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른 계절 범우문고 10
전혜린 지음 / 범우사 / 1994년 7월
평점 :
품절


전혜린이다 (1934년 1월1일- 1965년 1월10일)

우울하려고 읽은 책은 아니지만

한창 때인 여자의 감성과, 그 때의 독일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전혜린의 일기등을 모은 책이고 나름의 주제로 편집한것 같다

시간순으로 정리되진 않은걸 보니.

p.24

어렸을 때는 우리에게는 마치 어느 가능성으로든지 길은 다 열려있는 것처럼 세계는 커 보였고 중요했고 자기 자신이 신비스러웠다.

매일매일의 생활이 마치 그림이 잔뜩 들어있는 그림책같이 수수께끼와 신선한 흥미에 넘쳐 있었고 싫증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었다.

20대의 내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것 같다. 젊다는거 말고는 무기가 없는데 되게 큰 무기를 갖고 있는것 같았다. 근데 그 무기로 할 수 있거나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두렵거나 무섭지 않았다는것. 물론 순간순간의 두려움들은 있었겠지만 '내가 지금 30살인거보다야 낫지'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내 생각이어도 옛날이라 확실한건지 모르겠지만.. 내 인생도 지금의 프레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것 같다. 암튼 20대때는 '우울'의 감정이 많이 없었고 여러가지에 신선했으며 활력이 있었고 '싫증'이라는 단어 자체를 별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1월20일(1964년)

결별은 쉬운 일. 그러나 그 다음이 항상 문제인 것이다.

사고는 항상 사실적인 힘임을 믿고 있다. 끊겠다는 의지가 끊는 행위와 같은 것을 뜻하는 셈이다.

그러나 사실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한 미소나 한 눈동자, 한 목소리를 기억의 표면에서 말살해버리는 것은.....

 

'덜 사랑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덜 사랑하는게 아니라 '사랑하지 않게 되어' '헤어져야겠다' 라는 의지가 '헤어진다'는 행위와 같아질 때의 그 슬픔은..

헤어져야겠다는 의지를 밀어내고도 남는 슬픔이었기에..

헤어지고 싶어서 헤어졌던 때에도 한번도 홀가분했던 적은 없었다

 

p.160

나는 무가 되고 싶다. 정화의 인식 세계에 너무 깊이 투영되고 싶지 않다. 정화가 나를 잊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나는 좋은엄마가 되고자 하는 욕심이나 바람이 없다. 나쁜엄마보다야 좋은 엄마가 좋겠지만 굳이 좋은엄마가 될 필요가 있나 싶다. 내가 내 부모님에게 감사드리는 것은 부모님사이가 좋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좋으시고..

그래서 집에 있을 때, 다같이 밥을 먹거나 어디에 놀러갈때 내가 긴장하거나 눈치를 보거나 하는 등의 불안함이 없었다는게 내게 가장 큰 안정감이었던 것 같다. 어차피 키워봤자 소용없는게 자식이라면 나는 남편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에 더 노력하기로 했다.내가 남편에게 괜찮은 아내이고, 그래서 우리의 사이가 좋고, 그걸로 인해 아이들이 집안에서나 집밖에서나 정서적으로 불안하지 않다면 그것으로 보호자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본다.

물론 나도 양질의 좋은 교육을 시키고 싶고 교육적으로 좋은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다. 그러나.. 양질의 좋은 교육을 시킬 돈으로 내가 소고기먹는게 중요하고 얘들에게 시켜줄 좋은 경험대신 내가 가고싶은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게 낫겠다. 나도 힘들게 돈벌고 사니깐.

사춘기즈음이 되거나 아이의 학습능력이 좀 걱정스러운 수준이라면 지금의 내 생각은 달라질지 모르지만..

달라지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애들이 나를 잊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전혜린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딱히 그의 말년에 가서 두터워지는 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제법 초기(1950년대)에 쓴 일기에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꾸준히 있어왔다. 전혜린의 글 속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있는 만큼 생을 향한 의지도 충만한데 결국 죽음을 택한 것이 너무 아쉽다. 그녀가 끝까지 지금으로치면 워킹맘으로서 일과 연구를 지속적으로 해냈다면 현재를 사는 여자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한 선배로 우리가 기댈 수 있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꿈같았던 파리의 풍경도 아울러 생각이 나고, 지금도 있다는 전혜린이 자주 갔었던 '제 로제 (see rose)'도 검색해보면서 우리를 떠났지만 아직도 있는 그녀의 느낌들을 멀찍이서라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가을이고.. 하니까 당분간 전혜린은 찾지 않을 것이다. 연말로 가고있으니 좀 재밌고 에너지있는 글들을 읽고 싶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