀을 벗어나려 한 점에서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고정된 틀에 얽매인 사유의 구속은 학문언어가 우리말이 아닌 풍토에서 서구 언어에 대한 무조건적인 권위를 인정하고자 하는 허구적 권위에 대한 갈증이 깔려 있다고 할 것이다.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지도 않은 소크라테스의 말을 온 국민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해프닝은 학문 번역어의 종속성을 나타내는 단적인 예이다.

먼저 나는 이 책에서 저자들이 해당 사상가의 주장을 요약한 내용을 재차 언급하지 않겠다. 그리고 저자들의 핵심적 문제의식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저자들이 사상가들의 주장을 요약하는 작업은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과 독자에게 분석 및 비교를 좀 더 쉽게 하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고전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독해는 또 다른 하나의 독해일 뿐, 하나의 고정된 시각으로 규정할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사유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은 하나가 아니라 복수의 열린 가능성의 문이며, 그 문을 통해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 넓은 고전의 바다일 것이다.

2.

  최형익 선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서평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오독한 해석가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나아가 귀족적 시민이라는 일부 인간을 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절반의 정치적 기획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온전한 기획의 현실화를 주장한다. 이러한 현실화의 근거의 단초를 그는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동화된 생산 체계의 구상”에서 찾고 있다(45쪽).

김경희 선생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알뛰세르 논의에 기반해 비평하고 있다. 그것은 마키아벨리가 국민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인민의 관점’이라는 계급적 입장에서 바라보았다는 것이다(63쪽).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알뛰세르는 계급투쟁을 역사의 원동력으로 파악하지 않고 귀족과 인민 간의 계급투쟁을 계급타협에 가까운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본다. 국가의 혼란 속에서 우선성은 인민의 우선성이 아니라 국가의 우선성이었다는 것이다.

이종영 선생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기존의 번역이 ‘비센샤프트’를 ‘학’으로 옮겼다는 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따라서 그는 ‘비센샤프트’를 ‘과학’으로 옮길 때에만 <정신현상학>이 과학적 인식에 이르는 의식의 경험에 대한 책으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에 과학 개념이 새롭게 부각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때 과학은 대상에 대한 주관성을 철회하고 ‘개념’을 통해서, 노동을 통하여 실질적 인식에 도달하고 사물운동의 내적인 필연적 연관을 포착한다. 또한 과학은 자연적 의식과 대립하며 분석 대상을 전체성 속에서 체계적으로 포착한다.

송태수 선생은 쏘스타인 베블렌의 <유한계급론>은 당시 미국 유한계급의 속물주의와 겉치레, 허례허식에 대해 신랄하게 공격했으며, 유한계급의 모든 행동의 동인은 “나에게 돈과 여유밖에 없다”는 것을 최대한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한다고 한다(110쪽). 이러한 베블렌의 금력과시 사회에 대한 분석은 “‘가공자본’의 지배력이 무한히 커지는 현실”에서 분명히 일반성을 갖는다(120쪽)고 한다. 하지만 베블렌이 유한계급에 대한 통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유한계급의 보수성에 대해 계급적 이해관계에 근거해 논증하지 않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대목이라고 지적한다.

정병기 선생은 로베르트 미헬스의 <정당사회학>은 미디어라는 새로운 변화의 모습이 예측되지 못하는 시대적 한계가 있음에도 “현대적 개념들이 이미 당시에 모두 통찰”되었다고 한다(122쪽). 미헬스는 서유럽 사회주의 정당들의 내부구조를 당내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연구하는 것이 주된 관심이었다. 그 내용은 “선출된 자가 선출한 자들을 지배하고, 수임자가 위임자를 지배하며, 대의원이 대의원을 선출한 사람들을 지배하도록 만드는 것은 조직 그 자체이다.”(126쪽). 미헬스의 주요 분석 대상인 좌파계급정당들도 부르주아화의 경향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미헬스는 좌파조직에 대한 비판을 통해 당이론의 수정에 기여한 측면에도 불구하고 카리스마의 등장까지 포함하는 과두제의 철칙론을 주장하여 과두제와 민주화가 상호 반복하는 순환론적 역사관에 봉착한다. 그의 과두제 철칙론은 “대중의 무능력과 어리석음을 조직의 과두제화를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변하지 않는 요인으로 간주”(142쪽)하기 때문이다.

