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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줄이고 마음 고요히 - 옛시에서 말을 긷다
흥선 지음 / 눌와 / 2013년 7월
평점 :
어설픈 은퇴자로 살고있는 때문일까?
'일-줄이고 마음-고요히'라는 책제목에서부터 강렬한 끌림을 느꼈다.
직장을 다니는 동안에는 왜 이런 여유를 갖지 못했을까..때늦은 후회가 밀려든다.
여전히 출근하는 꿈을 꾸고는 가슴을 쓸어내린 어느 날, 이 책은 나에게 심리적 진통제가 되어 주었다.
이 책은 직지사 주지이신 흥선스님이 손글씨로 옮겨 쓴 우리나라와 중국의 옛 한시들을
계절별로 분류하여 엮은 책이다.
한때 참 즐겨 불렀었던 '동심초(同心草)'라는 가곡의 가사가 알고보니
당대(唐代)의 명기(名妓)였던 설도(薛濤)가 쓴 '춘망사(春望詞)'였구나...
이렇게 하나 둘 재미를 느끼며 읽다보니, 책 제목에 담긴 메시지가 시나브로 가슴에 스며든다.
일-줄이고
○ ...(前略) 땡볕을 핑계로 꾀를 부리다가 며칠째 마당의 풀을 뽑고 있습니다.
비가 지나갈 때면 손을 놓고 기다려야 하는 일이 성가시기도 하지만,
그럴 때 망연히 순한 빗발을 바라보는 것도 좋고 너른 파초 잎에 후두기는 빗소리를 듣는 맛도 나쁘지 않습니다.
여러 해째 풀과 씨름하다 보니 이제는 풀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삽니다.
손바닥만 한 마당 하나를 대충 건사하고 살려해도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 하물며 세상 일이야...하는 생각이 듭니다.
장마는 어쩌면 불볕더위를 예비하라는 자연의 배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만일 그렇다면 쉼없는 계절의 흐름 속에서 장마야 말로 망중한(忙中閑)이요, 달콤한 휴식이요,
용도가 정해진 충전이라고 해야 할 듯합니다.
- 宋代 시인 소순흠의 '여름날(夏意)'에 붙인 글 -
마음-고요히
○ 세상 모든 이웃에게 감사합니다. 당신들의 노동이, 당신들의 땀이,
때로는 당신들의 눈물과 한숨과 피가 나를 있게 하고 세상을 있게 합니다.
세상 모든 이웃을 존경합니다. 당신들은 당신의, 가족의, 이웃의 짐을 지고 있으면서
어쩌다 한번쯤 불평을 할지언정 그 짐을 무겁다 내려놓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이웃에게 늘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내 삶을 통째로 빚지고 있으면서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누려야 할 몫을 내가 가로채고 있습니다.
- 唐代 시인 백거이의 '못가에서(池上篇)'에 붙인 글 -
후반부에 함께 실린 흥선스님의 친필 손글씨와 꽃편지지를 보노라니
오래 전 첫사랑과 주고 받았던 풋풋한 연서(戀書)가 떠올라 감회가 새롭다.
이제라도 컴퓨터 자판을 버리고 다시 손글씨로 돌아간다면, 지친 마음이 조금이나마 회복될 듯 싶기도 하다.
봄 24편 여름 18편 가을 23편 겨울 20편, 이렇게 85편의 한시를 모두 음미하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이들 한시에서 길어올린 샘물로 흥선스님이 지으신 만발공양(萬鉢供養)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