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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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죽음의 종류는 셀 수 없이 많다.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종류의 삶이 있듯이,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종류의 죽음이 있다. 그렇기에 자유죽음의 모습 또한 각기 다르고,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에는 각 개인이 겪었을 수많은 다른 모습의 삶이 담겨있기에 이를 납작하게 하나의 개념으로 뭉뚱그리는 것은 그리 적절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흔히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떠올리면 우울감을 견디기 힘들어 충동적으로 선택하는 자살을 연상하곤 한다. ‘자살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 우울, 충동, 불안, 동정, 연민 등의 감정들을 불러 일으킨다. 급기야 금기어를 완곡어로 돌려 말하듯 우리는 자살, 혹은 자유죽음을 단어 그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극단적 선택’, ‘나쁜 생각등으로 돌려 말한다. 물론 자살이라는 단어 자체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사실이다. ‘스스로 죽기를 원하는 것이지, ‘스스로 죽이기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이 단어조차도 빙빙 돌려 말하며 우리는 자유죽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이야기하기 꺼려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알아야 삶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기에, 우리는 수많은 죽음의 형태 중 하나인 자유죽음에 대해서도 제대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우리 주변의 누군가가 스스로 죽고자 한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그를 설득하려 할 것이다. 주변의 소중한 사람이 스스로 죽겠다고 하는데 그래, 그것이 너의 결정이라면 그렇게 하렴. 난 너의 선택을 존중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일까? 정말 그 사람이 소중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사람이 죽으면 겪을 자신의 충격과 슬픔이 두려워서일까? 혹시 사회적 인식에 따라 자살은 나쁜 것이라고 세뇌당했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거부감을 느껴서는 아닐까? 사회적으로도 자살을 막기 위한 여러 조치 및 제도가 있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 자살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단어를 검색하면 가장 상위에는 자살 예방을 위한 상담 센터의 전화번호가 뜬다. ‘자살예방법이라고 불리는 법률에서는 자살 유발 정보를 인터넷에 유통할 경우 형사 처벌 하고 있으며, 지금은 철거되었으나 한때 마포대교에 자살 방지를 위해 문구를 써넣기도 했다. 비록 효과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럼 다시 이 상황으로 돌아와보자. 만약 주변인의 자살을 말리려 한다면, 어떻게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을까? 그 전에,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책에서 의사가 자랑스러워한 구조 활동이라는 게 나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150p)”라는 구절을 보며 얼마 전 본 극단 선택시도한 시민버스기사가 구했다라는 기사가 떠올랐다.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사람을 구조했다는 기사는 종종 올라오곤 한다. 그러나 과연 극단적 시도라는 표현이 적절할까? 충분한 심사숙고를 거친 후 자유로운 의사 표현으로서 음을 선택했다면, 이성적인 행동이 아닌가. 또한 만약 그러한 사람의 뜻을 저지했다면 구조라는 표현보다는 제지가 어울리지 않을까. 물론 스스로 죽으려는 사람을 구한 사람들이 생명을 살리겠다는 귀한 뜻을 가지고 용감하게 행동했다는 점은 당연히 존중한다. 그러나 자살 실패자라고 할 수 있는, 그들 또한 자신을 구조한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그들을 온전히 존중할 수 있을까? 마음 깊이 원망하진 않을까?

 나는 그동안 자살하면 안되는이유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책에서 사용한 표현을 빌리자면 죽음에 이끌리는 성향을 갖고 태어난 덕에 끊임없이 자유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생명체로서 느끼는 생존의 욕구를 저버리진 못했기 때문에 내가 자유죽음을 택하고 싶은 이유, 그리고 자유죽음을 선택하면 안 되는 이유 양쪽 모두에 대해 고민해왔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스스로를 설득시킬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면 안 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그 명확한 답을 찾진 못했으나, 적어도 내가 그동안 자유죽음을 둘러싸고 막연하게 쌓아오던 신화를 무너트리고 그에 대해 정확히 고찰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이 책은 자유죽음에 대해 덮어놓고 비난하기보다는 다시 한 번 성찰해보기를 권한다. 물론 죄를 저지른 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죽음, 이성적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선택하는 죽음 등도 모두 자유롭게 허용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양한 종류의 자유죽음을 모두 통틀어 금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자유의 땅을 결코 밟을 수 없음에도, 순간의 자유를 체험하고자 손을 내려놓은 사람들의 선택은 개인의 선택이자 결정으로 존중해주어야 한다. 확대된 개념의 존엄사로서의 자유죽음을 고려해보아야 한다. 수없이 많은 복합적 원인과 사고의 결과인 자유죽음이라는 선택은 단순히 하나의 개념으로 뭉뚱그려 무조건적으로 반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죽음을 권장한다거나, 자유죽음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추구해야 할 행위로 삼고자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자유죽음을 똑바로 직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기를 금기시했기 때문에 발생했던 수많은 문제들이 있다. 자살에 대하여를 쓴 사이먼 크리츨리가 말했듯,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자살에 대해 말할 언어가 없었. 우리는 자유죽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이 옳거나 혹은 옳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유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삶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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