이호근 선생은 칼 폴라니의 <대전환>은, 시장지상주의와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맹신을 비판하고 있다고 한다. 폴라니는 시장분석을 경제법칙론적 이론의 틀에서가 아니라 독자적인 시각, 즉 역사 발전을 추동하는 특정한 주체가 등장하지 않으면서 시장경제에 대한 대항 축으로 ‘사회’ 또는 ‘사회의 자기보호’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분석한다(150쪽). 이는 역사발전의 기계론적 해석에서 자유롭다는 분석의 특성을 갖는 동시에 심화된 계급분석이나 사회구조분석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한계점을 갖는다(151쪽). 그럼에도 저자는 시장의 지배가 날로 강화되는 현재에 그 시장지배에 저항하는 사회의 도전은 그 사회의 최후조처가 될 것이라고 경종을 보내는 폴라니의 해석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본다.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혁명의 사회학>에 대한 양권석 선생의 서평은 파농의 사상을 식민지 해방운동의 맥락, 즉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구식민주의의 연장선에서 파악하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주변부 민중들의 자기 해방과정을 식민지 해방운동의 역사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파농 읽기와 해석의 자리를 재 주장하려는 것이다.”(166쪽) 왜냐하면 자본주의 세계화의 역사가 전개되는 과정은 식민주의 역사의 전개과정이며 따라서 식민주의 역사도 그것에 대항한 식민지 해방운동의 역사도 이미 끝난 과거가 아니기 때문이다(173쪽). 저자는 파농의 비판의 핵심 주제가 ‘식민지 부르주아지 민족주의’이며 그의 민족이해는 본질적이며 절대적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민족을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단일한 정체로 형성해, 세계 자본에 대항하는 방식을 많이 벗어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민족이나 민중의 이해는 단일한 정체가 아닌 다양한 정체들의 관계적 공존 형식으로 이해해야 하리라고 본다.”(195쪽).

이구표 선생은 푸코는<감시와 처벌>에서 지식과 권력 간의 상호 접합이라는 관행들 간의 전략적 연계관계들을 밝혀냄으로써 감옥 배치의 가시성을 드러낸다(209쪽)고 한다. 푸코에 따르면 근대 개혁가들이 구체계의 신체형 폐지를 요구한 직접적인 원인은 “민중의 저항과 사회 질서의 전복에 대한 공포”(212쪽) 때문이다. 근대 계몽의 개혁가들에 의한 새로운 사법 체제는 예방적, 공리주의적, 교정적 표상 모델에 입각하여 신체가 아니라 마음을 그 작용 지점으로 삼으며 형벌의 표상을 통해 범죄나 저항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제약적 코드들을 자동적으로 활성화시켜 스스로를 바로 잡는 법적 주체로 구성하도록 만든다. 저자는 푸코의 저작을 단지 권력에 대한 이론서가 아니라 “항상 특정한 권력 형태에 대한 특정한 저항 형태의 출발점”(221쪽)으로 읽는다. 푸코의 저작은 투쟁과 저항을 더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한,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전략적 도구(222쪽)이며 “감옥과 규율 권력의 궁극적 패배에 관한 이야기”(225쪽)이다.

들뢰즈․가타리의 <분자혁명>, <안티 오이디푸스>, <천의고원>에 대해 권혜원 선생은 정치적이고 윤리적 관점에서 독해하고 있다. 그는 미시파시즘에 대한 발견과 분석을 정치 행동에 결합해야 하는 이유를 거시파시즘에 대항하는 집단조차 은연중에 파시스트적 삶의 양식과 어법을 존속시키면서 거시파시즘에 구조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주체성의 양식을 창조하는 문제”는 소수자화의 관점과 연계된다(256쪽).

