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대로 제발트는 내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제발트와의 여행에 올라탔을 때, 나는 이 여행이 순조롭지 않을 거라고 이미 수도 없이 다짐한 뒤였다. 내가 갖고 있었던 제발트의 첫인상, 그리고 그의 여행기는 난해했고,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섞어놓은 그럴듯한 풍경에 현기증과 무수히 많은 감정들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한 번 쯤은 제발트와의 여행에 성공하리라 생각했고, 그렇게 번번이 하차를 하고야 말았던 승객이자 독자였다.
제발트는 지금은 구하기 힘든, 헤이스팅스 자동차 박물관에서 마주할 것만 같은, 작동(하기도 어렵겠거니와)할 엄두조차 못 내는 고풍스러운 증기자동차 같기도 했고 세계 최초의 탑승형 거대 로봇 캐릭터인 ‘마징가 제트’에 버금가는 이름처럼 들리기도 했으며, 막연하게 나는 그의 이름을 떠올릴 때면 천공을 흰 꼬리를 남기며 가로 지르는 하나의 로켓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어쩐지 그 이름을 듣고 있노라면 나는 자연스레 그가 독일 출생의 작가라는 사실과는 무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던 것이다. 남아있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실이나 위엄을 지니고 있어 나도 모르게 그 앞에서 유구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상상’을 하고야 마는, 불가항력적인 힘을 거부할 수 없었다. 제발트 본인인지 앞서 제발트와 동행했던 또 다른 히치하이커인지 모를 ‘나’의 1992년 8월, 영국 동부의 써퍽주로 향하는 여행에 나는 그렇게 동행하게 됐다. 자신과 동료들의 만남, 그다지 다를 게 없는 일상 속에서 「멜랑콜리아1」과 같은 사료들에 매료된 것은 ‘나’가 제발트와 여행하는 자이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시작된 이 여행은 토마스 브라운의 유골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면서 목적지도 방향도 알 수 없는 부유하는 “기구(氣球)의 여행”으로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꿈으로, 영국으로, 독일로, 다른 이들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가능한 것 역시도 그러한 이유에서일 테다.
독서와 여행은 나에게는 오랫동안 하나의 비슷한 성질을 지니고 있었는데, 바로 ‘목적지’가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그랬다. 과정이야 헤맬 수도 혹은 중도에 포기하고 일상으로 돌아와버릴 수도 있는 다양한 변수를 지니고 있으나, 우선 출발을 하겠다라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러했고 그렇기에 언젠가는 ‘목적지’에 다다라 이 여행을 과거의 경험으로 덮어둬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흡사하다고 느껴졌다. 제발트로/와의 여행에서 여러 번의 하차를 경험한 것도, 이 여행이 쉽지 않으리라고 느낀 것 또한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겠다. 예상 경로를 벗어나거나, 내가 보고 있는 풍경을 허구와 꿈, 또는 합승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누군가의 삶을 복기하는 방향으로 바꿔버리니 이는 가히 로켓급의 속력을 지녀 스쳐가는 풍경같기도, 또는 상영관을 잘못 찾아온 관객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듯한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지와 두려움을 함께 동반한 탓에 이러한 체험의 재미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 아니 변명을 슬쩍 해본다.
‘나’가 구입한 안내서에서 보았다고 말하는 요한 마우리츠 총독의 저택의 좌우명은 “지구 끝까지”에 잘 들어맞는, 지구의 가장 먼 지역의 기적들까지 반영하는 지리학적 저택(102쪽)인데, 그 저택을 본 이들은 “공동체의 권력이 이제 얼마나 먼 나라까지 확장되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고”(같은 쪽) 말한다. 모든 것들이 다 갖춰져 있는 크루즈에 타고 있는 것 같았던 나는 이 부분에서 어쩐지 제발트가 총독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기도 했는데, 분명 영국 동부로 향한 이 여행이 방향을 정처 없이 바꾸면서 ‘지구의 전세계 탐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암스테르담과 노리치 사이에 난 서쪽의 들판을 따라 가면서, “뉴펄랜드 위든, 저녁 무렵이면 보스턴에서 필라델피아까지 이어지는 혼잡한 빛 위든, 진주층처럼 은은한 빛을 발하는 아라비아의 황야든, 아니면 루르 지방이나 프랑크푸르트 지역이든, 어느 곳이나 항상 사람은 전혀 없고 오로지 사람이 만들어놓고 그 안에 숨어버린 것들만 남아있는 것처럼”(112쪽) 보인다는 인상은 이 체험 그 자체이기도 했고, 내가 번번이 하차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두려움’이나 ‘미지’와 같은 추상적인 이유가 구체적인 활자로 풀어지는 듯한 장면이 되어주었다. 애초에 제발트의 여행은 새로운 이를 만나, 낯선 곳에서 낯선 감정이나 체험을 얻길 원하는 그런 목적과는 달리 시간의 이동이자, 장소의 이동,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가 인지하고 보는 찰나의 순간이 아닌 “시선의 위조”일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기에.
박물관이나 전시회, 혹은 이방의 땅에서 무언가를 보고 느끼는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봐야 우주적인 관점에서는 굉장히 짧고, 그 아래에 쌓여있는 유구한 시간을 우리는 평생을 걸려도 전부 예측할 수 없다. 그 시간이 지나 살아있는, “살아남은 자들인 우리는 모든 광경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모든 것을 동시에 보면서도 실제로 현장이 어떠했는지는 모른다”(150쪽)는 것이 이 알 수 없는 여행이자 흐름의 동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우주적인 관점에서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하차한 히치하이커가 아니라, 이 모든 무구한 시간의 발생, 역사를 다 따라갈 수 없는 하나의 입자이자 모래알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내가 히치하이커라는 믿음, 또는 착각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제발트라는 기묘한 형태의 매개체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결국 제발트를 따라, ‘나’를 따라 간 이 길은 브라운의 유골에서, 이제는 하나의 모래알이 되어버린 그가 수집한 문서를 마주하는 것으로 끝이 보이는 듯 하다. 누에에서, 양잠업으로, 비단으로, 빅토리아여왕의 장례식에서 테크 공작부인이 입은 옷까지 그리고 우연히도 해부학에 관심이 많았던 의사인 토머스 브라운이 비단 상인의 아들이었음을 밝히면서, 그의 수많은 문서 중 하나의 기록인 네덜란드 장례 습속을 이야기한다. 망자들이 세상을 떠나는 길에 마음이 산란해질 것을 우려해 검은 비단으로 가리는 풍속에 대한 설명을 끝인사로 나는 제발트에게서 하차하게 되었다. 애초부터 운전대를 쥐고 있었던 것은 그이니, 나는 처음으로 ‘하차된’ 것이라고 보아야 옳겠다. 근데 어쩐지 이상하게도 이게 하차가 아닌 ‘불시착’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자동차도, 크루즈도 비행기도 상영관도 아닌, 그렇기에 어떤 모습으로든 불시에 나타나 나를 탑승하게 만들고, 탑승한 것조차 잊게 만드는 이 제발트에게 나는 또 다시 탑승하고, 하차하기를 반복하지 않을까.
긴 여행과 다짐 끝에도 나는 ‘제발트’의 올바른 사용 설명서는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불쑥 든 아직 탑승중일지도 모른다는 이 의심은 아마도 내가 세월이라는 풍화를 거쳐, 모래알이 되기까지 계속될지도 모르겠다 싶다. 그러니 이 안내서가 영 신통치 않다 싶으시면, 일단 주저 말고 탑승하여 보시길. 어쩌면 당신도 모르는 사이 이미 탑승중일지 모르니, 잘 다녀오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