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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기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평점 :
2025.07. 황정은, <작은 일기>.
“제가 자영업하고 있는데/계엄 났을 때/너무 무기력하더라고/그래서 (일)하다가 쉬고 나왔어요.” 이 말과 얼굴이 생각나 걷다가 울었다. 내게도 그 얼굴이 있다.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탄핵 집회에서 물을 나눠주며 말하다가 울음이 터진 그처럼 내게도, 불시에 그 밤이 떠오르면 생생하게 그렇게 갈라지는 얼굴이.
그와 내가 같은 날에 베였다. 우리뿐일까.
사는 곳도 이름도 얼굴도 다른 이 많은 사람이, 그 밤에 다 같이 베였다. (황정은, 작은 일기. 44-45쪽. *가제본)
2016년 겨울을 기억한다. 일정을 마치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침대 아래 앉아 몰래 해적방송을 듣듯 팟캐스트를 들으며 시류를 파악했다. 광화문 거리를 가득 채운 촛불, 통제된 도로 위를 거니는 무리들, 그 속에 있다가 어느 순간 뒤를 돌아봤다. 이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무정부 상태 같은 비현실적인 풍경이 하룻밤으로 끝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다행히 12월 9일, 박근혜가 탄핵됐다.
2024년의 겨울은 비슷한 듯 달랐다. 지난 대선 결과의 좌절과 그로 인한 혐오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감정들로 한동안 뉴스를 멀리하며 살았다. 12월 3일 난데없이 저녁에 본 기사를 보고는 욕지거리가 나왔다. 불과 몇 시간만에 제압된 그 멍청한 일이 실은 얼마나 무서운 거였는지 당시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로부터 7개월, 그간 정치에 무심했던 벌을 받는 기분으로 온갖 진보 방송을 동아줄 삼아 섭렵했다. 사실 동일한 사안을 두고 조금 다른 언어로 사견을 나누는 건데도 불안을 모면하려 닥치는 대로 들었다. 2025년 4월 4일, 해를 넘기고 꼬박 4개월을 채우고서야 윤석열이 탄핵됐다.
나를 안심시키는 말들을 찾아 매달리느라 정작 내가 잃어버린 말들, 결국 나의 언어로 채운 것이 아니어서 조바심을 떨칠 수 없었던 날들에 대한 기록. 할 말은 많지만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반년을 돌아볼 시기에 가장 비슷하게 나를 포갤 언어들이 필요했다. 그게 황정은 작가의 <작은 일기> 가제본 서평을 신청했던 이유였다. 한 사람이 쓴 것이지만 우리의 기록이기도 한 사건. 읽는 동안 몇 번이고 눈물이 차올랐고, 마음을 담아 밑줄을 그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과거 팽목항에 안 가냐는 질문에 작가는 “나는 내가 본 것을 글로 쓰는 사람이다. 내가 들은 것, 만진 것, 맡은 것을 글로 쓰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시선에 욕심을 담을까봐 거기 갈 수 없었다. 관찰의 눈으로 목격하고자 하는 눈으로 그곳을 볼까봐.”(174쪽)라고 말한다. 작가의 눈으로 보는 것을 두려워하던 사람이 여의도와 광화문, 그리고 집에서조차 목격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 목격에는 우리가 외쳤던 대상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담겨져 있다. 전광훈의 연셜을 틀어놓고 밤 산책을 하는 할아버지, 마이크를 잡은 페미니즘 활동가에게 냉담한 여성, 지하철, 길거리, 길바닥 온갖 곳에서 한 목소리가 되었다가 흩어지고 분열하는 모든 걸 시선에 담고 기록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2016년의 겨울과 2024년의 겨울이 결코 같지 않았던 것처럼, 더 많은 이들이 조금씩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진통을 겪는다는 생각을 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그 진통에 ‘작은 일기’가 주는 위로와 힘을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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