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하는 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8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박인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한 때 글렌 굴드에 열광했었다. 4년 전 쯤이었나? 바흐, 베토벤은 물론이고 겁나 파격적인 해석의 모차르트 소나타까지 글렌의 연주로 듣던 때가 있었다. 이 책도 그 때 쯤 샀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이 작가의 이름은 모른 채로, 글렌 굴드가 등장한다는 이유 하나로 이 책을 골랐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것 같다.

언젠가는 읽을 책이긴 했지만, 사실 이 책을 읽은 게 그리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다. 이 책은 소위 말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인 책이다. 나 역시 소설에서 등장 인물들의 심리 묘사를 읽는 걸 즐기지만, 이 책은 너무 그것에 집착하는 한편, 했던 말이 너무나도 많이 반복돼서 읽다보면 짜증이 날 정도다. 거의 대부분의 문장이 ‘~했었지, 나는 생각했다.‘, ‘였었지, 나는 말이 떠올랐다.‘ 로 끝난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가독성을 해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장(章)의 구분은 커녕 문단의 구분조차 없으며, 어떤 부분에서도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 구절을 찾으려면 거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뒤져봐야 했다.

한편, 우리나라의 ‘의식의 흐름‘ 기법의 대표적 작가인 이상(李箱)의 작품보다는 읽기 편했다. 이상의 작품은 내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고등학교 시절, 그 읽기 불편한 작품들을 해석하고, 그에 관한 문제들까지 풀어야 했기 때문이다. 요즘도 그런 문제가 수능에 나오나? 그런 짓이 무슨 의미가 있는 지 모르겠다. 지금 다시 읽어봐도 이상의 작품은 우리 말로 쓰였음에도 어려운 단어도 많고 읽기 불편하다. 시는 당췌 뭔 소린지 알아먹지도 못할 정도다. 나는 읽기 쉬운 글을 좋아한다. 때문에 읽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난해한 문체로 쓰인 그의 작품을 좋아할 수가 없다. 그의 작품을 명작이라 칭송하는 사람들, 교과서에 싣는 사람들의 생각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나는 원래 ‘의식의 흐름‘이라는 용어조차 혐오했었는데, 이 작품 덕분에 ‘의식의 흐름‘으로 쓰인 작품이 마냥 난해한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번역자 분이 많이 고생하신 덕택일지도 모르겠다.

뒤에 첨부된 해설에 따르면 이 작품에는 ‘아리아‘라는 단어가 2번, ‘골트베르크 변주곡‘이라는 단어가 32번 등장한다고 한다. 내가 지금까지 접한 글렌 굴드에 관한 작품은 32라는 숫자와 관련이 있는 작품이 많았다. ‘미셸 슈나이더‘가 쓴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도 32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글렌 굴드에 관한 32개의 이야기‘(프랑소와 지라르 감독)라는 다큐멘터리도 그렇다. 글렌 굴드에 관한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작품 안에 32를 집어넣어야만 하는 강박증에 사로잡히게 되는 걸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작품의 팬들은 뭐든지 42와 관련시키려 한다던데, 이와도 닮은 것 같다. 골트베르크 변주곡은 2개의 아리아와 30개의 변주곡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개인적으로는 ‘아리아‘ 단어 2번, ‘골트베르크 변주곡‘ 단어 30번이 등장하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도중에 화자가 글렌이 녹음한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들으며 1950년대와 해석의 차이가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있다. 정황상 1982년에 발매된 음반을 듣는 것 같은데, 글렌은 훗날 인터뷰에서 1955년의 연주는 너무 빨랐고 꾸밈이 있었으며, 지금은 골트베르크 변주곡에 대해 그 당시와는 다른 것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인터뷰의 내용은 다른 굴드에 관한 책에서 읽은 내용이며 직접 인터뷰를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출판된 책에 쓰인 내용이니 신빙성은 있는 편이며 만약 이게 맞다면 화자는 굴드의 절친이고, 피아노의 대가이면서도 글렌의 연주를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했다는 모순이 생긴다. 또, 화자는 대중들이 모르는 글렌의 모습을 자신은 온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이 글의 저자도 분명 글렌에 대해서 기껏해야 대중들만큼 알고 있었을 거라는 걸 생각하면 약간 웃기는 장면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모두 부자들로 설정되어 있다. 나 같은 가난한 사람이 봤을 때는 별 것도 아닌 일로 좌절하고, 절망하며, 자살까지 해버린다. 작품 내에 나같은 서민을 대변하는 ‘여관 주인‘이 나와서 이런 웃기는 일을 보고 한 소리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여관 주인은 지저분하고도 음탕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나는 예술가들이 어떤 세계를 사는지 모른다. 피아노를 치든 그림을 그리든, 예술 쪽으로 가려면 집안에 돈이 있어야 한다는 건 초등학생들도 아는 상식이다. 솔직히 나도 이 글을 읽으며 내 입장에선 별 것도 아닌 일로 그렇게 주인공들이 절망하고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는 것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지 않을 수가 없다. 누군가는 예술을 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남한테 기기도 하면서 하기도 싫은 일을 하며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데, 예술의 벽에 좌절해서 자살까지 해버리는 건 부자의 오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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