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에 강한 인상을 남긴 몇 편의 영화 중에 왕샤오슈아이 감독의 <나날들冬春的日子>(1993)이라는 작품이 있다.

 

영화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스토리가 재미있다거나 장면이 아름답다거나 하는 좋은 이유에서가 아니다.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지겨운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나날들>에서는 별것 없는 초짜 예술가 부부의 반복되는 일상을 보여준다. 총 상영시간 80분 동안 기승전결 구조를 갖춘 스토리 하나 없이 밥 먹고, 그림 그리고, 빨래하고, 친구 만나고, 잠자는 따위의 소소한 일들이 반복된다.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젊은이들의 현실을 가감 없이 담아냈다는 의미, 이 영화가 이후 중국 언더그라운드 영화에 디딤돌이 되었다는 영화사적 의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지겨워서 보는 내내 주리를 틀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이 영화가 떠오른 것은 영화만큼이나 최근의 내 삶이 너무 지루하게 느껴져서다. 오늘도 또 육아 전쟁이구나 싶어 한숨이 나오는 아침, 아기 울음소리에 신경이 유독 예민해지는 오후, 말똥말똥한 아기에게 제발 더 자라고 짜증이 버럭 나는 밤이 요 며칠 지속되었다. 육아 권태기가 찾아온 거다.

 

영화 <나날들>이나 나의 나날들이 지루한 것은 바로 반복때문이다. 하루에도 별 특별할 것 없는 똑같은 일이 수차례 반복되고, 그 하루가 계속 되풀이된다. 물론, 영화 속 예술가들도 현실 속 엄마도 바쁜 하루를 보낸다. 특히 엄마의 매일은 쉬는 시간도 하나 없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바쁜 업무에서 성취감을 느낄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리고 노동의 양, 리듬, 강도를 조정하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 타인(아기)에게 있다는 것도 문제다.

 

변화 없는 일과가 계속되면 어느 순간 권태가 찾아온다. 육아에도 권태를 느낀다고 하면 엄마 자격이 없는 것 같이 들리겠지만, 누구든 아무런 변화 없이 같은 일을 계속하면 지루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엄마도 예외는 아니다.

 

고되지만 지루한 다림질하는 여인들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가 그린 <다림질하는 여인들>에도 반복되는 매일을 지겹고 피곤해하는 여인들이 등장한다.

 

 

에드가 드가, <다림질하는 여인들>, 1884~86

 

 

파리가 한창 활기찬 도시의 모습으로 단장하고 있을 때 좁고 어두운 세탁실에서 다림질하고 있는 여인들이다. 작품 속의 한 여인은 잠까지 잔뜩 오는지 뒷목을 잡은 채 하품을 하고 있다. 매일 같은 곳에서 똑같은 단순노동을 하려니 하품이 쩍쩍 나오도록 지루할 수밖에 없다. 고단함과 지루함이 그림에 잔뜩 묻어 있다.

 

이 세탁부들은 한가해서 권태를 느끼는 것이 아니다. 당시 파리에서 세탁부의 일은 고되고, 바쁘고, 많았다. 그러나 치열함 속에도 권태는 끼어든다.

 

다림질하는 여인이 무료함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빨랫감 옆에 놓인 압생트다. 파리의 많은 노동자들이 즐겨 찾던 싸구려 술. 우리나라로 치면 소주에 비유할 수 있을까? 한 번 다림질하고, 목을 축이고, 또 다리미를 밀고. 압생트를 마시는 것은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을 달래주는 그들 나름의 방법이었다.

 

무심히 빛나는 Day Light

 

작가 나빈(1983~)의 그림에도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들어 있다. 그녀는 우리의 하루 중 한 순간을 포착하여 그림을 그린다. <Day Light>에는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거실 한편에서 빨래를 말리고 있는 장면이 담겨 있다.

 

 

나빈, <Day Light>, 2014

    

 

빨래를 하고 말리는 일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되는 일과의 한 부분이지만, 어째 나빈의 그림에는 지루함이라는 단어보다 평안함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것은 그녀가 사용한 빛나는 노란색 때문이다. 햇빛을 머금은 것처럼 밝은 노랑의 빨랫감이 탁탁 털어져서 가지런히 널려 있는 모양새, 환하게 들어오는 햇빛의 느낌,

 

또 작품을 시원하게 만드는 빛나는 노랑과 시원한 파랑의 대조가 보는 이의 마음을 산뜻하게 만든다. 작가의 이름 나빈은 아름다울 에 빛날 을 써서 아름다운 빛이라는 뜻인데, 작가의 이름과 빛으로 충만한 작품이 참 잘 어울린다.

 

나빈의 그림을 보면 일상이란 이렇게 찬란한 것이구나하는 긍정적인 생각이 든다. 별일 없는 우리의 일상이, 실은 그녀의 작품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아기에게 젖병을 물린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의 오늘도 그렇지 않을까? 다만 우리는 늘 그 공간 안에 있어서 일상의 찬란함을 보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만의 육아 권태기 처방전

 

육아 권태기를 보내며 권태기 극복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사람들은 보통 권태기에 빠진 연인들에게 새로운 일을 시도해보라고 추천한다. 육아 권태기도 비슷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몇 가지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보았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역시 쇼핑. 가장 지겹게 느껴졌던 몇 가지 물건을 새로 샀다.

 

낡은 옷을 정리하고 아이와 나의 새 실내복을 마련했다. 하루에도 아이에게 수차례 읽어주어 나도 아이도 지겨워진 동화책을 대신할 새 책도 몇 권 샀다. 여기에 더해 한동안 듣지 않던 음악을 틀어놓거나 새로운 산책로를 개발한다거나 옆 동네 놀이터를 방문하는 것 따위의 일들도 시도했다. 땀을 뻘뻘 흘려가며 가구 배치도 새로이 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지겨워 죽겠다는 그 느낌은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다. 새 물건들이나 새로운 일과보다는 오히려 시간의 힘 덕분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버텨내야 하는 지겨운 시간을 새로운 무언가로 채우는 것은 꽤 괜찮은 권태기 극복 방법인 것 같다.

 

육아는 앞으로도 쉬지 않고 계속될 테고 권태는 분명 슬그머니 또 찾아올 거다. 잠깐 모든 걸 정지시키고 쉬었다 가고 싶은 마음도 들 테고 아이가 커갈수록 더 자주 무기력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나만의 육아 스트레스 해소 방법을 개발해두면 좋겠다. 운동이든 꽃꽂이든 독서든, 뭐라도 내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고 삶에 활력을 줄 수 있는 것들을 마련해두는 거다. 그러면 또다시 부정적인 감정이 찾아왔을 때, 멋지게 물리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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