3.

편집자는 이 책에서 여러 사상가의 저작을 관통하고 있는 문제의식을 “식민지적 사유의 전복”으로 독해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글 전체를 관통하는 단어로 떠오른 것은 ‘저항’이었다. 식민지적 사유의 전복을 위해 저자들과 저자들이 다루는 사상가들은 기존 사유와 지배 질서에 저항하고 있다. 식민지적 사유의 전복을 위한 저항적 사유는 한편으로는 사상가들을 새롭게 독해하고자 하는 문제의식 속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저자들이 다루는 사상가들의 사유 속에 녹아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책은 ‘순수하게’ 새로운 독해는 아니다. 왜냐하면 저자들은 사상가들의 원래의 의도를 왜곡한 기존의 해석을 비판하면서 다시금 사상가들의 저작 또는 비주류적 해석자들을 근거로 원래의 의도에 근접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먼저 “식민지적 사유의 전복”이라는 초점에서, 주류적 해석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인간을 더욱 가혹하게 착취하고 더욱 세밀하게 지배․통제하는 현실에 대한 반성과 비판 그리고 변혁적 실천이 시급히 요청되는 현실 속에서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사상가들의 사유는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의식을 던지고 있다.

이 책은 기존의 해석자들에 의해 덧칠해지거나 일반화되고 규격화된 이론을 무방비 상태로 수용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고 있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침묵하는 지배적 사상과 질서에 반기를 들고, 지배 권력의 거시적․미시적 정치 전략의 분석을 통하여 굴절된 인간의 모습을 복원시키고자 저항하는 사상가들을 다시금 현실로 불러내고 있다. 우리의 현실 세계가 사상가들의 문제제기를 여전히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한에서, 저항하는 사상가들의 문제의식은 그들만의 문제로 국한되는 특수하고 개별적인 문제의식이 아니다. 물론 이 책은 혁명가라 할 수 있는 사상가들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사상가들의 시대적 한계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나아가 새로운 사유가 안고 있는 문제점도 등장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한계점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그 가치를 역사 발전의 밑거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과거 사상가들을 새로운 사유의 조력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이 고전을 읽는 과제일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가 노예의 철학자가 아닌 새로운 공동체의 정치적 기획자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와 만날 수 있듯이, 사상가들은 우리의 현실과 여전히 소통가능하며 함께 호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죽은 고전(故典)이 아닌 옛날의 것이 현재까지 가치 있는 고전(古典)으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현실과 만나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전은 연대기적 고전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이며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맑스를 읽으면서 맑스가 환경문제를 간과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시대적 상황에 우리의 시각을 확장하지 않고 시대적 한계를 현재 규범으로 비판하는 것일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 책에 흐르는 공통된 문제의식을 ‘저항’으로 읽었다. 이때 저항은 서구적 권위를 추종하는 학문적 사유의 종속에 대한 저항이며, 기존의 지배질서에 대한 정치적 해방을 위한 저항이자 일상적 삶에 침투한 지배의 권력에 종속됨을 거부하는 저항이다. 저항적 사유의 목적은 부단한 반성적 음미과정에서 의도적 또는 타의적으로 감추고자 했던 역동적인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저항적 삶의 과정을 질식시키는 정형화된 사고의 틀과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새롭게 형성하는 것이다. 변화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전제를 부여잡는 것은 일시적이고 가상적인 안정성을 확보할 수는 있지만 언제나 보수와 억압을 추종한다. 지금까지의 사유의 저항과 실천의 저항은 이 모든 허구적 실체의 현실화에 대한 비판과 파괴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유의 종속에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사유는 저항하면서 깨어나고 저항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저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계간 <진보평론> 가을, 33호에 실은 서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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