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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리터 - 피의 역사 혹은 피의 개인사
빌 헤이스 지음, 박중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체했을 때 손가락을 따는 민간요법이 정확히 사혈법의 논리와 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웃었다. 피의 그 붉은 빛깔 속에 인간의 근본이 되는 어떤 정수가 담겨 있다는 믿음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덱스터의 오프닝 영상이 잘 표현했듯이 피는 본능적으로 사람을 각성시킨다. 한 방울이면 톡 쏘듯이 철철 흐리면 망치로 머리를 치듯이. 헤모글로빈이 붉은 색인 것이 순전히 우연이라는 걸 알고 있는 지금도 푸른 피나 노란 피가 같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어찌 보면 단순한 원리인 혈액순환이 17세기에 와서야 밝혀진 것에는 피에 대한 선험적 이미지가 워낙 강렬한 탓도 한몫했을 것이다. 현대 과학은 피의 속성에 대해 완전히 간파하고 성분별로 조각조각 쪼개 질병과 싸우고 있지만, 피와 관련한 편견은 여전히 소름 끼치는 이미지를 함께 갖는다.
영미권 남성 저자가 의학과 우리 몸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하는 한편, 그것과 잘 버무려 본인의 개인사를 통해 진지한 대화를 시도하는 논픽션이라는 점에서 데이빗 쉴즈의 '우리는 모두 죽는다'를 떠오르게 하고, 조금 더 범위를 넓히자면 정말 재밌게 읽었던 아툴 가완디의 '나는 고백한다 현대 의학을'까지 비슷한 느낌으로 묶고 싶다. 외양과 달리 야심 없이 가볍게 읽을 책이고, 실제로 금세 다 읽었다.
저자 빌 헤이스의 경우는 게이이면서 에이즈에 걸린 파트너와 함께 살며 '피'라는 소재로 울컥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까. 담백하게 자기 감정을 통제하며 지적으로 뒷받침 되는 주장을 펴는 모습이 매우 매력적이다. '도시적'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데, 이 불분명한 형용사를 정확히 어떤 의미로 써야 할지 망설여진다. 음... 이런 뜻은 전혀 아니지만, 나도 서울이라는 아주 큰 도시 안에서 살아가고 있고, 아마도 단 한 번도 직접 얼굴을 마주치는 일이 없을 나의 이웃이 각자의 위치에서 빌 헤이스처럼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놓인다. 얼굴은 모르지만 어딘가에서 앓고 있는 생면부지의 환자를 위해 헌혈을 하는 그런 유대감 같은 것들.
아, 그리고 에이즈가 80년대에 새롭게 탄생한 병이라는 사실은 알아도 들을 때마다 놀랍다. 사람들은 새로운 병에 또 잘 적응해 살지만.